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보내며 크리스마스 이브를 어떻게 하면 뜻깊게 지낼 수 있을까 고심하던 중 간만에 뮤지컬을 보기로 했다. 일찍이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Don't Cry for Me Argentina"로 유명해진 뮤지컬 EVITA였다. [1] [2] 더욱이 김소현·손준호 부부와 마이클 리가 함께 공연하는 날이라고 해서 자못 기대가 되었다.
신사동 광림교회 옆에 위치한 광림아트센터의 BBCH홀이었는데 혼잡하리라는 우려와는 달리 가로숫길 거리나 주차장이나 다소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일찍 저녁을 먹고 개장 시간을 기다렸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가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Eva Perón의 생애
에바 페론 (María Eva Duarte de Perón, María Eva Duarte는 처녀 때 이름, 1919-1952)은 1919년 아르헨티나의 시골 마을 로스 톨도스에서 가난한 농장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난과 사회적 멸시를 겪으며 자란 그녀는 15세가 되던 해, 부와 명예를 얻겠다는 야망을 품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상경하였다. 단역 배우와 라디오 성우, 모델 등을 전전하며 밑바닥에서부터 인지도를 쌓아가던 그녀는 1944년 지진 이재민 구호 행사에서 당시 노동부 장관이자 군부 실세였던 후안 페론(Juan Perón, 1895-1974, 대통령 3선 재임 1946-55, 1973-74)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후안 페론의 정치적 동반자가 되어 노동자와 빈민층(descamisados: '셔츠 없는 사람들'이란 뜻)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냈고,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20대의 젊은 나이에 영부인(First Lady)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그녀는 '에비타(Evita)'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장관 못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딴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해 병원, 학교, 고아원을 짓고 빈민 구제에 앞장섰으며. 아르헨티나 여성 참정권 획득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부통령 출마를 준비하던 중 자궁암 진단을 받았고, 병마와 싸우면서도 마지막까지 대중 연설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1952년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수백만 명의 인파가 몰려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짧지만 강렬했던 그녀의 유산(legacy)은 사후 반세기가 넘도록 지금까지도 아르헨티나 정치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에바 페론의 功(업적)과 過(폐해)
에바 페론은 '성녀'와 '악녀'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그녀가 아르헨티나와 남미, 그리고 세계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업적과 긍정적 영향
o 사회적 약자의 대변: 기득권 중심의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빈민과 노동자 계급을 정치의 주체로 끌어올렸다. 그녀의 복지 정책은 당시 남미에서 보기 드문 규모였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실질적인 혜택과 희망을 주었다.
o 여성 인권 신장: 1947년 아르헨티나 여성 참정권 법안 통과를 주도하였다. 이는 남미 여성 인권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여성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o 제3세계 포퓰리즘의 아이콘: 그녀의 이미지는 남미를 넘어 세계적으로 '매력적인 포퓰리즘'의 상징이 되었다. 권위주의적이면서도 대중 친화적인 그녀의 리더십 스타일은 이후 남미 좌파 포퓰리즘(페로니즘)의 원형이 되었다.
폐해와 부정적 영향
o 포퓰리즘의 경제적 부작용: 그녀가 주도한 무상 복지 정책은 국가 재정을 고려하지 않은 선심성 퍼주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훗날 아르헨티나 경제가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부채에 시달리게 되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o 독재와 우상화: 에바는 남편의 독재 정권을 미화하고 자신을 신격화하는 데 앞장섰다. 반대파 언론을 탄압하고, 공공시설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등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였다.
o 불투명한 자금 운용: '에바 페론 재단'은 막대한 기부금을 거둬들였으나, 자금의 출처와 사용처가 불투명했다. 기업들에게 기부를 강요하거나 국가 예산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등 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 (Fact vs. Fiction)
뮤지컬은 에바 페론의 삶을 다큐멘터리처럼 고증하기보다 상징적인 장치를 통해 재구성하였다. Gemini 3를 통해 알아본 주요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o 체 게바라(Che)의 존재: 가장 큰 허구적 설정이다. 뮤지컬에서 해설자로 등장하는 '체'는 혁명가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를 모델로 하여 에바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관찰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체 게바라와 에바 페론은 만난 적이 없다. 에바가 권력을 잡았을 때 체 게바라는 의대생이거나 아르헨티나를 떠나 여행 중이었으며, 본격적인 혁명 활동은 에바 사후에 이루어졌다. 작가는 에바의 포퓰리즘을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볼 '동시대의 또 다른 아이콘'이 필요했기에 그를 가상의 화자로 등장시켰다.
o 어린 시절과 상경 과정: 극 중 에바는 15세에 탱고 가수 아구스틴 마갈디(Agustín Magaldi)와 연인 관계가 되어 그를 따라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상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 마갈디는 유부남이었으며 에바와 연인 관계였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또한 마갈디는 1938년에 사망하였으므로, 1944년 지진 이재민 돕기 행사(에바와 페론이 만나는 장면)에 등장하는 것은 명백한 허구이다.
o 후안 페론과의 관계: 뮤지컬은 두 사람의 만남을 철저한 정치적 계산과 야망의 결합("I'd Be Surprisingly Good For You")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실제 기록과 증언들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페론은 에바를 단순한 정치적 도구가 아닌 실질적인 동반자로 대우하였다.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
작사가 팀 라이스(Tim Rice)와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는 에바 페론을 찬양하거나 비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스타(Celebrity)의 탄생과 대중의 심리'를 탐구하고자 하였다.
o 신화의 양면성: 작가는 에바를 성녀(Santa)로 숭배하는 대중의 시선과, 그녀를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체(Che)의 시선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를 통해 관객이 한쪽의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대중이 어떻게 정치적 우상을 만들어내고 소비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사고하게 하였다.
o 미디어와 정치: 에바가 라디오와 연설을 통해 대중을 매혹시키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현대 정치에서 이미지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시사하였다. 이는 "정치는 쇼비즈니스다"라는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와 연결된다.
o 퍼스트 레이디의 고뇌: 뮤지컬의 후반에 갈수록 극의 분위기는 무겁고 침울해진다. 에바는 대중의 인기를 얻는 만큼 상류층의 "코러스걸 출신, 천박한 배우"라는 질시와 냉대, 그리고 그녀를 옥죄어 오는 병마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분수에 넘치게 정치와 권력에 함몰되었던 에바의 스트레스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

EVITA 관련 통계
뮤지컬 EVITA의 전 세계 모든 공연의 관객 수를 정확히 합산한 공식 통계는 존재하지 않으나, Google은 믿을 만한 주요 기록들을 통해 이 작품의 세계적인 성공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o 런던 Westend 공연: 1978년 개막하여 1986년까지 3,176회 연속 무대에 올렸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영국 뮤지컬 역사상 놀라운 장기 공연 기록이었다.
o 뉴욕 Broadway 공연: 1979년 개막하여 1983년까지 1,567회 공연을 가졌으며, 토니상 7개 부문을 석권하였다.
o 영화 흥행(1996): 마돈나가 주연한 영화 버전은 전 세계적으로 약 1억 4,100만 달러(한화 약 1,800억 원 이상)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o 전 세계적 확산: 한국어를 포함하여 독일어, 스페인어, 일본어 등 14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공연되었으며, 수십 년간 끊임없이 리바이벌되고 있는 'Mega Musical'이다.

Note
1] "Don't Cry for Me Argentina"는 뮤지컬 도입부와 2막 초반에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대통령 궁(Casa Rosada)의 발코니에서 에바가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해 부르는 곡이다.

이 노래는 "변명과 호소, 그리고 정치적 계산이 섞인 진심"을 담고 있다. 에바는 화려한 옷을 입고 권력의 정점에 섰지만, 자신은 여전히 가난했던 과거의 '에비타'이며 당신(국민)들과 같은 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자신이 부와 명예를 좇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결국 국민을 위한 것이었으며 "나는 결코 당신들을 떠나지 않았다"고 설득하며 대중의 정서적 지지를 호소하는 곡이다.
2] 핵심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실감있게 감상하려면 실제 에바 페론의 연설 영상과 마돈나(아래의 영화 버전) 혹은 패티 루폰(오리지널 브로드웨이)의 넘버를 비교해서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All through my wild days,
My mad existence,
I kept my promise.
Don't keep your distance.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진실은 내가 결코 당신들을 떠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나의 거칠었던 날들과
나의 미친듯한 삶 속에서도
나는 당신들과의 약속을 지켰어요.
그러니 마음의 거리를 두지 말아요
* * *
And as for fortune, and as for fame,
I never invited them in.
They are illusions.
They are not the solutions they promised to be.
The answer was here all the time.
I love you and hope you love me
부(富)와 명예,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니랍니다.
그것들은 환상일 뿐이에요.
결코 해결책이 아니랍니다.
대답은 언제나 여기에 있어요.
나는 당신들을 사랑하고,
당신들도 나를 사랑하기를 바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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