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어린이대공원 야외공연장에서 9월 12일 저녁 비가 내리는 가운데 서울팝스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열렸다.
이곳을 흔히 '숲 속의 무대'라고도 하는데 뚝섬 서울의 숲과 혼동할 수 있으므로 꼭 소재지인 능동을 붙여서 말한다.
우리 막수회 정기 모임에 나오는 고재웅 교수가 초대권을 구했다면서 모임 참가자를 모두 야외 음악회에 초청하였다.
이 날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걱정했는데 과연 5시부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에 젖어도 좋을 옷차림으로 우비에 우산까지 준비하고 인근 성수동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공연장으로 갔다.
나로서는 어린이대공원의 야외공연장을 처음 가보았는데 우선 8000석의 규모와 무대 양쪽의 대형 스크린, 이동식 카메라 시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뉴욕 맨해튼의 Central Park, 로스앤젤레스의 Hollywood Bowl 공연장에도 가보았지만 그에 비추어 손색이 없다는 것도 자랑스러웠다.

2007년 UCLA 방문교수로 가 있을 때 헐리웃볼 심포니의 야외공연을 보러 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여름의 끝자락이었지만 밤이 깊어지자 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는 것과 귀로만 들었던 핑크 마티니의 공연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는 것이 기억에 남았다. 마지막 피날레는 라벨의 "볼레로" 연주가 고조되면서 무대에서 폭죽을 쏘는 것으로 장식했다.
할리웃볼 오케스트라보다 더 유명한 팝스 관현악단은 보스턴 심포니의 Second Identity인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이다.
크리스마스 캐럴로 유명한 “Sleigh Ride”는 보스턴 팝스를 50년 가까이 이끌어온 아서 피들러가 히트시킨 명곡이다.
그의 뒤를 이은 존 윌리엄스는 자신이 작곡한 < Indiana Jones>, <Jurassic Park>, <Star Wars> 등 영화음악 OST를 고정 레퍼토리로 올려놓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니 미국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공부한 하성호 상임지휘자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울팝스오케스트라를 창단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일이었다.[1] 그 당시까지만 해도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서양의 팝송, 즉 대중음악을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하성호 지휘자가 정식 관현악단을 구성하고 파퓰러한 클래식 명곡이나 인기 영화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의 음악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



이날 7시 반 무대에 등장한 하성호 상임지휘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데도 창단 37주년 기념공연을 보러온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보고 감동한 모양이었다. 비가 올까봐 걱정을 하는 단원들에게 연주를 시작하면 비가 그칠 것이라고 장담했다면서 이렇게 가을비를 무릅쓰고 공연을 보러 오신 청중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무대 위에서 객석을 향해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곧바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빠른 템포의 차이콥스키 "비창" 교향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숨 쉴 사이도 없이 흥겨운 탱고 음악 "Pour Una Cavezza" 를 연주하였고, 무대에서는 두 남녀가 아주 멋진 탱고를 추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 여인의 향기>에서 앞을 못보는 주인공 알파치노가 젊은 여성과 즉석에서 탱고를 출 때 흘러나온 그 음악이었다.
그 다음 곡은 아르헨티나의 음악이었던 탱고를 세계적인 음악으로 만든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Libertango"였고 역시 두 남녀가 격정적으로 탱고 춤을 추었다.
이어서 우리 귀에도 익숙한 영화 <Mission>에 나오는 "Nella Fantasia"와 유명한 뮤지컬 넘버 "Phantom of the Opera"를 성악가 진윤희, 황태경과 서운정, 오유석이 각각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지금까지는 TV나 FM 방송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파퓰러한 명곡들이었다.
그런데 팝페라 그룹 남성 4중창단 라클라세가 "하숙생"을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말 그대로 우렁차게 부를 때에는 감회가 새로웠다.[2]
1965년 중학생이 되었던 내가 식구들과 함께 뜻도 모르고 KBS 라디오의 일일연속극 <하숙생>을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노래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가수 최희준을 대학선배로서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곡 송골매의 히트곡 "어쩌다 마주친 그대"는 20대 청춘의 노래임에도 정식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중년의 남자들이 부르는 모습은 다소 어색해 보였다.

이날의 하일라이트는 뮤지컬 가수 정동하가 부른 "대성당들의 시대"였다.
그는 노래 첫 소절이 틀려 처음부터 다시 부르기도 했지만 관록있는 뮤지컬 가수답게 생수를 마실 때에도 관중들의 환호성을 유도했다. 그리고 뮤지컬 <Notre-Dame de Paris> 도입부에 나오는 "The Age of Cathedrals"를 아주 능숙하게 불렀다.
누구나 다 아는 빅토르 유고의 원작소설을 뮤지컬로 만들면서 그 시대 성격을 "대성당의 시대"로 규정했고 이 곡 하나에 중세 유럽의 정치・사회・종교・문화를 압축해 놓았던 것이다.

이날 공연의 대미는 영화 <Pirate of the Caribbean>의 OST "He's a Pirate" 였다.
커튼콜에 출연한 가수와 성악가들이 모두 무대 위로 나올 때 우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성호 지휘자가 여러 곡의 앙코르 곡을 준비한 것 같아 끝까지 보지 못하는 게 다소 아쉽기는 했다.[3] 하지만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기 시작했고 수천 명의 관중이 우산을 들고 일제히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닐 것으로 예상되었다.
붐비기 전의 지하철 어린이대공원 역을 떠나면서 "하숙생"의 노래 가사를 음미해 보았다.
비록 오늘 색다른 구경을 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의 인생이 정처없이 흘러서 가는 나그네 길임은 틀림이 없었다.
하숙생 - 최희준 노래, 작사 김석야, 작곡 김호길
Hasuksaeng (The Boarder) sung by Choi Hee-jun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Life is a pilgrim's path.
Where did we come from? Where are we going?
Like clouds drifting by, on this wandering journey,
Let us not cling to affections, let us not cling to regrets.
Life is a pilgrim's path.
Like clouds drifting by, we flow aimlessly onward.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Life is naked.
Coming with empty hands, do we go with empty hands?
Like a river flowing, on the path that ebbs and flows
Let us not cling to attachments, let us not cling to regrets.
Life is naked.
Like a river flowing, we flow silently away.
We flow silently away.
Note

1] 서울팝스오케스트라를 1988년 창단하여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는 하성호 상임지휘자는 최단 기간에 가장 많은 지휘를 한 지휘자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국내외에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다. 해외에서도 27개국에서 초청 또는 순회연주를 다녔다.
하성호 지휘자는 중앙대학교와 Berklee, Temple 대학교에서 각각 학사, 석사 학위를 받고 Combs 음악대학원에서 음악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가 미국 뉴잉글란드에서 공부를 할 때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아우르는 크로스오버 오케스트라의 창단을 구상하였다고 한다.
현재 서울팝스오케스트라는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사단법인으로 사무국은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있다. 단원은 다국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소식이 두절된 우크라이나 단원 3명이 전선에 소집되어 떠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2] 본래 "하숙생"은 1965년 KBS 라디오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동명의 일일 연속극의 주제가였다. 이 노래를 부른 최희준은 허스키한 저음과 구수한 목소리로 ‘한국의 냇킹콜’이라 불렸다. 그는 이 곡으로 1965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가수왕을 차지하며 스타덤에 올랐고, 비슷한 스타일의 ‘진고개 신사’, ‘맨발의 청춘’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최희준은 판・검사의 등용문인 서울대 법대를 나와 이색적으로 대중음악 가수 활동을 하였다. 그는 가수로서의 인기에 힘입어 1996년에는 새정치국민회의의 공천을 받아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연예인 국회의원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3] 이날 앙코르 무대는 진심이 담긴 깜짝 선물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는 후문이다. 느닷없이 관중석에서는 아코디언을 맨 연주자가 나타나 객석을 한 바퀴 돌며 연주를 했다고 한다. 출처: 서병기, “雨中 명공연이 된 ‘37주년 하성호와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숲속의 페스티벌’”, 헤럴드 경제, 2025.9.14.
무대 위의 오케스트라와 관중석이 내리는 빗줄기처럼 혼연일체가 되어 초가을의 낭만을 즐겼다.
.비록 끊임없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관객들은 우산 때문에 뒷사람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 애창곡이 나오면 휴대폰 라이트로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무대 위의 연주자들도 장르를 넘나들며 청중들에게 친근한 곡을 성심껏 연주하고 별 멘트 없이 우아하게 공연을 펼쳤다.
⇒ NAVER 블로그 Bravo! Seoul Pops Orchestra in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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