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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과 은둔, 천산둔(天山遯)

Whitman Park 2024. 9. 24. 18:00

대학 동창회(회장 김종인 변호사)에서 2025년이면 졸업 50주년이라면서 몇 가지 행사를 기획했다.

처음엔 부부동반 해외여행을 추진했으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여행은 힘들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서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할 수 있고 우리의 나이에 걸맞는 문화ㆍ예술 이벤트를 곁들인 국내여행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또 회장단이 준비한 것은 동창회 기금을 가지고 회원들에게 기념품과 선물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회원들의 주소록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회장 비서가 연락을 취하니 보이스 피싱으로 오인을 받아 통화 자체가 안된다는 말에 허무정 동기가 자원봉사를 하여 주소록을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우리 회원들의 반응이었다.

물론 그간 동창 모임과의 소통 연락에 소홀했다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친구들이 많았다.

벌써 유명(幽明)을 달리하거나 해외 거주하는 동기들도 여럿이었지만,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도 카카오톡을 하지 않는다거나 아예 주소록 등재를 원치 않는다는 동기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완전한 은퇴'를 한 것이고, 은둔거사(隱遁居士, hermit)처럼 살겠다는 의미였다.

 

 

나로서는 예상 밖이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같은 친구들의 반응에 대해 물어보았다.

와이프는 "TV <자연인> 프로가 왜 생겼겠어요?" 하고 반문했다. 나도 그 프로를 즐겨 보았기에 대강 짐작이 갔다.

또 서양의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족처럼 평생 먹고살 것을 이미 마련한 사람은 세상을 떠나서 유유자적하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 친구는 젊어서 자기 일만 열심히 했던 사람은 막상 은퇴하면 소셜 네트워킹에 애를 먹는다고 하면서 고위관리, 대학교수를 지낸 사람에게 그러한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어느 유식한 친구는공자님 말씀에도 일흔이면 종심소욕(從心所慾)의 나이가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하든지 거리낌이 없다는 불유구(不踰矩)의 뜻을 설명했다.

 

전에 산업은행 조사부에서 상사로 모셨고 지금도 뵐 때마다 좋은 말씀을 들려주시는 김기성 박사님께 같은 질문을 드렸다.

한참 생각하시더니 주역의 제33괘 천산둔(天山遯, '돈'으로 읽기도 함)의 괘사를 풀이해 주셨다. 어느 경지에 이른 사람은 그런 식으로 거취를 정한다는 말씀이었다. 

 

괘사: 遯亨 小利貞
해석 : 遯(집에서 키우는 돼지로 물러서기를 잘한다)은 안에서는 형통하나, 작은 일도 올바로 해야 이롭다.

上九  肥遯无不利 (풍요로운 여건에서 물러서면 불리함이 없다)  
九五  嘉遯貞吉 (아름다운 시기에 물러나면 길하다)  
九四  好遯 君子吉小人否  (좋은 관계에서 물러서면 군자에게는 길하나 소인은 그렇지 않다)  
九三  係遯 有疾 厲畜臣妾吉 (서로 엮여서 물러남은 병이 생기고 위태로우니 신하와 첩을 두어야 길하다)
六二  執之用黃牛之革 莫之勝說 (황소가죽으로 묶어도 해결되지 않는다)
初六  遯尾 厲勿用 有攸往 (꼬리로 물러남은 위태롭고 나아가는 것은 이롭지 않다)

 

여기서 물러날 때에는 서로 엮여서 물러남(係遯), 좋은 관계에서 물러남(好遯), 아름다울 때 물러남(嘉遯), 풍요로운 여건에서 물러남(肥遯) 등 여러 양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각자의 위치에서 은퇴에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김 박사님은 일본 에도 시대의 유학자 오규 쇼라이(荻生徂來, 1666~1728)가 논어, 주역 등 중국 사서삼경의 해석에 있어 일본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하셨다.

우리나라의 유학자들이 성리학을 논하면서 理와 氣를 따지고 있을 때 오규 쇼라이를 비롯한 일본 유학자들은 일본 사람들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한문 번역을 중시함으로써 실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하고 일본 근대화의 사상적 기초를 놓았다고 부연설명하셨다. 당시 조선조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ㆍ이념적 반대파를 모조리 제거하였으니 그 이후 우리나라는 붕당정치, 세도정치로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점심 모임에는 시위 참여 등을 이유로 사법시험 3차 시험에 떨어지고 산업은행 조사부에서 근무하다가 노무현 정권에서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던 신상한 변호사도 나왔다. 그리고 1990년대 산은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에서 3년 근무하는 동안 온 가족이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문물을 접할 좋은 기회를 가졌다고 말했다. 나 역시 은행 재직 당시 유럽 1년, 미국 뉴욕 3년 살았던 것이 내 인생의 큰 자산이 되었다고 맞장구 쳤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황혼기에 주변 소셜 네트워크와 떨어져 사는 것도 마지막을 준비하는 현명한 자세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시쳇말로 혼자 있으면 외롭긴 해도 여럿이 있으면 괴로운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자녀 혼사, 손주 유무는 부모로서도 괴로운 화제가 되었으니 말이다.

김기성 박사님은 동양의 정치학 교과서로 널리 읽혔던 서경(書經) 홍범(洪範) 에 인간이 향유하는 오복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하였던 것을 한자를 써가며 설명하셨다. 인간이 희구하는 다섯 가지 복(福)이 있는데 장수하는 것, 재산이 넉넉한 것,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 덕을 쌓고 베푸는 것(攸好德) 외에 하늘로부터 받은 수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考終命)이 얼마나 중요하냐고 말씀하셨다.

 

생각해보니 대학동창들로부터 떨어져 살겠다고 한 친구들은 고종명을 맞기 위해 동창들과 수복강녕을 비교할 것 없이 자기만의 덕을 쌓고 편안히 가겠다는 의지의 발로라 여겨졌다.

헤어질 때 김기성 박사님은 둘째 아들인 연세대 의대 김범경 교수가 연구논문이 인용지수(IF)가 높은 것으로 학교에서 연구업적 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연말에는 아시아의 Emerging Scientist로서 도쿄대 의대 교수와 함께 큰 상을 받게 되었다고 귀띔해 주셨다. 그가 간(肝)질환 환자들을 위해, 아니 인류의 건강 복지를 위해 큰 업적을 쌓아가는 모습에 산업은행 뿐만 아니라 인생 선배로서 김기성 박사님께 진심으로 축하를 드렸다. 그것은 어느 것과도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김범경 교수가 미구(未久)에 노벨 의학상까지도 받았으면 하는 국민적인 바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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