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현대 작가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 (村上春樹, 1949~ )만큼 한국에서 광범한 독자층을 확보한 사람도 없을 것 같다.[1]
신간 소설이든 에세이든 항상 화제를 몰고 다니는 하루키에 관한 전시회가 열린다고 하여 내가 진즉 DG Forum 회원들에게 번개팅을 제안한 바 있었다. 전에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새로 개봉한 영화(Sentimental Value, Sakamoto's Diary)에 관한 번개팅은 호응이 별로 크지 않았다.
마침 KBS Classic FM 방송 프로 "생생 클래식"에 입장권 선물 신청한 것이 당첨[2]되어 드디어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다행히 여러 Forum 회원들이 관심을 표하여 장맛비가 예고되어 있음에도 우리는 서울세관 옆에 자리한 플랫폼-L 컨템포러리 아트센터를 찾아갔다.


태풍의 위력은 줄었어도 바비의 영향으로 수도권에 큰비가 예고된 탓인지 오후 시간의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갸기" 전시회 관람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는 화살표 안내가 되어 있는 대로 여러 층을 오르내리며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한 모든 것'을 탐색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선 하루키에게 가상 전화를 걸 수 있는 전화 부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수화기를 들고 '헬로' 하니 하루키에 대해 소개하는 여성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흥미로운 것은 하루키의 초기 장편소설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무대를 디오라마(diorama)로 꾸며 놓은 것이었다. 비록 SF 소설임에도 현장감 있게 느껴보려고 이러한 지형・지물로 되어 있을 것이라 상상하고 모형을 만든 것이다. 이만한 노력을 기울일 정도의 열성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생각하니 나는 어느 계층에 속할까 자문하게 되었다.
나중에 전시된 것을 보고 알게 되었지만 독후감을 출판사에 써서 보낸 독자들, 심지어는 작가의 집필장소, 소설의 무대가 된 현장을 방문하고 〈하루키를 찾아가는 여행〉(Finding Haruki)이란 사진첩과 기행문을 출간한 열성 팬(신성현 작가)도 있었다. 이 책의 '교토에서 만난 청년 하루키' 편을 보면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의 여친 나오코를 찾아가는 장면, 이를 영화화한 촬영지 로케이션,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 일행 외에는 다른 관람객이 없는 전시 홀에서 우리끼리 즉석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일례로 하루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이를 회화나 조형물로 표현한 국내 작가들의 작품 앞에서는 여러 의견이 백출하였다.
하루키 소설에서 남자주인공들은 대부분 30대의 소시민 타입이 많은데 전시 작품 중 벌가벗은 등판(아래 그림)의 주인은 남자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 회원은 허리에 올린 손바닥이 곱고 여성스러워 보인다면서 일본을 비롯한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많이 받은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고 말했다. 연극 연출가인 주인공이 부인이 외도를 목격할 때 저와 같은 여인의 모습이 스크린에 잠깐 비친다는 말이었다.
또 꽃을 확대해서 그리고 암술과 수술을 강조해서 표현한 것은 미국의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오키프가 남성 본위의 미술계에서 독창적인 개성을 드러내고 성공한 것처럼 하루키도 여성적인 면모를 존중하고 심지어는 우러러보기조차 했다. 그의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보면 최고조의 에로틱인 장면에서도 여성을 섹스 파트너가 아니라 대등한 상대로서 탐미적(耽美的)으로 묘사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하면 연상되는 것이 클래식 음악과 미국 재즈, 러닝(마라톤), 그리고 위스키이다. 그가 지어낸 '소확행'(小確幸)이란 말도 우리나라에선 한때 유행어가 되었다.
전시 홀에는 커티 삭, 야마자키 같은 하루키가 즐겨마시는 위스키 병들이 죽 진열되어 있었다.
그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여자친구 집에서 차려준 재즈 바에서 음악을 틀어주는 DJ를 한 적이 있다.[4]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서는 칵테일을 잘 만드는 장인이 나오고 종종 칵테일 비법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하루키의 작품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일러스트레이션이다. 하루키는 문단 데뷔 초부터 안자이 마루(安西水丸, 1942-2014)와 의기투합하여 그의 작품의 삽화를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주인공에 대한 묘사는 얼핏 무라카미 하루키의 실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하루키 매니아("하루키 덕후")들에게는 더없이 흥미로운 소재가 될 듯 싶었다.
하루키가 졸업한 와세다대학교에서는 하루키로부터 그의 장서와 원고, LP 콜렉션을 기증 받아 2021년 국제문학관, 일명 'The Murakami Haruki Library'를 개관하였다.[3] 와세다 국제문학관에서 2023년 《안자이 미즈마루전 Mizumaru Anzai Exhibition》을 개최하였을 때 미즈마루 유가족으로부터 하루키 작품의 일러스트레이션 약 750여점을 기증받았다. 이번 하루키 서울 전시회에서는 안자이 미즈마루 오피스와 와세다대학교 국제문학관의 협력으로 한국 최초로 안자이 미즈마루 전시회를 함께 진행하였다. 와세다대 소장품 중 200여점을 선별하고, 미즈마루 작업의 주요 모티브의 토대가 된 오브제 컬렉션을 유족에게 제공받아 전시하게 된 것이다.



이번 하루키 서울전시회는 와세다대학교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의 일부를 대여하여 전시회를 연 만큼 그의 소설책만 있는 게 아니라 재즈바를 연상케 하는 하루키 콜렉션의 이색적인 전시물이 많았다.[4] 도서관 서가처럼 꾸며 놓고 파스텔 형광 조명을 한 디지털 도서를 진열해 놓았는데 그 중 하나를 디지털 리더기 위에 올려놓으면 해당 도서의 제목과 개요를 일본어로 해설하였다. 그 뒤의 스크린에는 텍스트도 동시에 투사가 되었다.
단지 전시장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미래의 도서관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옆에는 하루키 팬들이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출판사로 보낸 독후감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하루키가 이처럼 유명해진 데는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독자들이 그의 신작을 기다리며 서로 의견을 나누는 팬덤(Global Fandom)이 큰 역할을 했다고 여겨졌다.




마지막 순서로 화살표 안내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지하 2층에 하루키 재즈 카페를 본 뜬 오디오 룸이 조성되어 있었다.
무대 앞 스크린에는 재즈에 관한 하루키의 짤막한 어록이 투사되고 있었다.
간간이 새로운 곡이 나올 때에는 턴테이블 위에 LP판이 돌아가고 있는 영상이 비쳤다.
하루키가 소장했던 (대부분은 와세다대학교에 기증) 음반들은 70%가 재즈, 20%가 클래식이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도쿄의 와세다대학교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와 그의 재즈 바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을 만끽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행 중에 도슨트(docent) 같은 해설자가 있어서 궁금증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나라에도 하루키 못지 않은 근대 작가가 여럿 있다.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지만 이병주, 이문열, 박완서 같은 스케일이 큰 스토리텔링 작가는 하루키를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분들의 작품은 영어로 번역된 것이 많지 않아 외국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쓴 하루키만큼 글로벌하게 유명세를 타진 못했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그의 작품들이 처음부터 영역이 됨으로써 일찍부터 해외 독서계의 주목을 받았던 게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Note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과 연표는 필자가 나름대로 정리한 Tistory 기사 하루키의 또 다른 세계 참조
2] KBS '생생 클래식' 홈페이지의 선물방에 하루키 전시회 입장권을 신청할 때 "하루키의 작품이 어떠한 공간에서 쓰여졌는지 보고 싶다"고 썼다. 친구들과 함께 여러 전시 홀을 구경하면서 하루키는 사람 뿐만 아니라 LP 디스크, 위스키 같은 사물과의 관계성, 교감을 나누면서 작품을 구상하고 글을 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티켓 위에는 '하루키 고양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앉아 있었다.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이 뒤섞인 하루키의 작품세계에서 고양이는 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이다. 때로는 주인공이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역할을 한다. 그의 여러 작품에서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기묘한 일이 벌어지곤 하는데, 고양이는 그 ‘비일상’을 암시하는 신호처럼 쓰였다.

3] 와세다대학교 국제문학관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서와 원고, 그의 소장 LP판 등을 전시하는 상설전시관을 열었다고 했을 때 도쿄에 갈 일이 있으면 꼭 들러보고 싶었다. 나 역시 20년 가까이 대학강단에 섰던 만큼 캠퍼스에 학교를 빛낸 졸업생이나 교직원을 기념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학생들이 그의 정신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4] 하루키는 1971년 대학생 시절에 캠퍼스 커플 다카하시(高橋陽子)와 결혼할 때 아이는 갖지 않기로 서로 약속했다고 한다. 신혼 초에는 침구점을 운영하는 처가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는데, 두 젊은 부부는 낮에는 레코드점에서, 밤에는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열심히 저축을 하였다. 그리고 양가의 금전적 지원과 은행대출을 받아 500만엔을 마련해 1974년 도쿄 고쿠분지역(国分寺驛) 앞 빌딩 지하에 '피터 캣(ピーター・キャット)'이라는 커피도 파는 재즈바를 열었다. 재즈바의 이름은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 이름을 딴 것이며, 주말에는 라이브 연주를 하여 제법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 "村上春樹" 참조.

5] DG Forum 모임에서는 시간 중에 나누지 못한 이야기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토론을 계속하곤 한다.
이날도 정훈 박사(아래 사진의 맨 왼쪽)가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에 관해 준비한 유인물을 우리들에게 나눠주었다. 소설의 주인공 와타나베가 비행기 안에서 들었던 비틀즈의 노래 'Norwegian Wood'를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존 레논이 작사・작곡하여 1965년에 발표한 이 노래 가사를 보면 '싸구려 노르웨이산 목재가구'를 일컫는 말이라 한다. 노래 속의 내가 연인의 무관심과 냉대에 화가 난 나머지 그 가구에 불을 붙였다고 노래한다 ( I was alone, the bird had flown. So I lit a fire; Isn't it good, Norwegian Wood?).
세계적으로 1천만 부 이상 팔렸던 하루키의 이 소설은 37세의 와타나베가 죽은 친구의 연인이었던 나오코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새처럼 떠나버리자 청춘을 바쳐 사랑했던 연인을 상실한 슬픔 속에 과거를 회상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국내 번역본은 제목을 '상실의 시대'라고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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