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 오늘 KBS FM 클래식 방송에서 보내온 책 선물을 받았어요. 신청만 하고 당첨된 것 확인하지 못했는데 'Pleasant Surprise'였어요.
G : 그렇게 기쁨을 안겨준 선물이라니 무슨 책이었지요?

P : KBS 1FM 저녁 6시에 방송되는 〈세상의 모든 음악〉의 김미라 작가가 펴낸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이었어요. 전기현 진행자가 오프닝 멘트 끝에 전하는 위로와 격려의 말이기도 합니다. 이 프로의 애청자인 저도 위로를 받은 적이 많았어요.
G : 네, 저도 압니다. 방송국에서는 청취자들이 흥미와 관심을 갖도록 커피 쿠폰도 쏘고 콘서트 티켓이나 음악 앨범을 주는 것은 알았지만 방송 스탭 또는 출연자의 책을 나눠주는 것은 처음 들었어요.
P : 김미라 작가는 저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유명한 여행작가예요. 예전에 KBS 1FM 저녁 프로에서 '여행자의 코너'를 들려줬는데 저는 엔니오 모네코네의 영화음악 하모니카 선율이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경청하곤 했어요. 그때 인상 깊었던 유럽의 여행지는 저도 찾아가보려고 했었고요.
G : 아~ 그래서 함께 들고 오신 〈열두 번의 체크인〉이란 책을 사보신 게로군요.
P : 네, 맞습니다. 작년 10월 시칠리아 여행 떠나기 전에 참고하려고 사서 읽었어요. 나도 가서 보았던 타오르미나의 그리스 극장에 대한 김미라 작가의 글을 여기 소개합니다.
이 허술한 입구 뒤에 무엇이 있을지 여행자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사진을 보았다 하더라도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 규모와 그 전망과 그 압도적인 감동을. 입구를 지나 폐허의 한 부분을 지나니 갑자기 눈앞에 고대 그리스의 극장이 펼쳐졌다. 폼페이에서도, 아테네에서도 고대 그리스 극장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도 타오르미나의 고대 그리스 극장에선 '사로잡힌 영혼'이 되어버렸다. 극장이 있었고, 또한 극장만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시간의 무게에, 54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극장의 거대함에, 그리고 무대 너머에 펼쳐진 풍경에 금방 압도되고 말았다.
무대가 잘 보이는 높은 곳의 객석에 앉았다. 오른쪽으로는 유럽 에서 가상 높은 에트나 화산이 보이고, 반쯤 허물어진 무대 정면 너머로는 낙소스만이 보였다. 나는 . . .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서 고대 그리스 비극이 상영되던 기원전 3세기의 극장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리고 기돈 크레머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극장, 팝 페라 알레산드로 사피나가 한 여름밤을 장식하는 극장. 이 무대에 서는 건 예술가로서 얼마나 특별한 일일까? 이 무대여서 영광이겠지만 이 무대라서 힘들지도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 극장의 역사와 풍광에 압도당한 청중에게 어지간한 공연으로는 감동을 주기 어려웠을 테니.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우린 오래 거기 있었다. 괴테가 감탄했던 곳이어서가 아니라 이 극장 자체가 인생 같았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특히 이 극장에서 공연하는 걸 즐겼다는데, 공연을 즐기면서도 침략자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른쪽엔 모든 것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에트나 화산이 여전히 활동 중이고 무대 뒤는 절벽이고, 그 너머로 낙소스만과 해변 마을들이 내려다보이는 환상적인 전망을 가진 곳, 그토록 오래전에 지구를 다녀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극장에 앉으니 인생의 드라마틱한 면면이 잘 보였다. 〈열두 번의 체크인〉 87, 88쪽.


P : 작년 10월 나 역시 시칠리아에 도착하자마자 맨 처음 가본 곳이었으니 김미라 작가 못지 않게 그리스 극장의 규모와 그 주변 풍광에 압도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인생의 드라마틱한 면면을 생각했다는 작가와는 달리 나는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지중해 해상무역을 통해 축적한 재물로 이렇게 웅장한 극장을 만들고 연극 공연을 보는 걸 즐긴 것은 좋았다, 그러나 왜 이것을 오래 지키진 못했을까 하는 데 생각이 꽂혀 마음이 울적해졌어요.
G : 로마가 국력을 키우고 있었으니 세력 교체(Power Shift)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지요.
P : 맞습니다. 시칠리아 다음으로 몰타를 가보았는데 그러한 의문점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지중해에서 무역으로 번성했던 그리스 사람들이여, 후세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석조 건축물(돌 유적지)을 많이 만들어 놓느라 수백 년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속으로 되뇌었지요.
G : 몰타 사람들 역시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었고, 몰타 섬을 지배했던 성요한 기사단도 아름다운 성전을 짓고 귀중한 예술품을 많이 수집해 놓았어요!
P : 이 책에도 수록되어 있지만 김미라 작가의 오프닝 멘트에는 두고두고 되씹어 볼 만한 어록(語錄)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요리책을 보다가 문득 파슬리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파슬리에 관해 대부분의 요리책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파슬리를 뿌려 주세요. 없으면 생략해도 됩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이렇게 존재감 없는 재료인데도 파슬리는 여전히
서양 요리에 남아 있고, 여전히 요리책에 등장하고,
여전히 슈퍼마켓 매대에도 있습니다.
존재감 강렬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피곤할 때는
파슬리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파슬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보내는 하루도 괜찮고,
파슬리를 뿌려 조화롭게 마무리된 요리처럼
조용하고 뿌듯한 마무리도 마음에 들 겁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26쪽.

P : 은퇴 후에 보내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그저 그런 것 같다가도 이렇게 좋은 책을 읽으면서 지난 일을 회상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봐요. 파슬리처럼 없어도 되는 식재료일지, 아니면 후추처럼 없어서는 안 될 향신료가 될지는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노력하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G : 이 말씀도 명언인데요 ~. ㅎ ㅎ
P : 그렇다면 어느 날 KBS 1FM에서 들었던 '진짜 명언'을 소개합니다.
내친 김에 Copilot에게 오리지널 출처를 물어보니 바로 알려주더군요. 이런게 파슬리와 후추 같은 '삶의 재미'가 아닐까요!
“인생이란, 사전을 펼칠 만큼 긴 음절의 단어가 아니라, 짧은 단어들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일, 사랑, 기쁨, 고통, 가정, 아이, 삶, 죽음 같은…” — 할포드 E. 룩코크
“Life is not a long syllable word that fills a dictionary, but a process of learning the meanings of short words — work, love, joy, pain, home, child, life, death.”
— Halford E. Luccock, Unfinished Business: Short Diversions on Religious Themes, 1956.
'Tal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 Come September 9월이 오면 (2) | 2025.09.08 |
|---|---|
| 여름철 동반자 선풍기에 관한 단상 (9) | 2025.06.10 |
| 소원을 이루는 기도ㆍ기원에 대하여 (4) | 2025.04.25 |
| 끝맺음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도 가능 (0) | 2025.02.26 |
| 감출 수 없는 세월의 무게 (0) | 2025.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