선풍기에 관한 단상
금년은 더위가 일찍 오고 오래 갈 것이라고 한다. 아직 에어컨을 켜기에는 이른 듯 싶어 선풍기를 꺼내 틀었다.
그런데 내 서재에서 쓰는 선풍기는 날개가 어디에 부딪쳤는지 딱딱 거리는 소리가 났다. 게다가 풍량 조절도 잘 되지 않아 고쳐 쓸까 하다가 퇴역을 결정했다. 아마도 다용도실에 보관하던 중 쓰러졌을 때 어디에 부딪쳐서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요즘은 탁상 미니선풍기로도 시원한 바람을 낼 수 있기에 큰 선풍기는 이제 효용을 다한 셈이다.
문득 1968년 우리집에 금성 선풍기를 처음 들여놓았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시골에서는 앞뒤 문만 열어놓으면 맞바람이 쳐서 더위를 몰랐으나 서울에 올라오니 창문도 쉬 열 수가 없어서 부채질만으로는 더위를 견딜 수 없었다.
직장 다니는 형님이 월급날 새 선풍기를 사들고 오셨다. 포장을 뜯고 스위치를 켰더니 새 공산품의 냄새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부드럽게 또는 세게 부는 것이었다. 여러 식구가 함께 쓸 수 있게 좌우로 바람을 보내는 기능도 있어서 회전 표시가 있는 쪽으로 놉을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앞쪽으로만 바람을 보냈다.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혹시 불량품이 아닌가 교환하기로 하고 다시 포장을 쌌다. 그리고 형님과 함께 판매점으로 달려갔다.
A/S 센터로 안내를 받아 갔더니 담당 직원이 선풍기 날개의 본체 뒤를 열고 어떤 막대기를 제 자리에 꽂았다. 운반 중 포장박스가 뒤집혔을 때 빠진 모양이라며 아무 이상이 없으니 잘 쓰시면 된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시골 촌놈은 가전제품이란 대부분 조립제품이므로 고장이 나면 분해하여 문제된 부분만 수리하거나 부품을 교체하면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연찮게도 KBS 1FM 방송에서 이런 추억을 상기시키는 어느 시인의 '선풍기'란 시를 들려주었다.
선풍기 - 유용주
Fan by Yu Yong-ju
지천명(知天命) 문턱을 간신히 빠져나온
늦가을 새벽은
툴툴거리다가 지쳐 떨어지고
Barely escaping the age of fifty
At dawn of the late autumn,
I grumbled and fell exhausted.
치열했던 열정은 식어
이 빠지고 머리칼 싱글고 눈 흐려진 지 오래,
처진 가슴 위에 먼지만 쌓이는구나
The fierce passion has cooled
While my teeth and hair became thin, it's been long my eyes are clouded.
Dust has mounted on my sagging chest.
닦아내면 상처 자리 빗살무늬 선명한데
여기저기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고 철사로 동여맨
검푸른 한 생애
주름살 파도 넓게 퍼져나간다
When I wipe it off, the scars look clear.
Here and there, the fan was polished, tightened, oiled and wired.
During the lifetime of blackness,
The waves of wrinkles spread wide.
장좌불와(長坐不臥) 20여 년,
아내만큼이나 낡은 몸이 되어
부품 교체하고 수술 자국은 아물어
덜컹거리면서 돌아가는구나
입술에 묻은 밥알도 무겁다는 삼복더위,
죽부인이 따로 없구나
Twenty years of practice only by sitting with no sleep,
Its body became as old as my wife's,
With some parts replaced, scars healed.
It's functioning while rattling around.
In the heat of summer when the rice on the lips felt heavy,
The fan is as superb as a bamboo wife.
날개는 절망에 갇혀 있을 때 더 많은 자유를 원하지,
아내는 흰머리를 뽑아 일기장 위에 쌓아놓고 출근을 했다.
세월은 방학도 없나 보다
Wings want more freedom when they're trapped in despair.
My wife piled her gray hairs on her diary after plucking them out, and went to work.
It seems that time has no vacation.
이제 마지막 더위,
갱년기와 싸울 일만 남았다
무슨 힘으로 저 철망을 뚫고 날아갈까
허연 수의 입고 독방에 갇혀버린
날개이자 감옥인 울울창창 내 청춘
Now it must be the last heat of the year.
I have to fight against menopause.
How can I fly through that wired mesh?
I'm trapped in solitary confinement in a white shroud.
My youth look like those wings in a prison.
시인은 처음엔 낡고 오래되어 덜컹거리는 선풍기를 틀면서 나이 들어서도 돈벌러 출근한 아내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철망 안에 갇혀 열심히 회전하는 선풍기 날개를 바라보며 젊음을 잃어버린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이르렀다.
나 역시 시인과 동년배인데 여름철마다 꺼내서 썼던 선풍기가 생각났다.
비록 생명체는 아닐 망정 나와 함께 여름 더위를 견뎠던 선풍기를 막상 버리고 났더니 마음이 스산해졌다.
마침 저녁에 지는 해가 황홀한 노을을 뒤로 하고 지고 있었다. 그런데 잔고장이 났다고 몇 년을 애용하던 선풍기를 그냥 버리고 말았구나 ~.
노을 - 남진원
Sunset by Nam Jin-won
마당이 환하여 문 열고 나가 보니
노을이 은은하여 눈을 뗄 수 없었네
인품도 이리 닮으라, 그림으로 그렸나
The yard was bright, so I opened the door.
I couldn't take my eyes off the gentle sunset.
Did the sun show me like a painting to resemble its character?
강원도 문래산 아래서 태어난 나와 동갑인 시인(남진원, 1953~ )이 고향 땅을 지키며 묵묵히 시를 벗삼아 고향의 풍경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그는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문래산(文來山,1082m)에 비가 멈추자 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경을 보고 아래와 같이 짧은 시를 지었다.
문래산 - 남진원
Mullae-san by Nam Jin-won
비 맞던 문래산, 비 멈춘 그 순간에
안개 붓 휘두르니 은자(隱者)의 나라구나
고금에 어떤 화가가 저 그림을 흉내 내나
It was raining at Mullae-san, and at that moment, the rain stopped.
The Nature wielded a mist brush, and the land of hermits appeared.
From the old days, who could imitate that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