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가 권장됨에도 빼놓을 수 없는 전시회가 있어서 마스크를 쓰고 찾아갔다.
작년 10월 하순부터 테헤란로 섬유회관 지하의 마이아트 뮤지엄이 개관 기념으로 열고 있는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 전시회였다. 마침 4월 5일까지 한 달 연장전시를 한다고 해서 오래 전 프라하에서 구경한 터였지만 다시 가보고 싶었다.
알폰스 무하는 일본에서 더 인기가 많은데 일본에서는 프랑스식 발음대로 '알퐁스 뮈샤'라고 부른다. 오사카 사카이 시립문화센터에는 말폰스 뮈샤 미술관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2001년 당시 프라하의 무하 미술관을 찾아 갔을 때에도 관람객 대부분이 일본인들이었다.
알폰스 무하는 체코 모라비아 출신으로 주로 파리와 뉴욕에서 활동했던 장식예술가였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를 통해 그에 대한 인식이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다.
20년 전 그를 모를 때에는 아주 세련된 감각의 여성 화가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번에 새롭게 보니 운명에 굴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성취한 위대한 인물 – 다른 말로 시대와 사회의 요청에 따라 체코에 나타난 영웅이 아닌가 하고 여겨진 것이다.
그렇다. 알폰스 무하는 정치가가 아니고 여성을 주로 그렸던 장식미술가였음에도 그는 역사가 필요로 하는 인물임을 입증했고 또 자국민들에게 자부심을 안겨준 위대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1900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 무하는 마흔 전이었음에도 종횡무진으로 활약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시관의 대형 벽화를 제작하는가 하면 레스토랑의 메뉴까지 디자인하였다. 젊어서 대극장의 무대배경을 그렸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는 지폐와 우표의 도안, 공공건물의 인테리어 등 CI 작업을 보수도 없이 오직 애국심(Patriotism)만으로 총괄 지휘했다.
또 만국박람회 전시관을 준비할 때 착안했던 12점에 달하는 대작 "슬라브 서사시(Slav Epic)"는 1928년에 완성하여 프라하 시에 기증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흔히 벨 에포크(Belle Époque 1차대전 전 파리에서 문화와 예술이 꽃피웠던 시절)에 유행했던 아르누보(Art Nouveau) 계열이라 일컬어진다. 하지만 발표 즉시 화제를 모을 정도로 시대의 첨단 경향을 간파한 실험적 작품들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국민적 성원과 인기를 "슬라브 서사시(Slav Epic)"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바치는 것으로 보답했다. 1900년 만국박람회 때 벽화의 테마로 잡았다가 오스트리아 정부가 너무 민족주의적이고 우울한 톤이라 하여 좌절되었던 구상이었다.
그의 동포들 역시 지금까지도 무하의 작품을 최고로 여기고 있다. 같은 체코 출신인 테니스스타 이반 렌들은 우승상금을 가지고 무하의 작품이 산일되지 않도록 거금을 들여 콜렉션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무하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는 동 시대의 화가인 오스트리아의 구스타프 클림트, 네덜란드의 빈센트 반 고흐와 오버랩되었다. 이들은 모두 사후에 자기 나라에 전용 미술관이 세워질 정도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애국심 측면에서는 무하가 단연 독보적이었다.
체코 사람이나 슬라브인들이 보기에 알폰스 무하가 '시대의 영웅'이라면 그는 범인(凡人)과 달리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알폰스 무하(1860~1939)의 삶과 결정적인 순간들
* 모라비아 시골 법원의 수위인 그의 아버지는 상처하고 어린 세 자녀를 키우고 있었다. 이때 먼 데 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방앗간집 처녀가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받았다며 자청해서 시집을 왔다. 그의 어머니는 전처의 세 자녀를 키우면서 세 남매를 더 낳아 길렀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큰아들 무하가 그림에 소질을 보이자 목에 크레용을 매달아 마루든 벽이든 어디나 그림을 그리게 해주었다.
* 그는 노래에도 소질이 있어 성가대에서 노래를 하며 큰도시의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변성기가 되어 성가대에서 나오고 학교도 그만두었다. 웅장한 교회 건물과 다양한 성화, 성상은 그의 예술적 감각을 일깨웠을 것이다. 그는 그림 소질을 살려 극장 무대의 배경을 그리는 일거리를 얻었으나 얼마 못가서 극장에 큰불이 나는 바람에 실직하고 말았다.
* 무작정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그는 돈이 떨어지면 하차하여 사람들 초상화를 그렸다. 마침 그 마을 영주의 눈에 들어 그의 가족 초상화는 물론 성 안의 벽화도 그렸다.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귀족이 그에게 장학금을 주어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 뮌헨과 파리에서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5년이 되도록 뚜렷한 성과가 없자 후원자의 장학금이 끊겼다. 하는 수 없이 삽화가로 알바를 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으나 36세 되던 크리스마스 때 좋은 기회를 얻었다. 연극 포스터의 벼락 주문을 받은 인쇄소에서 휴가철에 사람을 구할 수 없자 그에게 포스터 제작을 맡긴 것이다. 관례를 무시하고 엉뚱한 그림을 그렸으나 파리의 수퍼스타 사라 베르나르가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 새해 첫날 연극 "지스몽다(Gismonda)" 포스터가 파리 시내에 나붙자 사람들이 여기에 매혹되어 서로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일 정도였다. 사라는 6년 계약을 맺고 그에게 광고는 물론 무대의상과 악세사리의 디자인까지 일임하였다.
* 그의 명성이 전 유럽에 퍼지고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1900년의 파리 만국박람회 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시관의 설치를 총괄하였다. 만국박람회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셉1세는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고, 프랑스 정부도 그의 업적을 기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 1904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처음 뉴욕에 도착했을 때 그는 미국-프랑스 화합의 상징으로 각광을 받았다.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도 서는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가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정력적으로 강의와 작품활동을 하던 40대 중반의 그는 16세 연하의 체코 여인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유력한 후원자를 얻게 된 그는 고국에 돌아와 필생의 대작 “슬라브 서사시” 제작에 착수하였다.
알폰스 무하의 애국심이 유별났던 탓일까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자마자 그는 1차 검거 대상이 되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게쉬타포의 혹독한 심문을 받은 끝에 그는 폐렴을 얻어 79세로 서거했다.
독일 점령군이 그의 장례식 참석을 극력 막았음에도 10만여 시민이 프라하 비셰흐라드 묘지에 운집하여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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