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피 엔드(1999)

Whitman Park 2022. 2. 16. 09:10

밀레니엄 카운트다운이 한창이던 1999년 12월 신예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가 개봉되자 '세기말 가정의 붕괴, 기존 가치관의 해체'를 다룬 영화라 해서 관심을 끌었다. 여주인공 역을 맡은 톱탤런트 전도연이 올누드로 실감나게 벌인 성애연기도 단연 화제거리였다.

주인공이 바람피운 아내를 죽이는 영화라는 점에서 일본 영화 <우나기>와 비슷하지만, 실직으로 권위가 실추된 가장이 배신감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를 죽이는 완전범죄의 음모를 꾸미는 점에서 역설적인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영화의 줄거리는 결코 해피엔드로 끝날 수 없는 내용이다.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남편 몰래 바람 피운 여자는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하고 두려워했다니 말이다.

 

영화의 줄거리

생후 6개월 된 딸 하나를 둔 젊은 부부. 남부러울 것 없는 이들의 가정에도 남편 서민기(최민식)가 은행을 퇴직하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아내 최보라(전도연)는 외국인을 고용하여 어린이 영어교실을 운영하는 등 사업의욕을 차 있지만 남편은 TV 연속극에 열중하고 슈퍼에서 장을 보거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등 살림에 관심이 많다. 그가 외출하는 것은 헌책방에서 주인의 눈치를 보아가며 연애소설을 읽거나 골공원을 찾는 정도이다. 이런 남편에게 실망한 탓인지 최보라는 유치원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면서 우연히 재회하게 된 옛날 애인 김일범(주진모)과의 성애에 탐닉한다. 아직도 최보라와 연애하던 10년 전 사진을 앨범에 고이 간직해 놓은 김일범은 그녀와의 밀회를 거듭할수록 집착의 도를 높여간다.

이 세 사람은 IMF 사태를 맞은 한국민들을 대표하는 것 같다. 거듭된 실패에 자신감을 잃었지만 왕년의 한참 때를 되새기며 자존심 상해하는 사람(서민기), 위기 속에서 찬스를 얻어 돈도 벌고 성공을 하였으나 자기의 기준에 미달하면 타인을 경멸하는 사람(최보라), 노골적으로 남의 것을 빼앗지는 않아도 일단 자기 수중에 들어온 것은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김일범)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 세 사람이 서로 마주치자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적극적으로 구직에 나서지 않는 남편더러 "택시 기사를 해도 되겠다"는 아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민기는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칠 뻔 한다. 최보라는 옛 남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연애시절의 실반지를 찾아 끼고 다니면서도 자기가 바람 피우는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한다. 김일범은 남편과 자식이 있는 여자를 보고 언제든지 찾아오라면서 현관 열쇠를 건네준다.

 

서민기는 아내가 몰고 다니는 승용차 키 꾸러미 속에 들어 있는 오피스텔의 열쇠를 단서로 최보라가 만나는 옛 남자의 집을 찾아가 아내와 남자와의 관계를 알아챈다. 소심한 남자 서민기는 헌책방에서 추리소설만 골라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바람난 아내를 응징할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다. 남편의 달라진 언행에서 최보라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예감하고 남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한다.

마침 서민기의 숙부가 지방에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온다. 서민기가 차 수리를 하러 카센터에 가 있는 사이에 최보라와의 관계가 뜸해진 김일범이 여자 집 앞으로 찾아온다. 자기와 다시 결합하자고 조르려고 온 것이다. 최보라는 서둘러 아기를 재우려고 수면제 1/4 알을 우유에 타 먹이고 김일범을 만나러 카페로 나간다. 집에 돌아온 서민기는 아기가 정신없이 잠들어 있자 벌레가 들어 있는 우유를 잘못 먹고 탈이 난 줄 알고 아기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간다. 갓난 아기까지 내팽개친 아내가 한없이 미워진다. 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오면서 서민기는 아내가 젊은 남자와 포옹하는 장면을 엿본다. 아기를 안고 서 있던 서민기는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분노를 삭인다.

서민기는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 사는 후배에게 서울역까지 태워다줄 것을 부탁하고 시골로 문상을 가는 척한다. 계획적인 살해계획에 착수한 것이다. 김일범이 타깃은 아니지만, 그를 궁지로 몰아넣을 체모와 몇 가지 증거를 채취한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내를 향해 칼을 휘두른다. 그동안 자존심 상했던 것을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최보라를 난자 살해한 것이다.

김일범이 전화에 대고 신음하는 최보라를 구해주려고 달려오자 서민기는 남자의 오피스텔로 가서 곳곳에 혈흔을 묻혀 놓는 등 범죄 증거를 조작한다. 그리고 상복으로 갈아입고 기차에 오른다. 이튿날 아침 범죄현장이 이웃의 눈에 띄고 서민기가 달려 왔을 때 경찰이 일차 현장검증을 마친 뒤이다. 김일범이 용의자로 몰려 수사를 받는데 충격을 가늠치 못하는 그는 시종 묵비권을 행사한다.

서민기는 완전범죄에 성공한 듯 하지만 초인종만 울려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아내와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울부짖어도 모든 게 끝난 후이다. 아내의 사진을 태우고 불륜의 실반지도 버리고, 서민기 마음 속의 최보라는 풍선 근조등처럼 하늘로 둥실 떠올라 사라진다. 거실 바닥에서 아기와 함께 잠에서 깨어난 서민기에게 아침 햇살은 양심에 꽂히는 화살처럼 괴로울 뿐이다. 그는 형사처벌 이전에 이미 벌을 받고 있는 셈이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를 법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남녀간의 치정극이 살인으로 결말이 난 케이스이다. 법원행정처가 발간한 사법연감에 의하면 1999년 한 해 동안 법원에 접수된 이혼재판 및 협의이혼 의사확인 사건은 각각 41,055건과 126,500건으로 하루 평균 460쌍이 갈라선 셈이라 한다. 이혼의 원인은 배우자의 부정행위가 45%로 가장 많고, 부당한 대우(23%), 악의적 유기(15%), 존속에 대한 부당한 대우(5%)의 순이었다.

아직도 부정이 발각된 아내를 남편이 쳐죽여도 좋다고 하는 나라가 있다고 하지만, 배우자의 부정을 이유로 혼인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 이상 부정한 아내를 살해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 정지우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이 영화는 스테레오 타입적인 장면이 많이 눈에 뜨인다. 서민기는 소심하고 여리며, 꼼꼼하고 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퇴직한 은행원으로 설정되어 있다. 은행원이 다 그런 것은 아닌데 ······. 그 가정의 아내와 남편의 뒤바뀐 역할은 IMF 시대 우리 사회의 단면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항상 비극을 몰고오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완전범죄가 성공한 것처럼 보여 해피엔드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영화에서도 담당 형사가 서민기를 집으로 돌려보내며 '앞으로 여러 차례 오라 가라 귀찮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남편 역시 용의선상에 올라 있는 이상 진범으로 몰린 김일범이 범행을 부인한다면 그 혐의는 당연히 서민기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건 직후 김일범은 충격에 휩싸인 나머지 침묵하였지만 자기가 최고 사형까지 벌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행을 시인하고 앉아 있을지는 의문이다. 설령 김일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후에도 남편이 진범인 것으로 밝혀진다면 검사나 유가족은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형사소송법 420조5호).

그러므로 형사피고인의 변호인은 법정에서 정상론이나 펼칠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수사관과 같은 기민함과 치밀함으로 의뢰인이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는 속사정을 파헤쳐 진범을 밝혀내거나 소송의뢰인이 억울하게 처벌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기에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헌법상으로 보장되는 국민의 기본권(헌법 12조4항)에 속하는 것이다. 촉망받던 시민운동가가 미성년의 여대생을 성추행했다고 구속된 사건에서도 유능(?)한 변호사라면 사건의 성격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변호사의 역할은 그가 마음먹고 노력하 기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전에 <데블스 애드버킷>을 보고나서 한 이야기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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