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 <아멜리에>(원제는 "아멜리 풀랭의 환상적 운명": Le fabuleux destin d'Amelie Poulain)는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로맨스 코메디이다. 성장과정이 비정상적이었던 한 처녀가 이웃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서 그녀 자신도 이웃의 도움을 받아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가슴 훈훈한 스토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미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가 국제적으로 주목을 끌게 된 것은 프랑스 국내에서 8백만명이라는 기록적인 관객을 동원하고 해외에서도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2001년 중 할리우드의 대작 영화들과 겨루어 선전을 한 한국 영화의 경우도 비슷하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친구", "조폭 마누라" 등과 같은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고, 관객들이 외국의 화제영화와 대작들마저 외면하는 믿기 어려운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어떻게 프랑스에서는 "아멜리에"(감독 장-피에르 주네) 같은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를 제칠 수 있었는지 그 요인을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사정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그리고 이 문제는 현재 한·미간에 논란이 되고 있는 스크린 쿼터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의 줄거리
아멜리에(오드리 토투)는 몽마르트의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시골 처녀이다. 어려서 심장이 약하다고 학교도 안 다니고 집에서 교사인 어머니로부터 학과를 배웠기에 친구도 없다. 그녀의 취미란 곡식자루에 손 넣기, 파이의 딱딱한 표면을 수저로 깨트리기, 생마르땡 운하에서 돌멩이를 던져 제비뜨기를 하는 평범한 것들이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 영국의 다이애나 비가 파리의 지하차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는 뉴스를 듣고 자기는 이웃에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에 굳게 다짐한다.
그녀의 첫 번째 사업은 그날 저녁 우연찮게 벽 속에서 발견한 어느 소년이 아끼던 장난감 상자를 40년이 지난 오늘날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일이다. 그녀는 그 아파트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로부터 그 임자의 이름을 알아낸 다음 전화번호부의 주소를 찾아 서명운동 또는 인구조사를 나왔다는 핑계를 대고 찾아다닌다. 마침내 그 아파트에서 두문불출하고 지내던 노인으로부터 쪽지를 건네 받는다. 그는 뼈가 너무 약해 골절을 두려워한 나머지 집안에 칩거하며 그림을 그리는 '유리인간'이었는데 그는 뜻밖에도 아파트 주민들의 동정을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아멜리에는 그 쪽지에 적혀 있는 할아버지를 시장에서 만나 장난감 상자를 전해준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으므로 공중전화 부스 안에 상자를 놓고 그가 옆으로 지나갈 때 공중전화 벨이 울리게 하여 자연스럽게 그의 눈에 띄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일로 재미를 붙인 아멜리에는 마치 수호천사가 된 것처럼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넘쳐난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 만난 맹인 할아버지를 손으로 잡아끌어 횡단보도를 안전하게 건너게 한 다음 함께 길을 걸어가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생중계 해주는 식이다. 그녀의 관심은 아버지 집 정원에 놓여있는 고깔 인형이 적적하겠다며 세계일주 여행을 시키는 것으로까지 발전한다. 예컨대 고깔 인형이 모스크바 크렘린궁,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을 배경으로 찍은 스냅사진을 아버지에게 보내주는 식이다. 또 카페의 단골손님을 담배를 파는 노처녀에게 소개하여 서로 사랑을 하게 만드는가 하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청과물 가게 주인이 젊은 종업원을 구박하자 그 주인 집에 들어가 자명종 시간을 앞당겨 놓고 치약과 무좀약 연고를 바꿔놓는 식으로 골탕을 먹이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던 그녀의 관심을 끄는 젊은이가 나타난다. 그는 정거장 즉석사진 부스 주변에 사람들이 찢어 버린 사진을 찾아 앨범을 만드는 괴짜이다. 니노라고 하는 그 청년(마티유 카소비츠)은 여기저기서 즉석사진을 찍은 뒤 그냥 찢어버리는 대머리 남자가 궁금하고, 아말리에는 니노의 행적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니노가 그 대머리 남자를 뒤쫓아가다가 떨어뜨린 앨범을 주운 아말리에는 그가 근무하는 섹스 숍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놀이공원에까지 찾아가지만, 남을 위해서는 온갖 일도 마다하지 않던 그녀도 자신의 사랑 앞에서는 그만 주눅이 들고 만다. 유리인간 할아버지는 그녀를 보고 '사랑은 섬광과 같은 것'이어서 잡을 수 있을 때 잡지 않으면 영영 잃어버리고 만다고 충고를 해준다.
이 말에 자신을 얻은 그녀는 니노가 그녀를 찾아올 수 있는 코드를 몽마르트 사원 주변의 공중전화에, 화살표가 그려진 길바닥에, 정지동작을 하는 인형 인간의 몸짓에 심어놓는다. 그녀는 몽블랑 얼음산에서 40년 전 화물기에 실려가던 우편행낭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듣고서는 아파트 관리인 아주머니가 모아놓은 남편의 편지를 새로 편집·복사하여 그가 아내를 버리고 도망간 것이 아니라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내용의 연서로 둔갑시킨다. 빛이 바랜 가짜 편지를 받아든 관리인 아주머니는 남편은 정녕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다며 크게 기뻐한다.
아멜리에는 즉석사진을 찢어 내버리던 대머리 남자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사진을 찍는 유령인간이 아니라 즉석사진기 수리기사인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자신이 일하는 풍차 카페로 니노를 불러들인 아멜리에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질 못하는데 …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몰랐던 아멜리에는 그녀가 도왔던 이웃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사랑을 얻게 된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처음에는 가슴이 훈훈해지는 스토리에 빠져들지만, 이내 프랑스 영화배우로서는 낯이 선, 눈이 크고 코가 작은 숏커트 머리의 여주인공 오드리 토투(24)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외신이 전하는 오드리 도투의 이야기는 '스크린의 잔 다르크'라는 식의 찬사 일변도이다. 이 영화가 2001년 4월 처음 개봉된 이래 프랑스에서 8백만명, 해외에서 9백만명이라는 경이적인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프랑스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 국내시장 점유율을 41%로 끌어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영화의 주인공 아멜리 역을 맡은 오드리 토투가 '겨울 안개를 걷어내는 봄의 미풍처럼, 가볍고 감미로운 여자'로 불리면서 작년 말에 '2001년을 가장 빛낸 프랑스인'으로 온갖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다고 한다(시네마조선 2002.1.16자).
이 영화가 프랑스 관객들을 끌어들인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어 누구나 쉽게 등장인물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의 사연이 벌어지는 장소도 몽마르트의 카페, 서민아파트, 청과물 가게, 정거장의 자동사진 부스, 섹스 숍 등으로 매우 친숙한 곳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다이아나 황태자비의 불운의 사고를 계기로 가족간의 화해, 이웃에 대한 사랑, 연인들의 애정표현 등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을 벌이는 '수호천사' 같은 주인공의 캐릭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젊은 청년의 관심을 끌고자 할 때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이웃사람들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혼연일체가 되어 그녀를 도와주려고 애쓰게 된다.
끝으로 이 영화에는 위트가 넘치고 자못 철학적인 대사가 많이 나온다. "인생이란 상연되지 않는 연극을 위한 리허설", "당신이 없는 오늘의 삶은 어제의 찌꺼기일 뿐" 등의 영화 대사는 데까르트의 후예답게 철학적인 사변에 능한 프랑스인들에게 크게 어필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멜리에>를 우리나라의 <친구>, <조폭마누라> 등하고 비교한다면 우리 영화의 깊이가 드러나는 것 같다. 한국 영화는 주로 과거에 대한 향수나 엽기적인 스토리를 다루고 있기에 이러한 소재만으로는 얼마나 오랫동안 인기를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2002년 들어 새로 개봉된 한국의 멜로 영화나 액션 영화가 흥행에 참패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인기만화를 영화화한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 클레오파트라 작전>이 개봉 6주만에 13백만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하여 국내 영화를 지키고자 하는 두 나라가 2001년에는 똑같이 성공을 거두었지만 앞으로는 양상이 달라질 것 같다. 우리나라의 영화산업에도 인재와 자금이 몰리고 있다고는 하나 내용과 깊이가 없는 영화가 쏟아져 나온다면 이에 식상한 젊은 관객들이 어느 순간 한국 영화를 외면해버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관객들로 하여금 간접체험·대리체험을 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국 문화에 대한 자존심을 부각시키고 할리우드 대작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화면과 홍콩 영화를 방불케 하는 무술장면, 랩까지 동원하는 뮤지칼 기법을 동원하지 않으면(조선일보 2002.3.16자) 언제 관객들이 떠나버릴지 모른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요소를 모두 갖춘 영화가 있었던가? 아직은 <명성황후>라는 뮤직 비디오가 고작이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지금까지는 흥행성적이 비교적 좋았을지라도 앞으로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까닭에 '스크린 쿼터'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스크린 쿼터란 영화진흥법 제28조에 의하여 "영화상영관의 경영자는 연간 대통령령이 정하는 일수 이상 한국 영화를 상영하여야 한다"고 하고, 동 시행령 제13조 1항에서 연간 상영일수의 5분의 2 이상으로 규정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일부 예외조항은 있지만 연간 146일(예외적으로 문화관광부장관 등이 최고 40일까지 단축하면 106일) 이상 한국 영화를 상영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조항은 일찍이 헌법재판소에서도 다투어졌는데(헌재 전원재판부 1995.7.21. 94헌마125),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구 영화법 제26조)이 "개봉관의 확보를 통하여 국산영화의 제작과 상영의 기회를 보장하여 국산영화의 존립과 발전의 터전을 마련하여 주기 위한 것으로 공연장의 경영자에 대하여 직업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나, 그 제한 목적의 정당성과 방법의 적정성이 인정될 뿐 아니라, 연간 상영일수의 5분의 2에 한정하여 직업수행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으므로, 과잉금지의 원칙에 반하여 직업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한 것이라 할 수 없고, 위와 같은 제한이 공연장의 경영자에게 주어진 것은 영상상품을 최종적으로 공급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므로 영화인, 영화업자 혹은 영화수입업자와 비교하여 합리적인 이유 없이 자의로 공연장의 경영자만을 차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울러 이 조항이 헌법 제119조 위반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입법자가 외국영화에 의한 국내 영화시장의 독점이 초래되고, 국내 영화의 제 작업은 황폐하여진 상태에서 외국영화의 수입업과 이를 상영하는 소비시장만이 과도히 비대하여질 우려가 있다는 판단 하에서, 이를 방지하고 균형 있는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하여 국산영화 의무상영제를 둔 것이므로, 이를 들어 헌법상 경제질서에 반한다고는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물론 스크린 쿼터는 극장 경영자들의 경영을 악화시키고 쿼터를 채우기 위한 수준 미달의 한국 영화를 양산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외국영화사들이 한국에서의 영화배급망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미국 영화 직배사인 UIP는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MGM 스튜디오가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임) 스크린 쿼터제는 제대로 만들어진 한국 영화가 상영기회를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U 각국에서도 아멜리에 같은 대박을 터뜨린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미국 영화가 평균 75%라는 압도적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는 상황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한국의 스크린 쿼터제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활발하다고 한다(시네마조선 2002.2.21자). 우리는 국제법적으로는 논란이 많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평화선'이 우리 근해의 어장을 지켰음을 기억하고 있다. 스크린 쿼터가 다시 한번 한국영화의 중흥을 이룰 수 있게끔 이를 쉽게 포기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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