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s

홍유손, 모래밭에 누워 (題江石)

Whitman Park 2024. 8. 13. 12:10

얼마 전 강릉 경포대 바닷가에 놀러 갔다.

백사장에는 폭염이 작열하고 있어서인지 비치 파라솔 아래나 바닷물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나도 바람이 살랑거리는 솔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하늘과 바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물멍 때리기를 하고 있었다.

사고(思考)의 정지 - 그 순간 현재와 과거, 미래를 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속세을 벗어나 칠언절구로 사고의 정리를 한 선인(先人)이 있었다.

 

 

題江石  -  篠叢 洪裕孫

 

濯足清江臥白沙

心神潛寂入無何

天敎風浪長喧耳

不聞人間萬事多

 

강가의 돌에 적다  - 소총 홍유손

 

맑은 강에 발을 씻고 모래밭에 누우니 
심신이 고요해지며 무아지경이 되었네
바람 소리 물결 소리만 귓전에 울릴 뿐
속세의 부질없는 일은 들리지 않는구나

 

홍유손(洪裕孫 호는 篠叢, 狂眞子, 1431-1529)은 아전 집안 출신이었으나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뛰어난 문장력으로 김시습과도 교유를 하였으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보고 벼슬길을 포기한 채 산천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그러나 연산군 때 김종직의 제자였다는 이유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관노로 끌려갔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일흔이 넘어서야 배필을 구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성(至誠)이라 지었다. 그는 백세 장수를 하고 선인(仙人)이 되었다고 전한다. 홍지성 또한 학문이 뛰어났으나 아버지가 사화로 곤욕을 치른 것을 보고 향리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은둔거사로 살았다고 한다.

 

* 이창기, 제강석 (2019 제주서예문화축전 대상작). 출처: 제민일보

 

Writing on Stone   by Hong Yu-son

 

Washing my feet in the clear river, I lay down on the white sands. 
My mind and body became calm, and I was put into a trance.
Only the sound of wind and lapping waves was heard.
I couldn't hear the frivolities of the mundane world.

 

* 강원도 홍천의 고즈녁한 수산강변. 출처: 홍천 이야기 (문화관광포털)

 

같은 피서를 하더라도 바닷가와 계곡 등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물놀이 명소를 찾아다니며 SNS에 동영상으로 소개하는 생활의 달인(SBS 생활의 達人, 2024.8.12 방영)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물 맑고 고기가 많아 스노클 같은 물놀이를 할 수 있는 해변이나 계곡 등 숨은 명소가 많다면서 이를 소개한 인스타그램은 수만 명의 조회수를 자랑 (@yeoniiique) 하고 있다.

소총 선생의 말을 빌린다면 맑은 강과 백사장을 찾아다니면서도 속세의 인간들에게 더 많은 볼 거리를 제공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TV나 YouTube 동영상, SNS로 많이 알려지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세상사 잊고 조용하게 피서를 즐길 수 없게 될 터인데 아이러니칼 했다.

 

그것은 한 친구가 희귀한 사진이라면서 단톡방에 올린, 물총새(Kingfisher)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데 그 머리 위에 잠자리가 앉는 사진과 흡사했다. 잠시 후 잡아 먹힐 줄 안다면 새의 머리 위에 앉아 쉴 수 있겠는가!

구글렌즈로 검색해 보니 인터넷에는 이 같은 사진이 많이 퍼져 있어서 인공지능으로 만든 가짜 이미지 같진 않아 보였다.

 

* 도저히 있을 법 하지 않은 물총새와 잠자리의 랑데뷰. 출처: imgur, Pinterest

 

홍유손이 제주 귀양살이를 끝내고 육지로 돌아갈 때 지은 시를 찾아서 읽어 본다.

흰머리와 여윈 몸 외모부터 달라졌지만 햇살 비치니 어두운 숲이 환해진 것처럼 아름다운 산과 바다, 기화요초를 보면서 싯구를 읊었다고 담담히게 서술하고 있다. 

지금 우리도 전례없는 폭염과 열대야로 한여름을 보내고 있지만 소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질 것이다. 그때는 무엇으로 지난 여름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얼음 물과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었다고 고백해야 할까! 

 

海島述懷  - 洪裕孫

바다 가운데 섬에서 읊다  - 홍유손

 

謫居島嶼瘴雲淚

聲邊還過幾光陰

奇花異卉開幽思

麗海佳山入細吟

귀양 살이 섬이라 심신의 아픔을 가득 머금었고
귀밑에 흰머리 사이 세월은 얼마나 흘렀던가
기이하게 생긴 꽃과 풀이 닫힌 마음 열게 하니
아름다운 바다와 산을 싯구로 읊조리게 되었네

麥飯盛增肥肉減

麻衣掩骼雪霜侵

天明日照窮林草

雯發新芽雨露心

꽁보리밥 질그릇 가득해도 살진 몸은 야위었고
삼베 차림 앙상한 몰골은 눈서리에 상했구나
날이 개어 해 비치니 어둔 숲에도 초목이 환해졌네
다시 돋은 새 싹은 비와 이슬의 마음 같구나

 

'Tal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라로사 커피 이야기  (2) 2024.08.02
아침 이슬처럼 곧 사라질 것들  (0) 2024.07.20
故 신경림 시인을 애도하며  (0) 2024.05.27
고욤나무에 접 붙인 감나무  (0) 2024.05.01
봄이 간다커늘 ‥‥ 서럽구나  (0) 2024.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