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시인이라 불리우던 신경림 시인이 별세하셨다. 향년 88세.
이 블로그에서도 고인의 시 여러 편 (돌 하나, 꽃 한 송이, 이태원 사건 당시의 갈대)을 영어로 번역한 바 있기에 고인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그를 대표하는 다른 한 편의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Poor Love Song by Shin Kyeong-nim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서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Does being poor mean that I don't know loneliness?
When I came back after being separated from you,
the moonlight was shining brightly in the snowy alley.
Just because I'm poor, it doesn't mean I have no fear.
The sound of two o'clock was heard with
the whistle of a security guard, the sound of a buckwheat cake seller.
When I open my eyes, I heard a heavy machine rolling in the distance.
Did I give up longing just because I'm poor?
As I miss my mother, I try to think of her many times.
But I can only imagine the sound of wind blowing by
the red persimmon left for hungry birds in the backyard at home.
Does being poor mean that I don't know love?
The heat of your lips on my cheeks,
Your breath whispering I love you, I love you,
But, when I turned from you, you cried against my back.
Why do you say I don't know these things because I'm poor?
As I know these things, because I'm poor,
all these things must be thrown away.
"가난한 사랑 노래"를 처음 읽었을 때는 가난한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에 나오는, 한겨울에 난방을 할 수가 없어서 추위에 떠는 주인공이 "그대의 찬 손"을 부르는 장면 같은 걸 연상했다.
그러나 여러 번 되풀이 읽다 보니 가난한 시인이 사랑하는 여인과 가진 게 없다는 이유 만으로 헤어지면서 가난하다고 외로움도, 두려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모른다고 할 순 없다며 그들의 결혼을 반대한 누군가에게 항변하는 내용임을 알았다.
그때 시인은 고향집의 어머니가 보고싶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살림 살이에서도 뒷마당 감나무에서 까치밥은 남겨놓으신 어머니의 넉넉한 품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가난 때문에 이런 모든 것들을 버려야만 하는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비단 경제적인 사정뿐만 아니더라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젊은이들이라면 100%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영어로 옮길 때에는 주어를 분명히 하고 항변(抗辯) 조의 문맥을 잘 살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고인을 애도하는 글 중에서 다음의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출처: 세계일보, [김용출 기자의 이슈의 맥] "사람들은 왜 신경림을 애도하고 벌써 그리워하는가…'좋은 시뿐만 아니라, 선한 인간' ", 2024. 5. 26.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동국대 입학 이듬해인 1956년 잡지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등의 작품이 추천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건강이 나빠져 낙향했고, 초등학교 교사를 비롯해 농사, 공사판 노동, 광산일 등 온갖 일을 경험하며 10년간 절필하기도 했다. 시인은 당시를 김호기 교수와 1997년 월간 『참여사회』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0년대는 먹고 살기 힘들고, 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반공주의밖에 없었고, 자유가 철저하게 억압당하던 시절이었죠. 그때 문단에 나왔는데, 전쟁이 끝난 지 불과 몇 년밖에 안 됐고, 길거리에 전쟁으로 상한 사람들, 전쟁통에 허물어진 집들 천지였어요. 그럼에도 문학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대한 자각이나 인식도 없이 그저 막연한 소리, 존재니 실존이니 이따위 소리나 하고 앉았었지요. 거기에 대해, 과연 이렇게 시를 쓰는 게 옳은 것인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면서 시를 못 쓰게 됐죠. 당시에 함께 공부하던 패거리 중에서 한 친구가 문제가 생겨서 구속되는 바람에 겁도 먹었구요. 또 등록금을 계속해서 내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경제적인 형편도 안 됐고, 학교에 다녀야 할 의미도 있는 것 같지 않고, 서울 살기도 힘들고 해서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도 지어보고, 장사도 해보고, 학원강사와 가정교사도 해보고, 금광에 가서 일도 거들어보고, 공사판에 가서 잔돈푼도 벌고 그러다보니 10년이 금방 지나가버렸어요.
등단 직후 10년의 절필은 그에게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저 역시 농촌 출신이라 농사도 지어보고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 전까지 뭐 뚜렷한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사실은 농촌 사는 사람들이 농촌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 10년 동안 이것저것 하고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됐으니까, 저로서는 민중을 발견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죠."
충주읍내에서 만난 김관식 시인의 조언에 따라서 1965년 상경해 다시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10년 만에 시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었다. 인터뷰에서 시인의 이어지는 회고이다.
“10년 동안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다시 시를 쓰고 문학을 하게 될 기회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옛날 같은 그런, 사는 것과 동떨어지고 현실하고 동떨어진 문학, 그런 말장난은 하지 말고 진짜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고생하면서 사는 사람들, 우리 현실이나 역사의 피해자들, 이런 사람들의 아픔까지 내 아픔으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서울에 와서 다시 글을 쓰면서 쓴 시들이 바로 시집 『농무』에 실린 시들인데, 거기에 그 10년 동안 메모했거나 쓴 시가 몇 편 있어요.
1973년 자비 출판 형식의 첫 시집 『농무』(1975년 창비시선 제1권으로 증보 출간)를 시작으로 반세기 넘는 동안 『새재』, 『달 넘세』, 『민요기행 1, 2』, 『남한강』, 『가난한 사랑노래』, 『길』, 『갈대』, 『낙타』 등 많은 시집을 발표했다. 『한국 현대시의 이해』,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등의 시론·평론집도 내놨다.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대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다. (하략)
사람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고인의 시를 한 편 더 읽어본다.
그는 악의 없이 떠들썩한 시골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과 농삿일과 어우러진 체취가 달빛(사물을 명백히 분간하지 않는 빛)과 섞였을 때 어떤 꽃 향기보다도 향내가 좋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정하게 가꿔진 도심의 미니 공원에 피어있는 꽃들에게서는 맡아볼 수 없는 향기이다. 도시의 유리와 철, 콘크리트로 무장이 된 아파트 단지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정취이기도 하다.
매화를 찾아서
In Search of the Plum Blossom
구름떼처럼 모인 사람들만 보고 돌아온다
광양 매화밭으로 매화를 보러 갔다가
매화는 덜 피어 보지 못하고.
그래도 섬진강 거슬러 올라오는 밤차는 좋아
산허리와 들판에 묻은 달빛에 취해 조는데.
차 안을 가득 메우는 짙은 매화향기 있어
둘러보니 차 안에는 반쯤 잠든 사람들뿐.
살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과 악취가
꿈과 달빛에 섞여 때로 만개한 매화보다도
더 짙은 향내가 되기도 하는 건지.
내년 봄에도 다시 한번 매화 찾아 나섰다가
매화는 그만두고 밤차나 타고 올라올까.
I've only to return to find people gathered like clouds.
I went to Gwangyang plum field to see plum blossoms,
but found out the plum blossoms were less blooming.
But I still like the night train upward along the Seomjin River.
I got drunk on the moonlight spread over the hillsides and fields.
Sensing the car filled with the strong plum scent,
I looked around and saw only half-asleep people in the car.
The noises and smells of everyday life
mixed with the dreams and moonlight, and sometimes the scent is stronger
than the plum blossoms in full bloom.
Next spring, I'll be out looking for plum blossoms again.
I wonder if I should stop looking for plum blossoms and take a night train.
'Tal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라로사 커피 이야기 (3) | 2024.08.02 |
---|---|
아침 이슬처럼 곧 사라질 것들 (0) | 2024.07.20 |
고욤나무에 접 붙인 감나무 (0) | 2024.05.01 |
봄이 간다커늘 ‥‥ 서럽구나 (0) | 2024.04.09 |
봄이 오는 길 (0) | 2024.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