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스피러시(Conspiracy Theory, 1997)

Whitman Park 2022. 2. 14. 21:36

 

어느 날 갑자기 몰아닥친 IMF 한파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국민들은 여기에는 무슨 국제적인 음모가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품게 마련이다. 어느 신문(1998.2.13자 한국일보)은 국제음모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태국에서 시작된 동남아 위기는 미국과 초국적 유태계 자본이 아시아 경제를 길들이기 위한 과정에서 비롯됐으며 한국 다음의 타깃은 중국이다. 이 사실은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다음날부터 동남아 통화위기가 본격화된 것으로 알 수 있다.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지에서 미국 은행들이 대출금을 회수한 직후 외신은 동남아의 외환위기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는 IMF가 수습하는 형태로 사태가 진행됐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는 "외국 투기자본의 음모로 2천억 달러의 부가 동남아에서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구소련 붕괴후 고속성장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일본이 1997년 9월 아시아 지역 금융위기를 해소한다고 아시아 통화기금(AMF) 구상을 내놓자 11월 18일 이를 좌절시켰다. 공교롭게도 이 날부터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는 급격히 악화됐다.

다른 신문(1998.3.19자 경향신문 매거진X)에서는 국제음모설을 다른 각도에서 보았다. "미국은 세계 경제질서를 정보통신 산업체제로 전환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으며, 전세계적인 무역자유화를 촉진하는 과정에서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동남아 외환위기를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공한 음모는 드러나지 않는 법이므로 설사 음모가 있었더라도 쉽게 검증될 수 없을 터이지만, 이러한 소재를 다룬 영화가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레썰 웨폰' 시리즈의 제작자와 감독인 조엘 실버와 리처드 도너가 만든 <컨스피러시> (Conspiracy Theory; 1997년 워너 브러더스작)는 IMF 시대에 개봉되었더라면 외환위기에 관한 경제실정(經濟失政) 수사나 청문회가 필요 없다고 생각되리 만치 상황판단을 단순화시켜 준다. 음모론의 배후로 항상 의혹을 받고 있는 집단--미국의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CIA, 유태계 자본, 프리메이슨 등--이 이 영화에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태인은 그들 자신이 음모론의 희생자(러시아 제정말기 유태인 박해의 도화선이 된 '시온 장로의 의정서'(The Protocol of the Elders of Zion)는 위작(僞作, 가짜서류)으로 밝혀짐)이기도 하다. 홍콩과 대만은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거나 비껴갔다는 지적과 함께 최근 들어 음모론이 잠잠해진 상태이지만, 음모론은 실책에 대한 책임회피와 함께 외국 압력에 대한 단결촉구라는 이중의 효과를 노리고 언제 다시 고개를 들지 모른다.

 

영화의 줄거리

뉴욕의 택시운전사인 제리 플리쳐(멜 깁슨)는 뒷자리 승객의 구미에 맞게 여러 가지 음모론을 들려준다. 승객이 관심을 갖건 말건 끊임없이 지껄여대는 그의 레퍼토리는 실로 다양하다. "뉴욕의 수돗물에는 불소가 섞여 있는데 이는 충치예방 목적이 아니라 수돗물을 먹는 뉴욕 시민들(주로 유색인)의 의지력과 사고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라든가, "오클라호마주 연방정부 청사를 폭파한 민병대(militia)는 유엔이 미국을 정복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일을 저질렀다"라든가, CIA 국장을 역임한 "조지 부시 대통령은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부르짖었지만 실상은 프리메이슨의 강령을 공표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 등이다.

확실히 되살릴 수 없는 어떤 혼란스러운 기억에 시달리고 있는 제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한 음모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현관은 5중 자물쇠로 채우고 손잡이에는 병을 올려놓아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떨어지도록 장치해 놓았다. 심지어는 냉장고와 커피 통에까지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편집증적인 그가 집착하는 또 다른 대상은 연방검사 앨리스 수튼(줄리아 로버츠)이다. 일을 마치고 그녀의 집 앞에서 창 밖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다.

매사를 음모론으로 이해해야 직성이 풀리는 제리에게 10월 초순에 대형 송수관이 파열되어 지하철에 홍수가 난 것도 예사롭지 않다. 검은 안경을 쓴 기관원들이 현장에 출입하는 것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그리고 우주왕복선이 발사될 때마다 세계 어느 지역에선가 강력한 지진이 발생한 것도 결코 우연의 일치로 보지 않는다. 어느 날 신문에서 우주왕복선 발사 소식을 접한 그는 미 대통령이 지진대에 위치한 터키를 방문한다는 뉴스를 듣고 여기에는 대통령 암살음모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예산이 대폭 줄어든 NASA가 대통령 제거를 획책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제리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소식을 뉴스레터로 전하는 한편 뉴욕 형사지방법원으로 앨리스 수튼을 찾아가 대통령의 출국을 막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엘리스는 제리의 제보가 너무 황당무계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제리는 정체불명의 남자들에게 납치된다. 뉴욕 시내 모처로 연행된 그는 대머리 두목의 약물주사를 맞고 비몽사몽간을 헤매다가 그의 코를 물어뜯고 가까스로 탈출한다. 정신병원에서 수갑을 찬 채로 누워 있던 제리는 병실을 찾아온 앨리스에게 차트를 바꿔치기 해달라고 부탁한다. 연방법원 판사였던 아버지가 암살된 데 대해 모종의 음모를 감지하고 있던 앨리스는 제리와 같은 병실에 있던 젊은이가 심장마비로 죽고 또 제리를 잡으러 온 CIA 반장의 코가 붕대로 싸매져 있는 사실을 목격하고 비로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이때부터 편집증 환자의 허무맹랑하던 몽상이 국가권력의 음모가 개재된 무시무시한 현실로 바뀐다. 일련의 사건은 CIA의 심리학자인 조나스(패트릭 스튜어트)가 꾸민 일이었던 것이다. 조나스 박사는 왜 제리를 쫓고 있었던 것일까. 제리가 미국의 역대 암살범들이 부적처럼 갖고 다니던 샐린저의 <호밀 밭의 포수(The Catcher in the Rye)>를 서점에서 골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을 때 CIA 요원들이 오토바이와 헬리콥터를 타고 그를 덮치러 온다. 제리는 극장으로 뛰어들어가 기지를 발휘해 가까스로 포위망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앨리스를 동태를 지켜보는 사람은 제리뿐만이 아니다. 조나스와 CIA 요원은 물론 FBI 수사관까지 제리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24시간 앨리스를 감시체제에 들어간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제리의 뉴스레터 독자 가운데 한 사람이 투자은행가로 행세하는 조나스 박사라는 점이다. 조나스는 CIA 소속 심리학자로서 평범한 사람을 세뇌시켜 암살자로 만드는 'M K Altra'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제리는 그의 실험대상중의 하나였다. 조나스는 사람에게 약물을 투여하거나 전기자극을 가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칫하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험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대통령에 대해서도 총을 겨눌 수 있는 암살범을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제리가 그 비밀을 폭로하는 바람에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앨리스로서도 아버지가 수감중인 죄수의 재심청구를 기각한 직후 암살 당한 사실에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죄수 역시 조나스의 실험대상으로서 살인을 저질렀었고 그의 재심청구를 기각한 판사를 살해하러 제리가 법정에 갔었다고 하지 않는가! 아버지의 죽음에 제리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앨리스는 제리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제리가 앨리스에게 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앨리스 부친의 목장으로 갈 때 제리를 의심한 앨리스가 휴대폰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제리와 앨리스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찰나 조나스의 부하들이 들이닥친다.

제리는 그들에게 붙잡혀 가고 앨리스는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가 제리를 구출하러 나선다. 뉴욕 맨해탄과 퀸즈 사이 이스트리버상의 루즈벨트섬에 있는 저메인 니콜스 정신병원에서 온몸을 묶인 채로 누워있던 제리는 무사히 구조되지만 결국 조나스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만다. FBI의 보호조치(제리가 사망한 것으로 처리하고 빈 무덤을 설치)에 따라 그는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지 않도록 앨리스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감상의 포인트

역사적으로 공식화된 진실의 주변에는 구구한 음모설이 회자되었다. 온갖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오늘날에도 그럴듯한 음모설이 설득력을 갖고 전파되기 일쑤이다. 이 영화에서 대사의 일부로 소개되지만 케네디 대통령이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배후는 속시원히 밝혀진 적이 없고 그저 <J.F.K.>, <대통령의 음모> 같은 영화로나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뿐이다.

법률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보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범죄들도 어떤 큰 음모를 꾸미는 자의 꼭두각시 놀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택시 운전기사에서 CIA의 음모에 맞서 자유의 투사로 변신하는 제리나 조나스의 지휘를 받아 살인을 자행하는 CIA 요원들 모두 범죄의 도구(instrument)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형법에서는 타인을 도구로 이용하여 범죄를 실행하는 자를 '간접정범(間接正犯)'이라고 부른다. 서독 형법은 "스스로 또는 타인을 이용하여 죄를 범한 자는 정범으로 처벌한다"(25조 1항)고 규정하여 간접정범의 정범성을 명문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리 형법은 "어느 행위로 인하여 처벌되지 아니하는 자 또는 과실범으로 처벌되는 자를 교사 또는 방조하여 범죄행위의 결과를 발생케 하는 자는 교사 또는 방조의 예에 의하여 처벌한다"(34조 1항)고 규정하고 있다.

요컨대 간접정범은 범죄계획을 세우고 사태를 의도적으로 지배하며, 그 정(情)을 알지 못하는 타인을 이용하여 죄를 범하는 것이다. 타인을 이용하여 죄를 범한다는 점에서 교사범과 유사하지만, 간접정범은 어디까지나 우월적 의사를 갖고 피이용자를 조종하며 그의 행위를 지배한다. 이 영화에서 제리는 종종 정신이상자의 행동을 하는 도구일 뿐이지만, 조나스의 부하들은 완전한 의사능력·책임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철저한 CIA의 비밀조직에 얽매인 도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이 '음모론'이라 해도 그 배후인물은 살인 등의 음모죄가 아니라 살인 등을 저지르도록 교사한 간접정범으로서 처벌된다. 형법상의 음모란 2인 이상의 자 사이에 범죄의사의 교환이 행해지고 일정한 범죄를 수행하려 하는 모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며,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원칙적으로 벌하지 아니한다(형법 28조). 현행법상으로는 내란 등 음모죄, 외환유치 등 음모죄, 폭발물사용 음모죄, 방화 음모죄, 교통방해 음모죄, 통화위·변조 음모죄, 살인 음모죄, 강도 음모죄 등의 경우에 한하여 처벌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몇 사람이 모의해서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을지라도 이것이 형법 등의 벌칙에 규정이 없으면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이다.

수많은 우리 국민을 고통 속에 빠트린 환란(換亂)음모의 배후인물은,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느 문명국의 형법조문에는 없을지라도 반인류 범죄(Genocide)를 저지른 자와 똑같이 처단되어야 할 것이다. 이 메시지는 헐리우드에서 내노라 하는 제작진--'레썰 웨폰' 시리즈의 제작자와 감독에다 '어쌔신'에서 이들과 함께 작업한 시나리오 작가 브라이언 헬겔란드, '더 록'의 촬영감독 존 슈왈츠먼 등--이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가며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영화를 만든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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