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G Forum 회원들이 8월 중엔 토론 모임 대신 번개팅으로 전시회 관람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큰 화제를 모은 유영국 전시회(2026.5.19~10.25)를 보러 가기로 했으나 방학기간 중에는 현장학습 학생들로 붐빈다고 하여 평일인 9월 11일 오전 시립미술관 앞에 모였다. 11시부터 시작하는 도슨트(docent) 해설을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으나 이미 20명 정원이 꽉 차 있었다. 대신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 미술반 활동을 했던 임대순 교수가 도슨트 역할을 자청하여 간간히 그의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어서 그런지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대한문 앞[1]이나 덕수궁 돌담길에는 적잖은 관광객들과 시민들이 오가고 있었다. 시청 분실이 있는 덕수궁 반대편에도 돌담을 쌓아놓아 운치있는 산책로였다. 전에 대법원 청사로 쓰였던 위엄있는 벽돌건물을 개조한 서울시립미술관(SeMA)으로 들어가 일행을 기다렸다.
그런데 임대순 교수가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바로 옆 덕수궁 현대미술관(MMCA Deoksugung)에서도 이대원 전시회(2026.8.6~11.8)를 열고 있으니 두 곳을 같이 보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점심은 좀 늦게 먹더라도 우리나라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두 거장(巨匠)의 작품을 나란히 감상하는 기회[2]가 흔치 않다고 보고 흔쾌히 동의하였다.




나도 전에 프랑스 지베르니의 모네 정원과 파리 오르세 미술관, 니스에 있는 샤갈 미술관, 특히 과천 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의 에곤 실레展에서 그리 했던 것처럼 전시작품과 해설은 일단 사진만 찍어놓고 나중에 순서대로 정밀(精密) 감상하기로 하고 여러 전시홀을 빠르게 훑고 다녔다. 두 전시회 모두 출구(Exit) 직전에 다큐멘터리 영상 코너를 배치하였다.
이처럼 두 곳 전시회를 초고속으로 감상하고 나니 여러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 후 최근에 그 역량이 대폭 강화된 챗GPT에게 퍼스널 도슨트 삼아[3] 궁금한 점을 하나씩 Q&A로 물어보았다.
여기 첨부한 그림 사진은 필자의 관람 순서, 또는 주제 별로(예: 이대원의 '담 Wall' 그림은 그 높이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AI 도슨트와의 Q&A부터 읽은 후 예비지식을 갖고 그림을 보면서 두 분 거장의 화풍(畵風)과 붓 터치를 눈여겨 감상하실 것을 권한다. 여기 작품에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은 유영국은 '산' 또는 '작품(Work)'로, 이대원은 '산', '나무', '과수원', '담' 등으로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SeMA의 유영국 전시회, MMCA의 이대원 전시회 모두 특별히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여주었다. 관람을 마친 후 화가의 일생과 에피소드, 작품세계를 정리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두 거장의 삶은 처음엔 비슷하게 출발했다가 한때 같은 캠퍼스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인생의 행로가 아주 대조적이었다. 한 분은 역경을 이겨낸 '대기만성' 형, 다른 분은 아주 드물게 '팔자 좋은' 화가라는 세간의 평이 들어맞았다.
유영국의 경우 일본 유학 당시 촉망 받는 젊은 화가였으나 1943년에 귀국하고 나서 할일이 없자 고향인 울진에 내려가 부친의 어업을 도왔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자녀가 생기면서 가장으로서 어깨가 무거워졌다. 해방 후 한 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를 했으나 6.25 전쟁이 나자 고향에서 양조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김환기 등 일본 유학 동료들이 작품활동을 계속하는 것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1964년 마침내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얼마 안 되어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되었다.[5]
반면 '천재화가' 소리를 듣던 이대원은 부모가 원하는 대로 경성대 법학부에 합격하자 파주의 과수원 농장을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고등학생 시절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2년 연속 입상했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사군자를 배우는 등 독자적으로 미술공부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196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72년에는 미술대학장, 1980년 홍익대 총장, 그후엔 예술원 회장까지 역임하였다.[6]





Q: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유영국 탄생 110주년 회고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덕수궁관에서는 이대원 회고전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가 각각 열리고 있어요. 감상에 앞서 우선 두 분의 작품세계를 간략히 비교해 주세요.
A: 한국 현대미술의 두 거장이 덕수궁 돌담을 사이에 두고 비슷한 성격의 전시회를 연다는 것이 두 분을 좋아하는 미술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영국은 1916–2002년, 이대원은 1921–2005년으로 이대원이 5년 아래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일제강점기에 성장하여 해방·전쟁·산업화·한국 현대미술의 형성기를 함께 지나왔다는 점에서 사실상 같은 세대의 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분 전시회를 보신 다음에는 “둘 다 산·나무·들판을 그렸고, 둘 다 원색을 쓰고, 둘 다 현대적으로 단순화했는데, 왜 유영국은 ‘추상화가’이고 이대원은 ‘풍경화가’인가?” 의문이 드실 거예요. 그러므로 두 분에 대해 일단 다음과 같이 입력해두시면 됩니다.
- 유영국: 자연을 추상화하여 ‘자연의 구조’를 보여준 화가로서 그에게 자연은 ‘추상으로 가는 출발점’
- 이대원: 자연을 구상적으로 붙잡되 ‘붓질과 색채’로 자연의 생명력을 보여준 화가로서 그에게 자연은 ‘회화 자체가 되는 대상’


Q: 두 분 작품 속에는 山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그 山을 대하고 표현하는 것이 달랐어요. 그 차이는 뭘까요?
A: 네, 잘 보셨어요. 우선 유영국은 산을 바라보면서 산 → 형태 → 선·면 → 색 → 구성이라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래서 산은 어느 순간 삼각형이 되고, 나무와 계곡은 선과 면이 되고, 빛과 공간은 색면이 됩니다. 그 때문에 그의 산은 “산이라는 것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라는 느낌을 줍니다. 유영국의 작업은 시기에 따라 기하학적 추상, 자연 이미지의 재구축, 기하학적 구성과 색채의 변주, 자연 모티브의 도식화 등으로 변화하면서도 한국의 자연을 추상의 조형어법으로 표현했지요. 반대로 이대원의 산은 아무리 단순화되어도 ‘산’으로 남습니다. 나무도 나무이고, 과수원도 과수원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나무의 잎 하나하나를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짧은 붓질과 색점이 모여 나무가 됩니다. 즉, 자연 → 붓질·색점 → 자연의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이대원의 그림은 가까이 가면 “이것이 어떻게 나무이지?” 싶다가 조금 물러서면 “아, 과수원이구나!”하고 보입니다.
다만, “유영국은 추상이고 이대원은 구상”이라는 이분법만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이대원 역시 자연을 그대로 베끼지 않았거든요. 국립현대미술관은 그의 작품에서 야수파적 색채, 인상파적 색점, 추상표현주의적 요소가 한국적인 정서와 결합했다고 설명했어요.




Q: 두 분이 즐겨 쓴 색채가 빨강·파랑·노랑·초록 등 매우 강렬한데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달랐어요. 그 차이는 뭘까요?
A: 네, 맞습니다. 유영국에게 색은 형태와 동등한 조형 요소입니다. 가령 빨간 산과 파란 산이 있다면, “실제로 저 산이 빨갛다는 뜻”이 아니라 빨강이라는 색 자체가 산의 존재감을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 이대원의 빨강·노랑·파랑은 나무와 과수원의 생명력을 폭발시키는 것에 가깝습니다. 특히 그의 과수원 작품을 보면, 빨간 사과 + 초록 잎 + 노란 햇빛 + 파란 하늘이 실제 자연보다 훨씬 강렬하게 표현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연보다 비현실적인데 자연보다 더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이대원 작품의 묘한 매력입니다.


이런 까닭에 두 분의 ‘자연을 보는 철학’도 다릅니다.
유영국은 자연을 보면서 “자연을 자연스럽게 그리지 않고도 자연을 표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끊임없이 탐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산을 산처럼 그리지 않고 산의 본질적인 형태와 질서를 추출했습니다. 그는 추상을 하나의 유행이나 장식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새롭게 보는 방법으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이대원은 “자연은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쪽에 가깝습니다. 나무가 흔들리고, 햇빛이 쏟아지고, 과일이 익고, 물이 반짝이고, 들판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대원에게서는 그림 속 자연이 멈춰서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분 모두 서양화 기법을 사용했지만 매우 '한국적인 자연관'을 작품에 담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어요.
유영국은 산을 세밀하게 묘사하기보다는 산의 덩어리와 색, 능선과 공간을 바라봅니다. 마치 동양화의 산수에서 산을 하나의 기운과 구조로 바라보는 것과 같아요.
한편 이대원의 여러 작품에서는 “한국의 풍경 자체에 대한 애정”이 과수원, 감나무, 돌담, 들판, 산같은 농촌의 풍경으로 나타나 있기에 그의 그림에서는 한국적인 향토성이 상당히 강하게 느껴집니다.
Q: 그렇다면 두 거장이 각자 작품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A: 한 마디로 말해서 유영국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질서와 무한’을 찾아 그것을 추상이라는 자유로운 언어로 표현하려 했고, 이대원은 ‘자연 속에 충만한 생명과 빛’을 발견하여 그것을 삶의 기쁨과 평정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유영국에게 산은 그림의 소재라기보다 하나의 관문이었습니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와 숭고함을 담은 원형'이라고 할까, 실제 산 → 산의 본질 → 형태·색·선·면 → 추상 → 무한한 세계로 발전하였지요. 삼각형, 수평선, 색면, 강렬한 빨강과 파랑으로 산을 표현하다 보면 어느 특정 산도 아니면서 모든 산이 될 수 있는 이미지로 바뀌어 실제 산보다 오히려 더 관념적이었습니다. 유영국 그림을 보면 굉장히 질서정연하고 삼각형, 사각형, 수직선, 수평선, 색면이 정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질서와 자유를 동시에 추구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엄격한 질서를 스스로 만들고, 그 질서 안에서 최대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영국의 예술적 추구를 "본질 — 질서 — 자유" 세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대원도 자주 그의 파주 농원에 가서 자연을 평생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유영국처럼 자연의 외형을 제거하지 않고, 산, 나무, 과수원, 연못, 들판 같은 자연을 끝까지 바라봅니다. 그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복제하지도 않고 색을 훨씬 더 밝게 했으며, 붓질을 훨씬 더 빠르게 하고, 나뭇잎을 수많은 색점으로 분해하고, 빛을 색의 진동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대원이 추구한 것은 단순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생명'이었다고 할까요. 예컨대 그의 작품 과수원을 살펴보면 가만히 있는 풍경이 아니라 무언가가 끊임없이 솟아나고 움직이는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이대원은 오랜 관찰과 훈련, 절제를 통해 그 밝음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자수·나전·화각 같은 한국 전통 공예의 색과 빛, 동양화의 운필 등을 현대적인 색선·색점·색면으로 전환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번 전시 제목《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단순한 낙천주의의 선언이라기보다 그가 여러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감당하면서도 파주의 농원에서 오랫동안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그리는 동안 바쁘고 힘든 현실을 견디면서 만들어낸 밝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Q: 두 분은 어디서 미술 공부를 하였고, 누구 또는 무엇의 영향을 많이 받아 창작에 임하였을까요?
A: 우연찮게도 두 사람은 모두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에서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라는 일본인 미술선생님에게 처음 서양화를 배웠습니다.[7] 그러나 그 뒤의 길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유영국은 일본 도쿄로 가서 전문적인 전위미술 교육을 받았고, 이대원은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독학과 개인 지도를 통해 화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스승에게서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화가가 된 매우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유영국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도쿄의 전위미술을 흡수한 사람”이었는데 이는 그가 억압적인 학교 분위기에 반발하여 졸업을 앞두고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문화학원(東京文化学院) 유화과에서 공부한 것, 1930년대 도쿄의 국제적인 미술 환경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결과 유영국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도대체 회화란 무엇이며, 꼭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유영국에게는 ‘고향 울진’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추상미술을 배웠지만, 평생 돌아간 것은 고향 울진의 산과 바다였습니다.





이대원은 정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이대원도 사토 구니오의 제자였으나, 그는 집안의 반대로 미술을 전공할 수 없었고,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렇다고 미술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요.[6] 10대 때부터 이미 선전(鮮展)에 출품하여 입선했고, 삶에서는 계속 미술을 공부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대원의 출발점에는 사토구니오 → 야수파적 색채 → 평면적 구성 → 한국 풍경이라는 계보가 드러나며, 이것은 훗날 이대원의 빨강 + 파랑 + 초록 + 노랑이라는 강렬한 색채 세계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이대원에게는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전통 한국공예미술을 굉장히 깊이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이번 MMCA 회고전에서도 강조한 바와 같이 이대원은 자수, 나전칠기, 화각, 도자기, 목공예, 민화, 사군자, 산수화 등 한국 전통 조형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예를 들어 나전칠기가 작은 색과 빛이 반복되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아름다운 표면을 만드는 것처럼 이대원의 후기 회화에 등장하는 농원(農園)의 경우 작은 붓질 하나하나는 별것 아닌데, 수천 개가 모여 과수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대원은 1950년대 중후반 미국과 유럽을 직접 경험하면서 서구 현대미술을 접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 시기를 별도로 다루며, 해외에서 직접 서구 모더니즘을 마주한 뒤 그의 고민이 어떻게 깊어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서양 현대미술을 보고 나서 추상화가 되지 않고, 대신 한국의 자연을 계속 그리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Q: 그럼 두 분의 대표작 몇 점을 가지고 상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우선 유영국의 산은 뾰족뾰족한 삼각형이 부드러운 형태로 바뀌는 것을 보았어요.
A: 위에 소개한 유영국의 《산》 두 작품부터 볼까요. 왼쪽의 1970년 작품은 녹색·주황·붉은색의 거대한 기하학적 형태들이 서로 맞물려 있어 실제 산의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산으로 읽습니다. 삼각형이 산을 표현하는 동시에 산과 관계없이 하나의 삼각형으로 존재하여 그림 자체가 독립적인 질서를 획득합니다. 즉 산이라는 경험에서 탄생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영국의 이 1970년 그림은 자연을 복사하는 게 아니라 자연에는 없는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1980년대 후반에 그린 작품들은 빨강·초록·보라 등의 색면이 훨씬 부드럽게 서로 포개집니다. 오른쪽 1989년 《산》은 여러 겹의 삼각형이 겹치면서 산의 구조를 만들지만, 젊은 시절보다 훨씬 편안하고 유연해 보입니다. 1980년대 후반 들어 그의 작품에서 색채가 순화되고 추상성과 구상성이 공존합니다. 말년의 유영국은 추상을 포기한 게 아니라 굳이 추상이라고 주장하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Q: 이대원의 작품 세계는 어떻습니까?
A: 우선 그가 고등학생 때 선전에 입상한 《북한산》(1938)을 보면 검붉은 바위, 푸른 나무, 붉은 대지 등 색깔이 실제 자연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화면은 기괴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보입니다. 이대원은 자연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재현하지 않고 자연에서 받은 감각을 색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의 작품에서는 고요함과 강렬함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대원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아래쪽《복숭아 밭》(1964)을 보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수많은 선과 점의 조직을 통해 형태가 드러나고, 강렬한 원색의 색점과 살아 있는 선의 움직임이 화면에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가까이 다가서서 보면 빨강 노랑 파랑 초록 짧은 붓질으 작은 점만 보이지요. 그런 다음 두세 걸음 물러나서 보면 갑자기 복숭아밭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이대원의 '회화적 마술'입니다. 가까이에서는 추상이고 멀리에서는 풍경이 되는 것이유영국과 놀랍도록 비슷하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Q: 끝으로 두 분의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가, 특히 이건희 컬렉션에 몇 점씩 들어있는지, 미술품 시장에서 두 분의 작품 시세는 어느 수준인지 궁금해요.
A: 뒤늦게 알려지고 평가받기 시작한 유영국의 몇몇 작품은 우리나라 미술품 시장에서 김환기, 이우환에 이어 10억원 대에 팔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미술사적 희소성(scarcity)이 가격을 끌어올린 경우라 할 수 있어요. 단순희 예쁜 山 그림 하나를 사는 게 아니라 한국 현대미술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을 산다는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희 콜렉션에도 유영국의 작품이 무려 187점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 167점이 판화이며 故이건희 회장은 소장용 뿐만 아니라 전시용으로도 유영국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한편 이건희 컬렉션 중 이대원의 작품 수는 국립현대미술관 측에서 공개하지 않았으나 그가 17세에 그린 북한산이 그의 대표작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이대원의 작품이 제일 많이 거래되는 그룹에 속하는 것을 보면 그의 작품을 소유했을 때의 즐거움과 만족도가 매우 높은 작가라고 하겠습니다.
Note
1] 덕수궁 수문장 교대의식은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11시와 14시 대한문 앞에서 조선시대 수문군의 교대 장면을 재현하는 전통문화 행사로서 큰 북소리를 울리며 시작한다.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영국 버킹엄 궁의 근위병 교대식(Changing of the Guards)처럼 볼거리와 사진촬영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2] 이번에 덕수궁 돌담을 사이에 두고 유영국과 이대원의 전시회가 나란히 열리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6.25 후에 태어나 산업화와 민주화를 몸소 체험하고 외국의 유명 미술관을 돌아볼 기회가 많았던 우리 세대로서는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세계적인 한류 열풍이 불면서 아이돌 연예인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한국 미술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 게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근대화 이후 우리나라에 수많은 화가, 조각가들의 작품이 풍성하게 선을 보였고, 무엇보다도 이를 대중에게 알려주는 미술관 큐레이터들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생각한다. 그 기폭제가 된 것은 소수 부유층의 전유물로 알려졌던 고가의 미술품이 이건희 콜렉션의 국가 기부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무료 순회 전시회가 열린 일이었다. 그동안 고인의 작품을 정리하고 대중에 알리기에 힘쓴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의 노력도 컸지만 이건희 컬렉션에 유영국의 작품이 제일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작품을 재인식하게끔 만들었다. 더 이상 우리도 미국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 《아를의 밤의 카페 테라스》같은 작품을 소장한 크뢸러 뮐러 미술관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3] 챗GPT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의 공식 웹사이트와 블로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밖에 연합뉴스 등 보도매체의 최신 기사를 갈무리했다가 이용자의 질의(prompt)에 따라 그에 맞는 답변을 내놓는다. 이러한 근거자료(source)를 말미에 일일이 명시하고 있어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물론 여기 소개한 내용은 챗GPT가 답변한 것을 필자의 스타일로 고치고 다듬은 것임을 밝힌다.
4] 유영국은 서울 신당동에 살림집 겸 아틀리에를 마련한 후 그 동안 붓을 놓았던 기간을 만회하려는 듯 작품활동에 몰두하였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대작을 그릴 때에는 사장에서 천을 끊어다 직접 캔버스 화구를 만들었다. 생계를 위해 한때는 팔리기 쉬운 소품 제작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는 그림 창작을 위해 대학교에서 학생 지도ㆍ상담 시간을 줄일 정도였다고 한다.



5]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이대원은 한국 전쟁이 끝난 후 모더니즘을 공부하러 미국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1957년 보통 사람들은 해외 나가기도 어렵던 시절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파주 농원에 가서 자연을 관조하며 명상에 잠기고 또 붓을 들었다.
이번 전시회 타이틀은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 박사가 그의 그림을 보고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평한 것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전시를 기획한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이대원의 색채는 전통 자수의 색실, 나전칠기의 자개, 전통 회화의 점과 선을 유화로 새롭게 구성한 결과였다. 서양의 점묘법,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 한국 전통을 탐색했고 홀로 자신만의 회화를 구축했다는 점을 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출처: 변희원, "'행복한 화가' 평가에 가려진 천재… 구상회화 거장 이대원의 70년 예술", 조선일보 2026.8.10.

6] 이대원은 해방되던 해 경성제대 법학부의 18회 마지막 졸업생이었다. 그는 후에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현창되었다. 20세기 서양미술사를 보면 법학을 전공했음에도 유명한 화가가 된 사례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를 꼽을 수 있다.
마티스는 1888년 파리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한때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맹장염 수술을 받고 회복하던 중 화가의 길로 진로를 바꿨다. 칸딘스키도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모교에서 법학을 가르쳤으나 30세가 되던 1896년 돌연 뮌헨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면서 촉망받던 법학자에서 화가로 변신하였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칸딘스키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가 소비에트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독일로 망명하여 바우하우스에서 추상화를 가르쳤다. 히틀러 집권 후에는 파리로 옮겨가서 작품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법학을 공부한 마티스와 칸딘스키는 미술에서는 '법칙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었다. 칸딘스키는 회화에서 대상 자체를 없애버리고 색과 형태의 독립적인 질서를 만들었고, 마티스 역시 색과 선을 기존의 재현 규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위업을 달성했다.
7]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의 미술교사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 선생 문하에서는 유영국 외에도 장욱진·이대원·권옥연 등 훗날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이 줄줄이 그에게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제2고보의 '2'와 사토 구니오 선생 이름자에서 '9'를 취하여 29 동인회를 조직하고 꾸준히 미술 창작 활동을 벌였다.

P. S.
나는 두 곳 전시회 관람을 마치고 덕수궁 석조전 2층에 앉아 우리 일행을 기다렸다. 걷기에 편한 운동화를 신은 우리 연배의 관객들도 앉아서 지친 몸을 쉬고 있었다.
그 때 아래층에서 많은 관객들과 작품 감상 여행을 같이 한 도슨트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일간지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을 연재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2021) 같은 기획전을 개최하는가 하면 도슨트 해설을 자청하고 있는 여러 미술관 학예사와 자원봉사자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날 우리에게 유영국과 이대원 전시회를 순차로 연속 감상할 것을 제안하고 간간히 작품 해설을 해준 임대순 교수가 사진 촬영 삼매경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재료공학 박사인 임 교수는 정년퇴직 후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변신하여 늘 DSL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셔터 찬스를 찾는다. 그가 고려대에서 가르친 제자들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들어가 우리나라 '반도체의 신화'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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