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Rules of Engagement, 2000)

Whitman Park 2022. 2. 16. 09:35

고급 옷 로비 사건, 한빛은행 부당대출 사건, 정현준 게이트, 청와대 구내 총기사고 등 일련의 사건에서 국민들은 眞相은 발표된 것과는 사뭇 다르다고 믿고 있다. 고급 옷 로비 사건의 경우 검찰 수사팀이 여러 차례 바뀌고 국회 청문회가 열렸으며, 나중에는 특별검사까지 임명이 되어 수사에 나섰지만 진상이 속 시원히 규명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만큼 실체적 진실발견은 어렵다는 이야기고, 권력의 이너서클이 진실을 은폐하려고 할 경우에는 국가의 수사권도 속수무책이라는 말도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가상의 사건을 놓고 벌어지는 진실발견 게임을 다룬 영화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Rules of Engagement)>는 우리의 흥미를 끈다. 원제는 미군의 '교전수칙(交戰守則)'을 의미하는데, 법정소재를 즐겨 다루는 할리우드에서는 관객들에게 미군 교전수칙 내용까지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사건에는 으레 권력의 핵심부에서 설정한 진상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그릇된 선입견을 심어줄 우려마저 있어 보인다.

 

영화의 줄거리

1968년 베트남 정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미군 부대가 월맹 정규군 매복작전에 걸려 거의 전멸하게 되었을 즈음 우군이 나타나 소대장 한 사람만을 가까스로 구조한다. 현장 부근에서 월맹군 지휘관을 사로잡아 월맹군 매복병의 철수를 명령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에 불응하던 월맹군 통신병은 현장에서 사살된다.

28년 후 노스 캐롤라이나에 있는 해병기지에서는 헤이즈 호지스 대령(토미 리 존스)의 전역식이 거행된다. 월남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법무장교로 활동하던 그가 32년간의 군 복무를 마감하게 된 것이다. 이날 호지스 대령의 전역을 축하하러 멀리서 찾아온 사람은 테리 칠더스 대령(사무엘 잭슨)이다. 바로 월남전에서 호지스의 생명을 구해준 장본인이다. 그는 야전부대로 돌아다니며 무수한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 있다.

예편 후에는 플라이 낚시나 하겠다는 호지스 대령과는 달리 칠더스 대령은 제24 해병원정대의 지휘를 맡아 특수임무를 띠고 중동지역으로 급파된다. 예멘에서 반미 감정이 폭발하여 미 대사관저 밖에서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양에 있는 항공모함 웨이크 아일랜드 호에서 칠더스 대령의 지휘 하에 무장한 해병 특공대 1개 소대가 헬리콥터 3대에 분승하여 예멘의 미 대사관저로 급히 날아간다. 미 대사관을 지키고 대사 가족을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을 탈출시키는 임무를 띠고 간 것이다.

예멘의 미 대사관 주변상황은 상당히 심각하다. 시위대의 숫자도 엄청나지만 주변건물에서 저격수가 쉴 새 없이 총을 쏘아대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대사관 옥상에 투입된 칠더스 휘하의 특공대원들은 모란 대사(벤 킹즐리) 가족부터 헬리콥터로 탈출시키고 상황을 진압하고자 애쓴다. 저격수의 공격으로 해병 몇 명이 쓰러지자 칠더스 대령은 구분 가능한 적은 사살하되, 시위대라도 총탄이 날아오는 곳은 쓸어버리라고 명령한다. 그의 명령에 해병장병들은 옥상 위에서 밑은 내려다보지 않은 채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다.

전투상황이 끝났을 때 100명 가까이 죽거나 다친 참상이 벌어진다. 대사관 보호라는 임무는 달성했지만 미군이 개입하여 민간인을 살상하는 바람에 중동에서의 외교문제로 비화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한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Security Advisor)은 정치외교적인 고려에 따라 이 사건을 지휘관인 칠더스 대령 개인의 잘못으로 몰고 가려 한다. 미군 교전수칙 제32조를 위반하여 쓸데없이 민간인을 살인했다는 죄목으로 군법회의에 기소하도록 한다.

 

재판을 받게 된 칠더스는 호지스를 찾아가 자신의 변론을 맡아달라고 간청한다. 전역을 며칠 앞둔 호지스는 월남전에서의 은혜도 갚을 겸 이 사건을 맡지만, 상대방 검찰관은 스탠포드 출신의 유능한 마크 빅스 소령(가이 피어스)이다. 호지스는 워싱턴의 전몰장병 묘비를 찾아가 월남전에서 죽은 전우들의 이름을 되새기며 소송전략을 구상한다. 호지스는 칠더스가 미국 중동외교의 속죄양이 될 공산이 크다고 보고 현장에 가볼 것을 고집한다.

군 수뇌부는 안보보좌관의 지시에 따라 칠더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기로 하고 호지스에게는 감형을 받을 수 있게 변론이나 잘 하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호지스는 결혼도 안하고 평생을 군대에서 보낸 친구가 불명예스럽게 군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칠더스가 군복을 벗느니 총살을 당하겠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호지스는 예멘으로 가서 사건이 벌어진 대사관의 현장주변을 샅샅이 둘러보고 미심쩍은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시장 거리에서 성난 시민들에게 봉변을 당할 뻔했던 그는 부상자들로 가득찬 병원을 찾아가 본다.

미국으로 돌아온 호지스는 칠더스를 집으로 찾아가 온통 불리한 증거뿐인데 실력도 없는 주정뱅이 자신에게 변호를 맡긴 그를 원망하며 다른 변호사를 찾아보라고 소리지른다. 그러나 칠더스의 설득으로 변론에 임하게 된 호지스는 옛날 월남전에서 부하들을 잃고서도 살아났다는 것이 기쁨보다는 혐오가 앞섰노라고 말하면서 이번 기회에 살아있음의 의미를 되찾고자 각오를 다진다.

안보담당 보좌관은 시위대가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찍힌 예멘 대사관의 감시 카메라 비디오 테이프를 불에 태워버리고, 예멘 대사를 보고는 의회청문회에 불려나가겠느냐며 군사법정에서 자신의 각본대로 행동하라고 타이른다.
예상대로 군법회의에서 마크 빅스 소령은 칠더스 대령이 교전수칙을 위반하여 무고한 민간인 83명을 살상하고 미국의 국위를 손상시켰다고 주장한다. 호지스는 누구보다도 진실을 잘 아는 예멘 대사 부인을 찾아가 진실을 말해줄 수 없겠느냐고 호소하지만 그것은 결혼생활을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거절 당한다. 이러한 사정은 예멘 대사관에 출동한 해병장병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시위대를 보고 총을 쏜 것이 아니라 저격수의 총탄사례를 피해 호지스 대령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기 때문이다.

호지스는 법정에서 사고 당시 예멘에서는 대미성전(對美聖戰)이 선포되어 있었으며, 미국인을 죽이고 그들의 소유물을 약탈하라는 선동 테이프가 나돌고 있었다고 밝히고, 대사관 옥상에서 시위대를 촬영한 감시 카메라 비디오가 국무부에 전달된 뒤 증발해버린 의혹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때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사람은 놀랍게도 칠더스가 살려주었던 월맹군 장교 빈리 카우 대령이다. 검찰관은 그를 통하여 칠더스가 통신병을 사살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그가 교전수칙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야만스러운 전쟁광이라고 몰아세우려 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아군을 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적군을 죽일 수 있는 것이며 오히려 칠더스가 적군 장교를 살려보내준 인정 넘치는 사람이라는 점이 부각된다. 호지스는 배심원으로 나온 장병들을 보고 대사관저 벽에 총알 자국이 3백개도 넘게 나있는데 이처럼 총을 쏘아대는 시위대를 향해 어떻게 무감각하게 당하고만 있을 수 있느냐고 호소한다. 피고는 대사 가족을 살렸고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 국기를 보호하였으며 부하들을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음을 강조한다.

호지스는 안보담당 보좌관을 찾아가 국무부에서 전달한 테이프를 내놓지 않으면 반미처버린 해병의 참모습을 보여주겠노라고 협박한다. 마침내 결심 공판에서 배심원단은 치안방해죄는 유죄이지만, 직무유기죄, 민간인 학살죄는 각각 무죄라고 평결한다. 칠더스 대령은 무자비한 도살자(senseless slaughter)에서 전우를 사랑하는 명예로운 해병장교로 되살아난다. 반면 백악관 보좌관은 증거인멸죄로, 모란 대사는 위증죄로 각각 처벌을 받고 면직된다.

 

감상의 포인트

미 해병대 출신인 제임스 웹의 원작을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영화화한 이 작품은 교전수칙까지 들이대며 법률 이야기임을 과시하지만 실제 내용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이 미국의 국가이익을 염두에 두고 실체적 진실발견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고 플롯을 설정하였는데 과연 그러할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예멘의 시위대가 미국 대사관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을 보여주는 비디오 테이프는 시위대의 호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미군이 민간인을 향해 발포할 수밖에 없었던 정당방위의 해명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디오 테이프를 인멸하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당국에서 해병지휘관의 과잉방위로 발표한 것을 일관하기 위함이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진상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실체적 진실발견은 안중에 없고 자기 자리의 보전을 위하여 거짓말을 하다 보니까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전혀 엉뚱한 결과를 자초하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급 옷 로비 사건의 진상도 법무부장관 부인이 고급 의상점에 간 일도, 그런 옷을 걸친 적도 없었다는 사실관계의 설정에서 출발하니까 수사가 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해병대령은 무죄이고 대통령 보좌관이 유죄인 결론은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여러 가지 위험한 속단을 초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체적 진실발견이란 현실적으로나 제도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실체적 진실발견은 권력에서 독립된 기관이 담당해야 한다는 것, 사실인정은 합리적인 의심(reasonable doubt)을 뛰어넘는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야 한다는 것, 재판과정에서 자유로운 증거조사 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 등의 전제조건이 갖춰져야 하는데, 권력에 대항하는 약자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근거없이 대중의 정서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고, 또 그것이 보다 설득력을 갖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 시행됨에 따라 민주화 관련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梁承圭)가 2000년 10월 17일부터 활동을 개시하였다. 1969년 삼선개헌 이후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그 사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행사로 인해 사망했다고 의심할 상당한 사유가 있는 죽음에 대하여는 연말까지 진정을 받아 6개월 이내에 조사를 완료할 예정이다. 조사 결과 공권력의 범죄 혐의가 인정되면 관련자를 검찰총장이나 군참모총장에게 고발하며, 범죄혐의의 개연성이 있으면 수사기관에 수사를 요청하게 된다. 또한 의문사 판정에 결정적 영향을 준 내부 양심선언이나 정보를 제공한 사람에게는 최고 5천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한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발견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라면 쿠로자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에서 보았듯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더라도 진상규명은 진정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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