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반 고흐 "아몬드 꽃"(2021)

Whitman Park 2022. 2. 21. 08:40

'꿩 대신 닭'이라고 미국 서부에서도 'Like-벚꽃' 구경을 할 수 있는 모양이다. 물론 'Real-벚꽃' 구경은 워싱턴 DC 포토맥 강변에서 할 수 있다. LA에 사시는 형님이 베이커스필드(Bakersfield, CA)의 아몬드 농장에 다녀왔다며 아몬드 꽃이 만발한 사진을 여러 장 보내오셨다. 우리가 좋아하는 벚꽃동산 못지 않았다.

지금 이맘 때면 한창인 섬진강 매화축제가 금년은 코로나19 때문에 취소되었지만 초봄에 군락을 이루고 하얗게 꽃이 피는 매화나무, 벚나무 단지는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땅콩 이상으로 즐겨 먹는 아몬드는 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이커스필드 일대의 농장에서 재배하는 것들이다. 2007년  LA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면서 5번 프리웨이 양 옆으로 한 없이 펼쳐진 아몬드 농장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지금이 바로 아몬드 꽃이 만발하는 시즌이어서 LA형님이 벚꽃 못지 않은 풍경 속에서 사진을 찍어 보내주신 것이다.

    

* 캘리포니아 중부 베이커스필드에 있는 꽃이 만발한 아몬드 농장

 

우리한테는 베이커스필드 아몬드 농장보다는 반 고흐의 "아몬드 꽃" 그림이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수년간 서울역 뮤지엄이나 제주도 빛의 벙커에서 사방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반 고흐의 아몬드 꽃 그림에 많이 익숙해진 탓이다.

생전에 유럽의 화단이나 일반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반 고흐는 1890년 초 동생 테오로부터 갓 태어난 아들에게 삼촌을 닮으라며 빈센트 주니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말을 듣고 조카를 위해 희망과 기대 속에 밝고 화사한 톤의 그림을 그렸다. 그렇기에 우리는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꽃을 피운 아몬드 나무를 보며 새 봄의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 Vincent van Gogh, Almond Blossom (1890). Courtesy: Van_Gogh_Art_Gallery.com
* 2016년 3월 서울역 뮤지엄에 전시된 반 고흐의 아몬드 꽃 디지털 영상

 

그런데 2021. 3. 10.자 한 일간지에 실린 미술평론가의 글[1]을 읽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86~1987년 1년간 암스테르담에서 살았고 또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앞에 있는 반 고흐 뮤지엄에 셀 수 없이 드나들었으며, 또 반 고흐에 관한 전기나 도록(圖錄), 다큐, 전시회를 모조리 찾아보았던[2] 내가 아니던가! 그 동안 의문을 가졌거나 몰랐던 여러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반 고흐는 구필 화랑에서 일하는 동생 테오에게 자기가 그린 그림을 모두 보냈지만 살아 생전에는 <아를의 붉은 포도밭> 한 점 밖에는 팔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저기 경매장에서 기록적인 고가에 팔리고, 어느 미술관에서는 도난을 당했다는 반 고흐의 그림들은 무엇인가?

❑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뮤지엄 1층 로비에는 반 고흐 형제의 서간집이 전시되어 있고 이 책 속의 서신을 읽은 사람들이  빈센트의 그림을 찾기 시작했다고 설명한 것을 보았다. 그런데 당시 무명의 화가에 대해 누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서신과 스케치를 편집하여 출간했단 말인가?

❑ 반 고흐 뮤지엄에서는 반 고흐 재단에서 네덜란드 정부에 영구임대한 컬렉션을 가지고 그림과 스케치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모든 방대한 작업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 결혼 전에 교사를 했던 요한나 봉허

 

그 답은 테오의 신부이자 1890년 초 남아를 해산하고 아몬드 꽃 그림을 선물로 받은 요한나 반 고흐-봉허(Johanna van Gogh-Bonger, 애칭은 "요(Jo)", 1862-1925)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제수였다.

그러나 요한나의 기쁨도 잠시,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빈센트는 아를 주민들의 반대로 프로방스를 떠나 테오가 주선해준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파리에 살고 있는 테오 부부가 형님의 뒤를 돌보았다. 그러다가 1890년 7월 빈센트가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권총 자살을 시도[3]했다는 급보가 들이닥쳤다. 빈센트는 결국 그 다음날 테오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우울증과 죄책감을 못이긴 테오는 시름시름 앓다가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아직 나이 서른도 안된, 갓난아이가 딸린 요한나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위의 신문 칼럼[1]은 다음과 같이 요한나 봉허를 그려 놓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막 돌이 된 갓난아기를 둔 새댁 봉허다. 막막한 상황이었을 텐데 그녀는 주저앉는 대신 고향 암스테르담 근교의 부숨으로 돌아가 하숙을 치며 생계를 잇기 시작했다. 밝고 활기찬 성격의 여성이었다지만, 갓난아기를 데리고 그 많은 그림을 옮기는 이사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이런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미래의 아들에게 “너의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그리고 “네 아버지가 정성껏 후원한 큰아버지는 이렇게 훌륭한 예술가였다”고 말해야겠다고. “그 위대한 화가가 너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려준 그림이 ‘아몬드 나무’”라고 말이다."[1]

 

마치 퍼즐에서 잃어버린 조각(missing link)을 찾아서 맞춰 넣은 것 같았다. 이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의 중산층 가정에서 아홉이나 되는 많은 형제들 속에서 자란 요한나는 학교 졸업 후 교사 자격을 따고 여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었다. 혼기가 닥친 그녀에게 오빠가 유명 화상에서 일하는 친구를 소개하였다. 총명하고 상냥한 그녀에게 첫 눈에 반한 그 남자는 다짜고짜 사랑을 고백하고 편지 공세를 폈다. 이런 식이었다.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어떤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을 당신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요한나는 그가 어떤 남자인지 알 수 없어 처음엔 거절을 했으나 테오의 정성 어린 구애를 받아들여 서로 70통의 편지를 교환한 끝에 1889년 4월에 결혼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아들을 출산했으나 그녀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반 년 후 빈센트가 죽고 다시 반 년이 못 되어 남편이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새 삶을 찾아야 할지 머리를 싸맸을 터이나 요한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했다.

 

사람들은 팔리지도 않는, 집안에 가득 차 있는 그림부터 처분하라고 말했지만 요한나는 파리의 아파트에 보관되어 있던 수백 점의 빈센트 그림을 하나도 빠짐 없이 수습했다. 또한, 남편이 어떤 스타일의 편지를 쓰는지 잘 알았던 만큼 그가 빈센트와 주고받은 편지도 샅샅이 찾아내 모아 두었다. 그리고 이삿짐을 꾸려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요한나는 암스테르담 동쪽 교외에 있는 부숨에 가서 하숙집을 차렸다.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남편 테오가 하려던 일, 즉 빈센트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그 가치를 인정 받기 위해서는 같은 예술가들과 비평가들로부터 이해를 얻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부숨에는 많은 예술가와 비평가, 특히 요한나의 친구이자 영향력 있는 유명 미술비평가 얀 베스 (1864~1925)가 살고 있었다. 자연히 고흐의 그림이 걸려 있는 요한나의 집은 지식인들의 살롱이 됐고, 그 집은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요한나는 자금을 마련해 빈센트 반 고흐를 기리는 작업에 본격 착수하는 동시에 결혼 후 한동안 멀리 했던 일기장에 그 내용을 자세히 적었다. 바로 외아들에게 아빠와 삼촌이 아주 훌륭한 일을 했고 엄마는 그 중요한 일을 이어받아 하고 있음을 전해주기 위함이었다. 

이후 1892년부터 1900년까지 네덜란드 전역에서 20여 회의 반 고흐 전시를 열어 그를 알렸다. 특히 수작과 보통의 작품을 섞어 전시해 모든 작품을 ‘확실한 명작’으로 만들어갔다. 또 반 고흐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일에도 나섰다. 유명 화상인 폴 캇시러 (1871∼1926)와 요하네스 보이스 (1878∼1946)를 비롯한 독일, 프랑스의 유수 화상들과 접촉해 작품 판매가의 10∼15%를 커미션으로 제공하며 전 세계 미술관과 개인 컬렉터들에게 작품을 팔았다.[4]

 

* Vincent van Gogh, "Cafe Terrace on the Place du Forum, Arles, at Night"(1888). 출처: 크뢸러 뮐러 미술관

 

사실 요한나의 집념어린 노력이 아니었으면 반 고흐가 아를 시내의 밤 풍경을 그린 "밤의 카페 테라스"(위의 그림)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밤인데도 검정색을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 그림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묘사하였다. 결국 이 그림은 반 고흐의 그림을 특히 좋아했고, 돈을 얼마든지 줄테니 모든 작품을 팔아넘기라고 종용했던 독일계 부호 크뢸러 뮐러가 소장하게 되었다.

 

“푸른 밤, 카페 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인다. 바로 이 곳에서 밤을 그리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지. 창백하리만치 옅은 하얀 빛은 그저 그런 밤 풍경을 제거해 버리는 유일한 방법이야. … 검정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름다운 파란색과 보라색, 초록색만을 사용했어. 그리고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렸지.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단다.  PS. 기 드 모파상의 소설 「벨 아미(Bel Ami)」(1885)는 대로의 밝게 빛나는 카페들과 함께 파리의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는데, 이 장면은 내가 방금 그린 것과 거의 같은 거야.”

 

반 고흐 사후 약 10년간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가던 1901년 요한나는 화가인 두 번째 남편 요한(Johan Cohen Gosschalk, 1873~1912)과 재혼했고, 요한도 반 고흐를 알리는 일에 끌어들였다. 요한나는 1905년 스테델레이크 미술관(Stedelijk Museum, 지금은 현대미술작품을 주로 전시 중)을 빌려 반 고흐 회고전을 대대적으로 열고 그의 명성을 확인시켰다. 또 빈센트와 테오가 주고받았던 668통의 편지를 정리해 1914년 화란어와 독일어로 「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펴내 스토리텔링 마케팅을 펼쳤다. 그녀가 얼마나 고심을 했느냐 하면, 1914년 유트레히트에 있던 테오의 묘를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형 빈센트의 묘지 옆으로 옮기고 빈센트가 초상화를 그려준 가셰 의사 집뜰의 담쟁이로 형제의 묘소를 꾸며놓기까지 했다. 형제의 남다른 우애와 배려, 사랑이 묻어나는 편지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고흐를 더욱더 깊이 받아들이게 했다. 전시 후 작품 가격도 크게 올랐다. 요한나는 반 고흐 사후 30여 년간 1924년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판매한 ‘해바라기’를 필두로 약 190점의 작품과 55점의 드로잉을 중요 미술관이나 영향력 있는 개인 소장가들의 손에 넘겨주었다.[4]

 

1915~1919년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반 고흐의 서간집을 영어로 번역해 출간하는 일을 했다. 1925년 요한나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녀의 바램대로 아들 빈센트 주니어(Vincent Willem van Gogh, 1890–1978)가 그 사업을 이어받았다. 빈센트 주니어는 1930년 요한나로부터 상속받은 모든 작품을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에 기탁했다. 반 고흐의 명성이 계속 높아가자 미술관 건립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마침내 1962년 네덜란드 정부는 미술관 건립을 약속했다. 이에 빈센트 주니어는 모든 작품을 정부 주도로 설립된 ‘반 고흐 재단’에 양도했다. 반 고흐 재단이 네덜란드 정부에 반 고흐 컬렉션을 영구임대하는 형식으로 1973년 미술관이 개관하였다. 늘어나는 관람객에 1999년 부속건물을 준공하였으며 현재 외국인이 85%를 차지하는 연간 20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4]

 

요컨대 반 고흐의 그림들은 요한나가 아니었으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몇 십 년이 더 걸렸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영예를 누리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앞서 소개한 신문기사의 논평처럼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문화 콘텐츠를 발굴하고 세계에 널리 선양하는 작업이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넓지도 않은 국토가 해수면보다 낮은 네덜란드에서, 반 고흐와 같은 문화 콘텐츠는 마르지 않는 화수분과 같다. 형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 여기에 더해진 요한나 봉허의 스토리는 최근의 페미니즘 무드에 걸맞은 또 다른 문화 콘텐츠로도 손색이 없다. 반 고흐에 대한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요한나 봉허의 인생에 초점을 둔 여성주의 영화여도 좋을 것이다."[1]

 

필자 역시 안타깝고 또 미안한 마음에서 한글 위키백과사전에 "요한나 반 고흐-봉허"라는 항목을 새로 만들고 '반 고흐 [형제의 예술혼 홍보]를 위한 삶'이라는 기사를 올렸다. 우리 사회 같았으면 '청상과부'라고 동정을 샀을 요한나가 평생토록 그 힘든 길을 걷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결혼 전에 테오에게서 받았던 수십 통의 연서가 있었기에 빈센트 형제의 편지(아래 사진)도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큰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외아들 빈센트에게도 벽에 걸린 아몬드 꽃 그림을 보여주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준 큰아버지의 저 그림을 우리끼리만 보고 끝내지는 말자."

 

* 출처: 박찬운 교수의 tistory 아브라카다브라 "반 고흐 그림 이야기"(33화)

Note

1] 김영애 (이안 아트컨설팅 대표), "[아트 인사이트] 반 고흐의 전설을 완성한 여인… 위대한 작가는 만들어진다”, 조선일보, 2021. 3. 10.

 

2] 필자는 1986년 네덜란드 정부의 펠로우십으로 암스테르담 대학 대학원의 유럽통합과정(International Course in European Integration: ICEI, diploma)을 공부했다. 1년 과정이었으므로 서울로 치면 의정부 쯤 되는 퓌르메렌드(Purmerend)의 안네프랑크란이란 동네에 집을 구해서 살았다. 당시 한인 교포나 주재원들이 많이 살았던 암스텔베인하고는 정 반대 방향이었다. 아시아계 주민이 거의 없는 곳이어서 콧수염을 기르고 'ㅎ' 발음을 많이 하는 화란 남자들에 지금도 친근감을 느낀다. 테오의 유족이 살았던 부숨(Busum)은 서울에서 남양주 쯤 되는 거리에 있다. '고흐'가 아니라 '반 고흐'가 올바른 성씨(姓氏)다. 나보다 꼭 100년 전에 태어난 빈센트가 몽마르트에서 그림을 그리며 거주한 지 100년 후에 몽마르트를 찾았던 필자로서는 그와 묘한 동류의식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 영향으로 반 고흐나 안네 프랑크, 네덜란드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 관심을 갖고 찾아 다녔다. 그래서 반 고흐의 "까마귀 나는 밀밭"이 나오는 일본 쿠로사와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꿈"(Dreams, 1990)까지 좋아하게 되었다.

 

3] 빈센트 반 고흐의 자살설이 통설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 권총이 어디서 났는지 불분명하고, 그 마을의 여인숙에 기거했던 반 고흐가 정신병력이 있는 데다 미친듯이 그림을 그리는 그의 행동이 마을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의 조롱거리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을의 불량기 있는 소년들이 장난을 치다 벌인 오발사고에 금주로 인한 섬망증(delirium)이 겹쳐 반 고흐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흉부 총상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진실에 접근해 보인다

 

4] 이 부분은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無名 고흐를 세계 미술사 정상에 올린 사람은 ‘동생의 아내’", 문화일보, 2019. 7. 15 칼럼을 토대로 Wikipedia의 설명을 추가하여 새로 작성하였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앞에 위치한 반 고흐 뮤지엄은 네덜란드의 건축가 게리트 리트벨트(Gerrit Rietveld)가 설계한 리트벨트관과 일본의 건축가 키쇼 쿠로카와가 설계한 타원형 모양의 특별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미술관에는 반 고흐가 한 때 경도되었던 일본 풍속화(우키요에) 타입의 그림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탓인지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현대차의 후원으로 2016년부터는 한국어 안내 서비스가 개시되었다.

 

5] 그 당시 요한나의 돌출적인 행동은 리처드 홀스트 같은 일부 화가들로부터 다음과 같이 힐난을 받기도 했다.

"반 고흐 부인은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그녀가 잘 모르는 주제를 놓고 감정에 치우쳐 미친듯이 말하는 건 짜증나는 일이다. 비평가 연하지만 여고생의 수다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반 고흐 부인이 잘 할 수 있는 일이란 감정에 겨워 눈물을 쏟는 것뿐이며, 자신의 슬픔이 빈센트 반 고흐를 신격화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안타깝다." 출처: 영어판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