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그놀리아(Magnolia, 1999)

Whitman Park 2022. 2. 16. 09:30

 

얼마 전에 서울 지하철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인천행 지하철을 타고 가던 15살 먹은 중학생이 77세 노인으로부터 경로석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듣자 시청역에서 하차한 노인을 뒤쫓아가 노인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고 한다. 마침 2호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라 노인은 넘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쳐 뇌수술까지 받았지만 결국 숨지고 말았다. 폭행치사 혐의로 구속된 중학생은 "별다른 말썽 없이 학교 생활도 원만한 아이"(담임 교사와 부모의 진술)였다는데 이를 단순한 '지하철 패륜' 사건(중앙일보 2000. 9. 16자 7면)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곡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대의 신예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 <매그놀리아(Magnolia)>를 보면 이러한 사건은 결코 우연치 않게 일어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영화 첫머리에 소개된 영국 그린베리힐에 사는 중년신사를 살해한 세 부랑자의 이름이 조셉 그린, 스탠리 베리, 대니얼 힐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나, 할리우드 '매그놀리아' 스트리트(木蓮街)에 사는 주민들이 '개구리 비'(frog rain)가 쏟아지는 가운데 관용과 화해의 길을 찾게 되었다는 일들이 결코 우연찮게 느껴지는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

"유혹과 파괴"(Seduce and Destroy)라는 책을 쓴 프랭키 T.J. 매키(톰 크루즈)는 여자에게 차이거나 여자 앞에서 주눅이 드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강연을 한다. 금발의 미녀를 사로잡는 법, 여자를 당신에게 미친 노예로 만드는 법 등 허황된 내용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조언을 듣기 위해 호텔의 강연회장에 모여들고 그의 비디오 테이프를 구입한다. 그의 비디오 테이프 광고방송이 방영되는 가운데 퀴즈왕 소년이 TV방송에 출연하고, 30여년 전에 같은 프로(What Do Kids Know?)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던 왕년의 천재소년 도니 스미스는 빚쟁이에게 쫒겨 다닌다.

프랭크 매키에 대한 광고가 쏟아져 나오지만, 전직 TV 프로듀서인 그의 부친 얼 패트리지(제이슨 로바즈)은 말기 암으로 병상에 누워 애타게 아들을 찾는다. 그의 임종을 보살피는 호스피스(필립 시모어 호프만)는 아들을 찾아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를 전화로 주문하여 비디오 테이프의 주문처를 알아내고 텔레마케팅 담당자에게 저자와 연락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통사정한다. 하지만 노인의 젊은 부인은 오랜 간병 끝에 심신이 크게 지쳐 있다.

40년 동안 퀴즈 쇼를 진행해 온 지미 게이터(필립 게이터 홀)는 가출한 딸 클라우디아를 찾아가는데, 마약을 복용하는 클라우디아는 부친을 파렴치범 대하듯 쫓아낸다. 부친이 암을 선고받고 몇 달밖에 못산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그녀의 고함 소리에 놀란 이웃 주민이 경찰에 신고를 하고 그 집을 찾은 꺼벙한 노총각 경찰관(존 C. 라일리)은 심신이 곤고해 보이는 여자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다. 그녀가 타주는 커피가 못 마실 정도로 쓰지만 불평 한 마디 안하고 그녀가 보지 않는 사이에 싱크대에 버린다. 음악을 들을 때에는 볼륨을 적당히 조절하고 록 뮤직을 너무 크게 들으면 난청이 된다고 충고까지 한다.

프랭크 매키는 호텔로 찾아 온 매력적인 흑인 여기자와 인터뷰를 하는데 그녀를 대상으로 실습(seduce and destroy)을 하려다가 그녀가 학력과 가족관계를 질문하자 그만 입을 다물고 만다. 한편 빚쟁이에게서 간신히 풀려난 도니 스미스는 바에서 술을 마시면서 퀴즈 쇼를 시청하는데 주변 손님들에게 자신이 왕년의 '스마트 키드'였다고 뽐낸다. 그러나 천재는 스스로 망가져 버렸고, 주변사람들까지도 바보로 만들었다고 자조한다. 어떤 어려운 퀴즈도 척척 풀어대던 사람이 젊은 남자 바텐더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치아교정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줄거리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쯤 오면 상호간에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고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프랭크 매키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그와 함께 쫓겨난 어머니는 나이 어린 자신의 간호를 받으며 쓸쓸히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은 자수성가를 하였지만 엄청난 에디프스 콤플렉스 환자가 되어 버렸다. 두 번째 부인은 자신이 먼저 미쳐버릴 지경이다.

 

 

또한 퀴즈 쇼의 진행자 게이터는 상습적으로 딸의 몸을 더듬는 성추행을 하다 이를 견디다 못한 딸 클라우디아는 가출하여 코카인에 중독되어 버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퀴즈 쇼에 출연한 나이 어린 천재소년은 오줌이 마려워도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바지에 오줌을 지린다. 한편 왕년의 퀴즈왕은 10만달러나 되는 상금을 부모가 갖다 쓰는 바람에 자신은 손도 대지 못하고 여전히 사회에 적응을 못한 채 푸념만 늘어놓는다. 이들 중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말기암 환자를 간병하는 호스피스와 이 지역을 순찰하는 경찰관 정도이고, 이들이 어려움에 빠져 있는 주인공들을 서로 엮어주는 역할을 한다.

호스피스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프랭크 매키는 오랜만에 부친의 병상을 찾는다. 하지만 강력한 모르핀 진통제를 맞은 부친은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프랭크 매키는 아버지를 향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어떻게 처리할 바 모르고 "우리가 당했던 것처럼 아버지도 고통스럽게 죽길 바래요" 하며 울부짖는다. 게이트는 퀴즈 쇼 사회를 보던 중 쓰러지고, 클라우디아는 노총각 경관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여 모처럼 식사를 하는데, 자신의 과거가 너무 한스럽기에 "데이트 중에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며 지레 걱정을 한다. 한심하기는 직무수행 중에 권총을 분실한 노총각 경관도 마찬가지다. 도니 스미스는 회사 금고에서 현금을 훔쳐 갖고 나오다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다시 돌려놓을 생각을 한다.

이때 마침 南캘리포니아 산페르난도 밸리 일대에는 개구리비가 쏟아지는데, 하늘에서 떨어진 개구리에 맞아 사다리에서 떨어진 도니 스미스는 마침 데이트를 마치고 그 앞을 지나가던 노총각 경관의 도움을 받아 사무실 금고에 돈을 갖다 놓는다. 게이트는 부인에게 자신이 딸을 성추행하였음을 어렵사리 고백하고, 프랭크 매키는 차 운전 중 개구리비를 맞아 발작을 일으킨 새엄마를 찾아 그녀가 입원한 병실로 문병을 간다. 오줌이 마려워 생방송 퀴즈 쇼를 망친 소년은 아빠에게 "앞으로는 자기를 잘 대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클라우디아를 찾아간 노총각 경관은 당신은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니 결코 포기할 수 없다며 사랑을 고백한다. 이들 등장인물은 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에이미 만(Aimee Mann)의 노래 "Save Me"에 맞추어 차례로 노래를 부른다. '용서와 화해'의 축복송을.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첫머리에서 우연한 사건들을 예로 들면서 형법 시간의 퀴즈 문제에나 나올 만한 사건을 소개한다. 1961년도 미국 법의학 학술대회에서 사례로 발표되었던, 1958년에 일어난 기막힌 살인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7세의 시드니 베린져가 유서를 써놓고 아파트의 9층 옥상에서 투신하였는데 검시 결과 사인은 복부관통상이었다. 마침 아파트 유리창 청소를 한다고 안전 그물망을 펼쳐 놓았기에 떨어지더라도 죽지는 않았을 터인데, 6층 그의 집에서 그의 부모가 말다툼을 하다가 그의 어머니가 탄환이 장전되어 있는 줄 모르고 아버지를 향해 엽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 찰나 발사된 총알은 창 밖으로 추락하는 아들의 복부를 관통하여 즉사케 한 것이다. 이 경우 시드니 베린져의 사망에 대한 죄책은 누구에게 있는가?

9층에서 떨어진다고 다 죽는 건 아니고, 직접 사인은 복부관통상이었으니 총을 쏜 그의 어머니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당시 탄환이 장전되어 있는 줄 몰랐고 살해의 고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일단 총의 방아쇠를 당긴 이상 과실치사죄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막힌 사실은 죽은 소년이 부모의 잦은 부부싸움에 질린 나머지 자신이 뭐라도 해서 부모의 싸움을 그만 두게 해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소년의 아버지는 그 며칠 전에 엽총에 장전을 해두었다는데, 우연이 아닌 필연이 가족의 비극을 만들어 낸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첫머리 중학생의 폭행치사 사건을 들여다보면, 신문지상에는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가해소년의 잠재의식 속에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피해의식이 깃들여 있었고, 마침 노인의 말 한 마디에 그것이 폭발하였는데 불행히도 노인이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던 참이라 가해소년의 발길질에 그대로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폭행치사죄의 구성요건 해당성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고 법관이 미성년자임을 고려, 量刑에 참작하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연찮게도 담당 법관이 경로정신에 투철하여 요즘 세태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일벌백계로 중형을 선고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영화 마지막 장면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개구리 비도 우연인가? 영화의 나레이터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찰스 포트(Charles Fort: 1874-1932)가 수집한 개구리 비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찰스 포트는 'UFO'(미확인 비행물체)라는 말도 처음 만들어 썼는데, 그의 반과학(反科學)에 관한 기록(Unexplained Mysteries; 이 영화의 홈페이지 magnoliamovie.com 초화면에 나오는 꽃의 중앙부를 클릭하면 그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음)을 읽어보면 하늘에서는 비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자갈, 개구리, 물고기 등등 벼라 별 게 다 떨어진다고 한다. 출애굽기 8장에 나오는 그로테스크한 사건들도 일종의 '포트 현상'(Fortean Phenomena)인 셈이다. 과학적으로는 회오리바람과 같은 상승기류에 휩쓸려 올라갔다가 비와 함께 떨어진 것으로 설명하는 게 고작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하늘에서 비 대신 개구리가 떨어지는 마당에,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병든 노인네를 용서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너무 지루하고 길다는 점만 뺀다면 이 영화는 오늘날 미국이 당면한 가정파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수작(秀作)임에 틀림없다. 1999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 상을 수상하였는데, 이 영화가 주목을 받으면서 우연찮게도 비슷한 주제를 다룬 "아메리칸 뷰티"가 2000년도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다.

 

‘흘러간 영화’(Old Movies) 전체 감상: 리스트는 이곳을 클릭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동경비구역 (JSA, 2000)  (0) 2022.02.16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Rules of Engagement, 2000)  (0) 2022.02.16
키스(Living Out Loud, 1998)  (0) 2022.02.16
긴급명령(Clear and Present Danger, 1994)  (0) 2022.02.16
해피 엔드(1999)  (0) 2022.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