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s 34

봄이 간다커늘 ‥‥ 서럽구나

꽃샘추위가 오래간다 싶더니 이내 봄기운이 온누리에 가득찼다. 잠시 지체되었던 화신(花信)이 일제히 당도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 탓인지 전에는 일주일씩 간격을 두고 순차로 피던 진달래, 개나리, 목련, 벚꽃이 거의 동시에 피고 지는 것 같다. 5월이 되어야 피던 라일락 꽃도 피어나 지금 '벚꽃 엔딩'을 함께 부르고 있다. 그렇기에 옛부터 시인은 가는 봄을 서러워말라고 일렀나보다. 봄은 낙화를 남기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봄이 간다커늘 술 싣고 전송(餞送) 가니 낙화(落花) 쌓은 곳에 간 곳을 모르노니 유막(柳幕)에 꾀꼬리 이르기를 어제 갔다 하더라 They say spring is leaving, so I bring bottles of wine to see it off. From the..

Talks 2024.04.09

봄이 오는 길

정봉렬 시인이 새봄을 맞아 시 한 수를 보내주셨다. 여러 번 읽고 또 읽으니 함축되어 있는 의미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영어로 옮기기 위해 여러 가지 표현을 시도해 보면서 그러한 생각이 더 또렷해졌다. 봄이 오는 길 - 정봉렬 The Way Spring Comes Along by Chung Bong-ryeol 봄은 길을 따라 오지 않는다 바다를 건너 올 때도 뱃길 따르지 않고 산맥을 넘을 때도 바람에 몸을 싣지 않는다 봄이 오는 길은 따로 없다 언 땅 밑으로 흐르는 물에나 깊은 잠 속의 짧은 꿈에서도 아지랑이로 살아오고 만나고 헤어지는 정류장을 아무도 모른다 Spring doesn't come along the road. Even when it comes across the sea, It does not..

Talks 2024.03.01

'때'와 '인연'이 좌우하는 우리 삶

KBS 1FM 의 [아침의 가정법, 만약에] 시간에 피사로와 그의 부인 이야기를 들었다. 배우 윤유선 씨가 들려준 피사로의 이야기는 놀랍고도 새로웠다.초등학교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모네, 세잔 같은 인상파 화가를 알기도 전에 '사진 찍은 것 같은' 풍경화를 그릴 때마다 피사로의 달력 그림을 교본으로 삼고 있었음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윤유선 씨가 들려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피사로가 보불전쟁을 피해 런던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프러시아 군이 주둔해 있던 그의 집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20여년간 그렸던 그림을 창고에 숨겨 놓았는데 상당수를 훔쳐갔고 대부분 훼손돼 있었다고 한다. 동네 여인들이 눈..

Talks 2024.01.30

月山大君의 내려놓는 지혜

요즘 정치권에서는 "국회의원의 특권을 내려놓아라", "당대표 직을 내놓아라", "[탄핵을 할 테니] 장관/검사 직을 내놓아라" 등 사퇴를 요구하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 그것이 그 동안 정치권의 그릇된 관행과 잘못된 사회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정풍(整風) 운동이라면 국민의 입장에서는 고무적이다. 그 결과 물러난 사람의 빈 자리에 새로운 혁신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앉아야 할 것이다. 며칠 전 풍류를 즐기는 친구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며 월산대군(月山大君 李婷, 1454-1488)[1]의 시조 한 수를 보내왔다. 우리 시에서는 아주 드물게 각 행이 고어체이긴 해도 'ㆍㆍ노매라'로 끝나는 아름다운 시조였다. 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들이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 ..

Talks 2023.12.28

어느 가을날의 서정

11월이 되었구나 했는데 벌써 중순에 접어들었다. 이맘 때면 Yanni의 아주 경쾌하면서도 웬지 쓸쓸한 'November Sky'를 즐겨 듣곤 한다. 함께 감상하는 YouTube 뮤직비디오에서는 황홀하리만치 온통 붉은 단풍으로 물든 가을 풍경이 배경으로 펼쳐진다. 모임이 있어 찾아간 경복궁 옆 자하문로에도 은행나무 가로수가 아름다운 새 옷을 입었다. 아니 절정이 지난 후였다. 이 거리는 코로나 거리두기가 끝난 후 수많은 관광객들로 시내에서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가 되었다. 주말이면 북한산 오르는 컬러풀한 등산복 차림의 시민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Season of Abundance 이러저러한 이유로 가로숫길에서 은행나무가 사라지고 있는 요즘 모처럼 풍성한 노란 은행잎을 보니 아주 반가웠다. 게다가..

Talks 2023.11.14

조간을 읽다가 龍湖를 떠올리다

나에게 새벽 시간은 매우 소중하다. 새벽에 배달되는 조간 신문을 읽는 것으로 모닝 루틴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은퇴 후 특히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에는 외부 정보의 대부분을 신문에 의존했던 터라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현관 앞에 놓인 조간 신문부터 집어들게 된다. 제1면이 정치면이니 아무리 정치에 관심을 끊으려 해도 국내 정치 헤드라인부터 읽게 된다. 11월의 첫 날 1면을 훑어보니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면서 작년과 달리 낮은 자세로 협조 요청을 했다는 기사가 나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대표에게는 "부탁드립니다" 먼저 손 내밀고 하루 3차례 악수를 나누었다며 두 사람이 악수하는 사진도 실려 있었다. 며칠 전 카톡방 친구 소개로 읽었던 한시(漢詩)가 생각났다. 17세기 조선 최고의..

Talks 2023.11.01

성경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

성경에는 보물이 들어 있다고들 말한다. 대부분 성경 말씀에서 영적 양식을 구한다는 의미로 쓰는 말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구약성경의 지명을 나타내는 말이 기름이나 가스와 연결되어 있으면 탐사에 나선다고 한다. 실제로 이스라엘 해안에 가까운 지중해에서 유전과 가스전을 발견한 사례가 많았다. 말 그대로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온누리교회에서는 지난 여름부터 성경 창세기 강해설교가 진행 중이다. 우리가 많이 들어 알고 있는 구약의 천지창조와 대홍수, 그리고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조상(혹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또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을 깨우치게 되어 스스로 놀라곤 한다...

Talks 2023.10.16

어김 없는 계절의 순행

더위가 수그러들지 않은 채 처서가 지났다. 9월 백로는 선선한 날씨를 예고하는 절기임에도 낮에는 여전히 30℃가 넘는 늦더위가 계속되었다. 이젠 기상이변을 탓하기보다 지구열화(Earth boiling)를 걱정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9월이 중순에 접어드니 귀뚜라미 소리도 요란하고, 밤에는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어와 창문을 닫아야 했다. 늦 팔월의 아침 - 김영남 A Late August Morning by Kim Young-nam 덥다고 너무 덥다고 저리 가라고 밀어 보내지 않아도 머물고 떠날 때를 알고있는 여름은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잠깐 머물다 금새 떠날 것을 알면서도 호들갑을 떨며 아우성을 치던 우리는 언제 그랬냐고 정색을 하며 가을을 반기겠지 It's hot, so hot. Even if ..

Talks 2023.09.13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으면서 (送夏迎秋)

폭염과 호우, 홍수로 얼룩졌던 여름이 물러가고 조석으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왔다. 정말 선풍기 바람 만으로는 견딜 수 없었던 후꾼한 열기가 이젠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아니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외기(外氣)가 선득선득해졌다. 가을은 결실(結實)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열매를 실하게 키운 과일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침 전북 장수에서 감 농원을 하고 있는 유양수 친구가 보름 전 어린 감나무에 대한 사연을 전해 왔다. 2년 전 농원 가는 길옆의 3년생 어린 감나무가 트랙터에 무참히 짓밟혀 쓰러져 있던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버팀목을 대서 일으켜 세우고 껍질이 벗겨진 곳에는 약도 발라주었다고 한다. 농원에 오가며 꾸준히 보살펴 주었는데 3년째 되는 금년에는 활력을 되찾아 건강하게 ..

Talks 2023.08.31

배롱나무와 연꽃

2023년 8월 교회 공동체 아웃리치 행사로 찾아간 부여는 두고두고 배롱나무 꽃과 궁남지 연꽃으로 기억될 것 같다. 마치 지난 봄 프랑스 여행이 모네 정원에서 본 등나무 꽃과 색색깔의 튤립으로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반도를 관통한 태풍 카눈이 수도권과 충청도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떠난 탓에 부여 부소산에는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관광객들도 많지 않아 부소산성 공원 경내는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우리는 입장하기 전에 우선 단체사진부터 찍고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에 붉은 배롱나무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어젯밤 묵었던 숙소의 정원에는 흰 배롱나무 꽃이 있었는데 역시 배롱나무는 진붉은 색이 제격이랄까? 비유하자면 붉은 배롱나무 꽃이 충절의 ..

Talks 2023.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