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함정(Arlington Road, 1999)

Whitman Park 2022. 2. 15. 09:10

새 천년(New Millennium) 들어 걱정되는 일은 신뢰를 주었던 사람이 나를 해치려는 사람으로 표변하는 사건이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공천에 떨어진 사람들이 새로 정당을 만들고 옛 동지들과 갈라서는 것은 정치판에서는 다반사로 벌어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외에서 같은 말을 쓰는 동포를 믿고 의지하였는데 그가 어느 날 강도로 돌변하여 나를 해치려 든다면 그것은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친절하기만 하던 이웃이 음모를 꾸며 나를 파멸의 나락으로 몰고 간다면 이를 알고 여기서 벗어나려는 사람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또 지옥에서 온 이웃 사람(tenant) 이야기로는 멜라니 그리피스와 마이클 키튼이 주연한 1990년 스릴러 영화 <퍼시픽 하이츠>가 있다.

마크 펠링턴 감독의 1999년도 스릴러 영화 <함정>(원제 Arlington Road)은, 제프 브리지스와 팀 로빈스 같은 톱스타를 한 자리에서 만나게 하여주었음에도,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이러한 현실을 우리 앞에 클로즈업시켜준다.

 

영화의 줄거리

워싱턴 근교 레스톤시의 한적한 주택가 알링톤가에서 한 소년이 피를 흘리며 걸어간다. 뒤따라오던 차가 위급한 상황을 발견하고 소년을 인근 병원 응급실로 데려간다. 브래디 소년은 친구들과 폭죽놀이를 하다 화상을 입은 것이다. 잠시후 병원에 브래디의 부모가 나타나 자기 아들을 구해준 마이클 패러데이(제프 브리지스)에게 감사한다. 병원에서 처음으로 대면하였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알링턴가의 서로 마주보는 집에서 살고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 올리버 랭(팀 로빈스)은 감사의 표시로 마이클을 자기 집에 초대한다.

마이클은 조지워싱턴 대학의 역사학 교수이다. 대학원 여학생 브루크(호프 데이비스)와 동거를 하며 조만간 결혼할 생각이지만 그의 집이나 주변에는 사별한 아내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그는 강의시간 중에 1995년 오클라호마 시티의 연방건물이 폭파된 사례를 들어가며 미국 역사와 테러리즘에 관하여 강의한다. 마이클로서는 FBI 수사관으로 있던 그의 아내가 테러 방지업무를 수행하던 중 순직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FBI가 잠재적인 테러분자(고물총기 수집을 하는 민병대원)에 관하여 좀더 자세한 정보만 가지고 있었던들 불행한 사태는 안 일어났을 것으로 믿기에 더욱 그러하다. 사고로 엄마를 여읜 아들 그랜트가 안쓰럽고, 그가 구해준 이웃집 소년 브래디가 그의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이웃간에 자주 왕래하는 동안 마이클은 건축설계사라고 하는 올리버 랭에게서 수상쩍은 면을 엿본다. 쇼핑몰을 설계하고 있다지만 그가 다루는 설계도면은 일반 사무실이다. 그의 집으로 잘못 배달된 올리버의 우편물도 수신인이 전혀 엉뚱한 사람의 이름이다. 동부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 필라델피아 소재 펜실베니아 대학 78학번 동창회의 우편물이 오는 것이다. 테러리즘을 연구하는 그에게는 올리버가 센트루이스 출신인 것도 마음에 걸린다. 얼마 전 센트루이스에서는 자살폭탄 차량이 연방국세청 건물에 돌진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사건이 발생했었다. 그런데 그 범인으로 밝혀진 사람이 테러리스트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범하고 온건한 사람이었던 것이 석연치 않다. 그는 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과격분자가 되어 폭탄 테러를 감행하였을까.

더욱이 올리버는 그를 보고 못된 정치인은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하는가 하면, 그가 아내의 죽음에 대해 정부 당국자가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점을 은연중 강조한다. 마이클은 자신의 신상명세를 줄줄이 꿰고 있는 올리버가 두렵게 여겨진다. 올리버에 대한 의심이 깊어가는 마이클을 보고 브루크는 이웃에 잘 보이기 위해 상투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아니겠냐며 공연히 친구를 의심하는 그를 책망한다.

마이클이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수상한 이웃집 남자의 본명은 캔자스주 출신으로 대학 다닐 때까지의 본명은 윌리엄 페니모어였으며, 올리버라는 이름의 동향사람이 펜실베니아 대학 졸업후 총기오발 사고로 죽자 1981년 그의 이름을 따서 개명한 것으로 밝혀진다. 그는 왜 복잡한 절차를 거쳐가며 굳이 자기 이름을 바꾸려 했을까. 죽은 아내의 동료였던 FBI의 카버 수사관을 찾아가 올리버의 신원조회를 부탁하지만 사적인 정보유출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면서 거절당한다.

마이클은 자기집 열쇠가 없다는 핑계를 대고 올리버의 서재로 들어가 자물쇠 가게에 신고전화를 거는 척 하면서 올리버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없는지 책상서랍과 벽면의 액자 뒤까지 샅샅이 뒤진다. 마침내 그는 마을 도서관에서 캔자스 지방신문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검색하다가 올리버 랭 아니 윌리엄 페니모어의 전과를 발견한다. 그가 16살 때 파이프 폭탄으로 토지관리국의 폭파를 기도했다가 붙잡혀 소년원에 들어갔다는 신문기사였다. 점차 확신이 굳어진 마이클은 강의시간 중에도 폭탄 테러에 관하여 학생들에게 열강을 한다.

올리버는 센트루이스 폭발 사건의 주범 소코비에 대하여 조사를 벌이는 마이클을 불러내 그의 본색을 드러낸다. 보상도 없이 농장의 수로를 탈취해 간 토지관리국에 앙심을 품고 폭탄 테러를 시도했었다고 말하며 사람과 가축의 생명줄인 수로를 도둑맞은 고통을 짐작이나 하겠느냐고 질책한다. 그리고 이웃의 뒤나 캐고 다니지 말고 당당히 앞에서 이야기하라고 그를 한 방 먹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이클의 여자친구 브루크는 주차장에서 이상한 금속상자를 주고받고 차를 바꿔타고 교외로 향하는 올리버의 뒤를 쫒는다. 리버티 택배회사 창고 앞에서는 더욱 수상쩍은 광경이 목격된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마이클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그가 부재중이어서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만 남겨 놓는다. 그런데 전화박스 앞에는 올리버의 부인 셰릴(조앤 쿠삭)이 서 있지 않은가.

집에 돌아온 마이클은 TV 뉴스에서 브루크의 자동차가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사고 소식을 접하고 현장으로 달려간다. 올리버 부부가 곧바로 조문을 온 것도 심상치 않다. 코스비의 부친을 만난 마이클은 코스비가 누군가의 꾀임에 빠져 자살 폭탄차량을 몰았던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심증을 굳힌다. 너무나 아이를 좋아하던 코스비가 제 정신으로는 탁아소가 있는 건물에 폭탄차량을 몰고 가지는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랜트는 아빠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웃집 친구와 디스커버리 트루프(보이스카웃과 같은 소년탐험대)를 따라 캠핑을 떠난다. 그 무렵 마이클은 FBI의 카버 수사관으로부터 올리버의 용의점을 찾았다는 말을 듣고 자기 집 전화의 자동응답기에서 브루크의 메시지가 지워진 사실을 발견한다. 올리버는 마이클을 보고 그렇게 뒷조사를 하고도 나를 모르겠냐며 약을 올린다. 자신에게 협조를 하지 않으면 아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협박에 마이클은 허겁지겁 캠핑 장소로 달려간다.

이미 올리버가 아이들을 데려갔다는 말에 마이클은 자기 아들을 태운 리버티 택배회사의 밴에 고성능 폭발물이 실려 있고 이 차량은 FBI 본부를 향하고 있을 것으로 지레 짐작한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올리버를 때려눕히고 FBI 본부로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막상 리버티 밴에는 아무 것도 실려 있지 않고, 그가 FBI 지하 주차장에서 "아차" 하며 올리버의 흉계를 깨닫는 순간 그의 차 트렁크에서 폭발물이 터진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에서 올리버의 정체가 드러난 클라이맥스부터 마지막 장면까지는 반전의 연속이다. 주인공 마이클은 폭탄 테러를 저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그 스스로 폭발물을 트렁크에 싣고 목적지로 갔던 것이다. 자연히 이 사건의 수사결과는 대학교수가 FBI 요원이었던 부인의 순직을 억울해 한 나머지 FBI 본부를 폭파한 것으로 발표된다. 그 자신도, 사건의 내막을 아는 카버 수사관도 모두 폭발 사고로 죽었으니 진상이 밝혀질 리 없다. 코스비도 이렇게 올리버에게 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의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타인의 도구(instrumentality)가 되어 범죄에 사용될 수 있다. 물론 배후의 지능적인 인물을 붙잡아 정범으로 처벌해야 하지만, 김 구 선생 암살 사건처럼 진실이 감춰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 사건에서 올리버 랭은 민병대의 지휘자급 인물로 그려져 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민병대'(Militia)의 전통이 맥맥히 살아 있다. 이들은 본래 독립전쟁 당시 짧은 시간내에 동원되어 영국군과 싸웠다는 의미에서 'Minutemen'이라고 불리곤 하였는데 미국 헌법에서도 그 정신을 기려 제1편 8절, 15,16항 및 제2 수정헌법에서 민병대를 언급하고 있다.

Article 1 Section 8 [15] (연방의회는) 연방법을 집행하고 반란을 진압하며 외침을 격퇴하기 위하여 민병대를 소집하는 법을 제정할 권한을 갖는다.
[16] (연방의회는) 민병대의 조직 및 무장, 훈련, 그 일부를 합중국 군대에 편성하기 위한 절차, 각 주의 예비군 보유, 장교의 임명, 의회에서 정한 규정에 따라 훈련시키는 권한을 규율하는 법을 제정할 권한을 갖는다.

Second Amendment(1791) 잘 통제된 민병대는 각 주의 자유와 안보에 필요하므로 국민이 총기를 소지하고 이를 사용할 권리는 침해할 수 없다. (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a free State,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

미국에는 물론 정규군이 편성되어 있고 예비군도 있지만, 각주에는 18세 이상 45세 미만의 주민들로 민병대가 구성되어 군사훈련도 하고 유사시에는 작전에 투입되기도 한다. 그런데 민병대는 자기 고장의 자치권, 자체방어 능력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로서 미 헌법 조문에서 알 수 있듯이 민간의 총기소지 제도와 함께 이를 개폐할 수 없는 초법적인 존재가 되어 있다.

문제는 이들이 역사적인 유래 탓인지 아직까지도 연방정부(Establishment)를 적대시하는 경향이 많으며 심지어는 유엔 기구가 미 정부와 결탁하여 미국을 식민지화(?)하려 한다고까지 믿고 있다(이 대목은 본 란에서 소개한 멜 깁슨 주연의 영화 <컨스피러시>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민병대원 중에는 이 영화 속의 올리버 랭같이 연방정부가 국민의 재산을 빼앗고 사사건건 괴롭힌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1995년 오클라호마 시티 폭탄 테러를 감행한 범인은 미시간 민병대에 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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