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독(Vidocq, 2001)

Whitman Park 2022. 2. 17. 09:35

신문 지면을 어지럽게 만든 각종 '게이츠' 사건이 대통령의 세 아들로 초점이 모아지는 듯 하다. 사건의 진상이야 새 총장 밑에서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검찰이 밝혀낼 일이지만 실정법을 어긴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국민의 정부에서 고위층이 연루된 사건들을 보면 거의 매번 검찰 또는 경찰의 고위간부가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거나 피의자에게 수사상황을 알려준 것이 문제가 되었다. 만일 사건을 수사하는 사람이 증거를 인멸하고 다닌다면 어떻게 될까? 최근에 문제가 된 사건들도 검찰에서 수사를 조기 종결지었거나 피의자의 도피를 방조하였기에 당해 검찰간부가 구속되는 사태마저 벌어졌다.

프랑스 영화 <비독(Vidocq)>은 대도((大盜)에서 경찰수사관, 나중에는 사립탐정으로 변신한 프랑스의 전설적인 인물 비독(1775∼1875)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그가 남긴 자서전은 에드가 앨런 포우,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추리소설의 원조'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사건을 조사하는 기자가 범인으로 밝혀진다. [반전을 다룬 영화에서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극력 피해야 할 스포일러이지만 이 글의 전개상 불가피하였다.] 피해자의 주변을 조사하는 척 하면서 그에게 불리한 증거를 하나 둘씩 정리하고 다녔던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

1830년 파리. 왕정복고를 도모하는 샤를 10세와 프랑스 대혁명으로 자유의 맛을 본 파리 시민들 사이에 긴장관계가 조성된다. 여기저기서 혁명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어느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한 장소에서 두 사람이 연거푸 벼락에 맞아 불에 타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더욱이 피해자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무기상과 연금술사이다. 당시의 과학지식에 비추어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하늘이 내리는 벌로 인식하였기에 국왕은 파리 경찰청장에 대해 왕정을 무너뜨리려는 무슨 정치적 음모가 없는지 수사할 것을 명한다.

이때 파리 경찰청에서 나와 사립탐정 사무소를 차린 비독(제라르 드빠르디유)에게 파리 경찰청장이 이 사건의 수사를 반 강압적으로 의뢰한다. 이 사건을 제대로 파헤칠 만한 사람은 비독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비독은 직감으로 이 사건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피해자의 주변인물을 대상으로 탐문수사를 벌인다. 어쩌다가 벼락을 맞을 수는 있지만 곧바로 옷에 불이 붙었다고 하며, 잠시 후 그 옆에 있던 사람도 똑같은 모습으로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쩍다.

며칠 후 비독은 피해자의 옷을 관리하던 하인이 화약가루가 묻어 있는 외투를 세탁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자주 드나들던 캬바레의 샴 댄스 무희가 피해자의 모자 속에 날카로운 금속조각을 일부러 넣었음을 알아낸다. 정체불명의 사람으로부터 돈과 함께 협박조의 부탁을 받고 무슨 스캔들과 관련이 있으려니 하고 큰 의심 없이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그 결과 천둥 번개가 치던 날 피해자들은 야외에 나갔다가 벼락을 맞고 만 것이다.

샴 댄스 무희 프레아는 비독의 연인이기도 하였기에 두 사람은 폭풍우가 치는 날 범인이 그 다음 타깃으로 지시한 저명인사(유명 호텔의 지배인) 라피트를 서둘러 찾아간다. 광장에서 그와 맞닥뜨린 비독은 그의 모자를 날려버리지만 한 발 늦었다. 라피트 역시 성스러운 복수 극에 희생되고 만다.

얼마 후 비독은 범인을 쫓다가 유리 공장의 지하 작업장에서 그와 칼싸움을 벌인 끝에 불구덩이에 떨어져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비독의 시체를 찾을 수가 없다. 더욱이 괴이한 일은 망토를 걸치고 유리 가면을 쓴 괴한이 피해자 주변에 나타나 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잇따른다는 점이다.

 

이상은 비독의 전기를 집필하던 젊은 저널리스트 에띤느(기욤 카네)가 조사한 이 사건의 전말이다. 비독은 서민 출신으로 서류위조, 절도, 노상 강도, 인신매매, 무기 밀매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지만 나중에 경찰로 변신하여 많은 공을 세운 화제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숱하게 투옥되었고 그 때마다 탈옥에 성공하였으며, 천부적인 변장술과 연기력을 갖고 있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어느 누구든지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수배 생활에 지친 그는 살아남기 위해 경찰에게 정보를 파는 일을 택하였고 그의 변장술은 경찰수사에 매우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범죄 은어와 수법에 능통한 그는 많은 범죄자를 붙잡은 공으로 훈장까지 받았으며, 1811년에는 파리 경찰청을 창설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분과 경력상의 결함 때문에 더 이상 출세할 수 없었고 경찰 옷을 벗은 그는 동료 니미에와 함께 사립탐정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목은 영화에서 간단히 자막으로 처리된다.]

에띤느는 비독의 사무실을 찾아가 그가 쓰고 있는 비독의 전기 마지막 장에서 범인을 밝힘으로써 비독의 죽음에 복수를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에띤느는 그 동안 비독이 수집해놓았던 증거물들을 들춰보면서 저술에 필요하다며 들고 가버린다. 비독을 잃고 절망에 빠진 동업자 니미에는 마지못해 이를 허락한다.

에띤느는 비독의 수사과정을 거슬러 올라가 이 사건의 관련자들과 인터뷰를 시도한다. 파리 시내의 사원 옆에는 범죄의 거리가 있고 이곳에서는 매춘과 아편이 공공연히 거래되고 있었으며 상상을 초월한 온갖 퇴폐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찰도 왕정을 타도하려는 불온한 의도만 없으면 이러한 불법을 묵인하고 있는 터였다. 에띤느는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고귀한 영혼을 가진 처녀들을 바치라고 하고 영원한 젊음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고 약속하였음을 알아낸다. 그러나 범인의 소재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것을 말했다가는 제보자의 생명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급기야 에띤느는 경찰청 자료실에 들어가 유리가면을 한 연쇄살인범에 관한 기록까지 들춰본다. 그는 거울을 쳐다보면 영혼을 빼앗기고 그 거울에 모습이 비친 사람은 잔혹한 죽음을 맞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경찰수사기록에 나와 있음을 확인한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비독은 건재한 채로 그 다음 희생자를 찾아 나선 범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공장의 불구덩이에 빠졌지만 자재 투입구로 피신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수사의 목적상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비독과 범인 사이에 최후의 대결이 벌어지던 날 7월 혁명이 일어나고 샤를 10세는 단두대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개봉되었을 때 고화질의 HD(high definition) 카메라로 촬영된 데다 파리 밤거리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잘 연출하였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할리우드의 대작이 잇따라 개봉되었던 2001년 여름 프랑스의 영화시장을 잘 지켜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를 연출한 피토프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에일리언4>와 <잔다르크>의 특수효과를 맡았던 장본인이다.

이 영화는 역사나 인물 다큐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스릴러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는 클라이맥스에서 반전을 예고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반전을 위한 반전'을 만들어 극(劇)의 재미를 떨어뜨렸다는 영화평도 있지만 범죄의 수사를 담당하는 자가 범죄의 증거를 없앤다는 설정은 관객의 의표를 찌르기에 충분하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독자들은 우리 주변의 정치적·경제적 현상을 어떤 거대한 조직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연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음모론(conspiracy theory)에 쉽게 빠져드는 것 같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선 후보를 경선으로 뽑기로 한 마당에 후보들 사이에 음모론이 거론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이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대통령의 세 아들이 각종 이권에 개입되었다는 의혹 사건도 다음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첫째는 그들의 주변인물이 고위층의 이름을 팔고 다닌 이른바 '호가호위(狐假虎威)' 케이스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와 기업경영 풍토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둘째는 그들의 대리인이 실세를 과시하며 이권에 개입하고 상당한 이득을 취한 경우이다. 그 동안 소문으로만 나돌던 이야기가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두 번째 케이스에서 기가 찰 일은 그 측근의 검찰·경찰 고위간부가 스캔들을 쉬쉬하고 덮는 일에 앞장선 것이다. 범인의 분신(alter ego)이 되어 범죄의 증거를 인멸하고 다니는 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맡기는 식'으로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사법정의가 실현될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더욱 가공할 일은 일국의 정부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진 조직이 배후에서 암약하는 경우라 하겠다. 9·11 테러 사건 이후 전세계적으로 유대계 실력자와 단체가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우리나라가 1997년 하반기 외환위기에 처하였을 때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국제금융계가 우리나라에 보여준 반응 또한 그러하였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도 앙시앙 레짐의 파탄이 원인이 되었지만 직접적으로는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조직) 중심의 국제적 음모가 파리 시민들을 충동질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이 영화에서 거울가면의 연쇄살인은 어떠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비독의 추리실력을 테스트해보기 위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조직적인 세력이 개입하였다면 음모론이 충분히 무성해질 수 있는 조건 - 진보적인 시민세력과 왕정복고를 꿈꾸는 귀족세력의 첨예한 대립, 매춘·인신매매·마약 등 퇴폐풍조의 성행, 영국·프로이센과의 국제경쟁력에 있어서의 현저한 열세 - 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일본·중국·러시아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 남북간의 대립, 이념의 분열, 경제발전 성과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 등에 비추어 우리나라도 어떠한 이슈에서든지 음모론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결코 못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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