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 턴(U-Turn, 1997)

Whitman Park 2022. 2. 15. 09:20

1997년에 제작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유 턴(U-Turn)>은 정치사회성이 강한 감독에다 숀 펜, 제니퍼 로페즈, 닉 놀테, 존 보이트 같은 호화 캐스팅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는 등 관심을 끌지도 못한 것 같다. 우리 나라에서도 1999년 말에야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좋게 평하자면 아리조나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총잡이들의 싸움을 그린 현대판 서부활극'이라 할 수 있을까. 마침 음악을 맡은 작곡자도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의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엔리오 모네코네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키 워드는 숀 펜과 제니퍼 로페즈 두 남녀 주인공이 아닌가 한다. 숀 펜은 그의 연기력보다 인기 팝스타 마돈나의 전 남편이라는 것이 더 유명하고, 제니퍼 로페즈는 라틴 뮤직의 최고 인기 여가수에다 패션 감각이 뛰어난 멋진 몸매를 자랑하는 여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최근 그녀의 몸매에 10억달러의 상해보험을 들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0년 3월 26일 제7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단연 세인의 관심을 끈 여자배우는 여우 주연상을 받은 아네트 베닝이 아니라 노출이 심한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온 제니퍼 로페즈였다.

뭔가 모자란 듯하여 모성애를 유발하는 여린 남자와 섹시한 몸매로 세상을 휘어잡은 젊은 여자가 만들어내는 스토리는 심상치 않은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

러시아계 마피아에게 도박빚을 갚지 못해 손가락을 두 개나 절단 당한 바비 쿠퍼(숀 펜)가 1964년형 빨간색 무스탕 오픈카를 몰고 아리조나의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간다. 그가 손에 꼭 쥐고 가는 가방에는 라스베가스에 있는 마피아 두목에게 갚아야 할 1만 2천달러의 지폐뭉치가 들어 있다. 그러나 그의 바쁜 마음도 몰라주고 그가 아끼는 명품 중고차(미국사람들은 이를 'Antique Car'라 하여 귀하게 여긴다)가 라지에타 고장으로 오버히트를 일으킨다.

그는 할 수 없이 인근 마을 슈피리어에 들러 차 수리를 맡기고 낯선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빨간 원피스를 입은 젊고 매력적인 혼혈여인 그레이스(제니퍼 로페즈)를 만나 관심을 갖는다. 자기 집에 가서 커튼을 달아주지 않겠느냐는 그녀의 제안을 받고 그녀와의 데이트에 기대감 반, 호기심 반으로 따라나선다. 그레이스는 권위주의적인 남편과의 숨막히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외지의 남자를 집안에 끌어들인 것이다.

바비가 그레이스와 어찌 해보려는 찰나 집에 불쑥 들어온 그녀의 남편 제이크 맥캐나(닉 놀테)에게 변명할 새도 없이 흠씬 두드려 맞는다. 제이크는 이 마을의 손꼽는 부자로 부동산업자이다.
그는 이 마을의 유일한 외지인인 바비에게 자기 아내를 없애주면 큰 돈을 주겠다고 엉뚱한 제안을 한다.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이다. 가정폭력을 일삼는 비열한 자기 남편을 처치해주면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제의한다. 처음에는 황당해 하는 그였지만 자동차 수리비가 딸리자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한다. 둘 중에 누구를 선택해 죽이기로 할 것인가.

차가 수리되기를 기다리던 그는 마을 카페에서 동네 처녀(클레어 데인즈)와 이야기를 나누다 성질 급한 그녀의 남자 친구 TNT에게 봉변을 당한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렀다가는 무장강도를 만나 끼고 다니던 돈 가방이 총에 맞아 풍지박산이 된다. 억세게 재수가 없는 바비에게 닥친 유일한 행운이라면 돈 떼먹은 그를 죽이러 온 마피아 행동대원이 보안관의 검문에 걸려 유치장에 갇힌 일이다.

자동차 수리비는 처음보다 크게 늘어나고 핀치에 몰린 바비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결국 그레이스와 짜고 그의 남편을 살해하기로 한다. 남편이 방바닥에 숨겨놓은 거금을 찾아 낸 그레이스를 무스탕에 태우고 야반 도주를 감행한다. 그러나 그녀를 짝사랑해 온 보안관이 길을 가로막는다. 엎치락뒤치락한 끝에 바비는 두 남녀 경쟁자를 해치우고 큰 상처를 입고 돈을 챙겨 떠나려 하지만 차가 다시 고장을 일으킨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의 스토리 자체는 위에서 본 것처럼 재수 옴 붙은 남자의 사건기록이다. 어느 범죄나 마찬가지로 돈과 여자, 탐욕이 얽혀 있다. 그러나 <플래툰>, <J.F.K.>, <7월4일생(Born on the Fourth of July)>, <킬러(Natural Born Killers)> 등 화제작을 만든 올리버 스톤 감독은 아니나 다를까 이 영화에서도 그 특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영화를 한 편의 연극무대로 바꿔보자. 항상 태양이 내려 쪼이는 덥고 메마르고 권태로운 사막 속의 마을. 돈과 권력을 가진 남자와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젊고 매력적인 여자, 상대방의 약점(금전문제)에 대해서는 한 치의 에누리도 없는 카센터 주인(빌리 밥 쏜톤), 하루하루를 사랑싸움으로 지새우는 젊은 남녀, '법과 질서'를 무기로 주민들을 감시하는 보안관, 이 모든 일상에서 초연한 듯 사설을 늘어놓는 눈먼 상이용사 걸인(존 보이트)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를 테면 돈밖에 모르는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와 사랑이 메말라 버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청소년이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적당한 훈육을 받지 못하고 거의 매일같이 유흥가를 쏘다닌다면 결국은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희생당하게 되리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바비(숀 펜에 딱 드러맞는 배역이라는 생각이다)는 러시아 마피아에게 도박빚을 갚지 않아 손가락을 짤린 불쌍한 남자이다. 그는 기일 안에 마피아 두목에게 돈가방을 건네주지 않으면 손목이 아니라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바비의 목표는 거의 맹목적이다. 한시바삐 마피아 두목을 찾아가 돈가방을 전달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는 사막 한 복판에서 그가 애지중지하는 차가 고장났으므로 차부터 수리해야 한다. 수리비 단돈 2백불이 모자란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태세이다. 청부살인(hire to kill)의 제의에도 귀가 솔깃해진다.

어찌 보면 이러한 상황은 바비가 자초한 셈이다. 그가 좀더 현명하였더라면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위험한 사막 길을 홀로 자동차로 여행하지 않고 그레이하운드 같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였더라면, 또 수리비가 부족하면 마피아 두목에게 줄 돈을 체당해 쓰고 나중에 갚을 수 있었을 텐데. 자동차만 고치고 갈 일이지 왜 한적한 시골거리에서 만난 섹시한 여인을 따라갔는지, 그녀의 폭력적인 남편을 가까이 한 이유는 또 무엇인지. 그의 자동차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카센터 주인하고 처음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더라면 그의 형편을 이야기하고 50달러 정도는 할인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마지막으로 그레이스가 진정으로 그 마을을 탈출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면 그녀를 도와주는 셈치고 훔친 돈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형법에서 논하는 범죄구성론에 있어서의 고의(故意, intention)의 범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비는 처음부터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살인을 저지를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오직 고장난 자동차만 수리해 가지고 서둘러 길을 떠날 생각뿐이었다. 그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그렇고 그런 생활을 해왔지만 강력범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낯선 마을에서 잇달아 청부살인의 제의를 받는다. 본성이 살인을 할 사람도 아니고, 처음부터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는 프로 킬러도 아니었으나 사랑과 배신, 탐욕과 음모에 찌든 사람들의 살인을 부추기는(敎唆) 말에 쉽게 넘어가고 만다.

만일 그가 죽지 않고 살인죄로 기소되어 법정에 섰다면 그의 변호인은 그에게 처음부터 살인의 고의가 없었음을 주장할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 나라 형법 제13조는 "죄의 성립요소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바비는 심리적·주관적으로 살인을 하려는 의사가 없었으므로 살인죄의 성립요소가 미비되어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고의란 범죄사실을 인식하고 인용하는 것인데, 그것이 범죄의 구성요건 요소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책임 요소에 해당하는지에 관하여는 학설이 나뉜다.

올리버 스톤 감독이 이 영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이런 것 같다. 비록 바비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것이 동정심은 유발할지언정 살인죄의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 사회에서 매일매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의성(범죄사실을 인식·인용하는 상태)을 엄밀히 따지기 시작하면 누구나 죄를 지어도 된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쉽게 허영에 빠져드는 배우자와 서로 무관심한 가족, 권위주의적인 상사, 돈만 앞세우는 장사꾼, 개개인의 영적 상태에 무관심한 종교인 등등 범죄를 촉발하는 요소가 지천에 깔려있다. 더욱이 우리 스스로 욕망을 자제하고 마음의 중심을 잡지 않는다면, 우리 손이 닿을 듯한 곳에서 매력적인 여자가 손짓하듯이, 데이 트레이딩, 벤처 투자 등 일확천금의 화려한 유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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