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폭로 (Disclosure, 1994)

Whitman Park 2022. 2. 14. 21:30

 

<쥬라기 공원>, <잃어버린 세계>로 유명한 마이클 크라이튼은 이 시대의 키워드를 소설과 영화로 멋지게 조형화하는 마술사이다. 1994년 베리 레빈슨이 원작자와 공동으로 제작(볼티모어 픽쳐스)한 영화 '폭로'에는 M&A, 하이테크 산업, 스톡 옵션, 성희롱, 인터넷 전자우편(e-Mail) 등 시대의 첨단용어가 등장한다. 일본 기업의 미국 기업 매수가 한창일 때 발표된 'Rising Sun'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기업 내부의 현안문제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원제 'Disclosure'는 주인공이 직장내 스캔들을 폭로했다는 의미보다는 M&A를 앞두고 인수자 측에 중요한 기업정보를 제대로 알렸느냐 하는 '정보공시'로서의 의미가 크다.

이 영화는 시애틀 소재 멀티미디어 회사에 대한 기업합병을 둘러싸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숨가쁘게 전개되는 기업내부의 역학관계 변화와 이 과정에서 돌출된 성희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

아침마다 페리 보트를 타고 시애틀로 출근하는 샌더스(마이클 더글러스)는 멀티미디어 전문회사인 디지컴의 생산부장이다. 월요일 아침 아이들 등교를 돕는 부인이 부두까지 태워준 차로 출근길에 오른 그는 페리 보트 안에서 만나는 명퇴당한 전직 IBM 간부의 신세타령이 짜증스럽다. 그런데 비서의 전갈에 의하면 오늘따라 불길(?)하게도 가빈 사장(도널드 서덜랜드)이 아침 일찍 사무실을 순시했다는 게 아닌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부사장 승진이 유력시되던 그 대신 외부영입 인사가 임명되고 그는 생산부장 자리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장을 면담하고 나서야 샌더스는 스카웃되어 온 사람이 옛날 애인이었던 매리더스 존슨(데미 무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신임 부사장은 본사에서 디지컴의 합병 마무리를 위해 파견된 것으로 밝혀지고, 샌더스는 그녀로부터 "저녁 7시에 와인이나 한 잔 하자"는 초대를 받는다.

그날 저녁 샌더스는 말레이시아 생산공장에서 만들고 있는 CD롬 드라이브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를 할 겸 부사장실로 찾아간다. 그러나 매리더스는 그에게 '91년산 폴마이어' 포도주를 권하면서 어깨를 주무르라고 하는 등 옛날의 관계를 다시 맺자며 노골적으로 유혹한다. "우리 둘만의 비밀인데 이대로는 못 가, 결혼하더니 넌 바보가 되었구나"는 그녀의 조롱을 뒤로 한 채 그는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 나온다.

 

 

집에 돌아와서도 부인한테 아무 말 못하고 샌더스는 가슴의 손톱 할퀸 자국을 감추기 위해 티셔츠를 입고 잔다. 그의 부인은 내일 아침 8시 회의가 8시반으로 변경되었다는 매리더스의 전화연락을 전해준다.

화요일 아침 샌더스가 8시 20분경 회사에 당도해 보니 회의는 이미 7시반부터 열려 합병 파트너에 대한 신제품 가상현실 소프트웨어의 프리젠테이션이 한창이다. 곧이어 열린 회의석상에서 파트너는 CD롬 드라이브의 장애발생에 대한 원인규명 및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사기 당한 기분'이라며 그를 공박한다.

더욱이 그는 어젯밤 사건이 회사내에서 성희롱(sexual harassment) 문제로 비화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직장 상사를 성희롱한 것이니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하자며 텍사스 오스틴으로의 전출 제의를 받는다. 그 시각 93년 3월 8일자 신문기사를 읽어보라는 전자우편이 들어온다. 직장내 성희롱 사건에서 피해자가 1백만달러의 손해배상을 받았다는 기사와 함께 "성희롱은 불법행위로서 이를 막는 길은 용납치 않는 것"이라는 변호사의 말이 실려 있다. 전자우편의 발신자는 "친구(Friend)"라고만 되어 있을 뿐 발신자의 연락처가 없다.

바로 그날 변호사를 찾아간 샌더스는 사건의 목격자도 없었고, 자기가 그러한 상황을 용납했다는 게 미안해 부인을 비롯한 어느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여자변호사는 "직장내 성희롱 사건은 고소해도 손해, 안해도 손해인데, 판결이 날 때까지 적어도 3년간은 생지옥을 겪게 될 것이며 변호사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의견을 말해준다.

 

샌더스의 고소를 접한 회사에서는 합병 건이 수포로 돌아갈까봐 그에게 조정을 제의해온다. 그러나 회사내에 소문이 퍼질 데로 퍼져 그날 저녁 자선모임 파티에서 그의 동료는 그 때문에 스톡 옵션(회사로부터 싼 가격에 주식을 매수할 수 있는 청구권)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그 말을 듣고 눈치를 챈 샌더스의 부인은 그 자리에서는 남편을 전적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를 거세게 몰아세운다.

수요일 샌더스와 매리더스 양측 변호사가 참석한 가운데 조정(mediation)이 열린다. 회사 측 변호사는 그가 본래 성적으로 무분별한 성향이 있었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애쓴다. 반면 샌더스의 변호사는 "성희롱은 성별에 관계없이 강자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것"이라며 매리더스가 고급 포도주를 미리 주문하는 등 상황을 유도한 책임이 있다고 공박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목격자인 청소 아줌마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진상은 본인들 외에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날 현장에서 샌더스가 외부로 건 전화가 오접되었고 누군가 현장상황을 알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샌더스는 전화의 기억장치에서 앤서링 테이프의 소유자를 알아내곤 문제의 테이프를 입수하여 조정회의 석상에 공개한다. 휴대폰 전화가 끊어지지 않은 사이에 녹음된 현장 상황은 샌더스가 성폭행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임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목요일 회사의 합병 직후 매리더스는 사임하고 샌더스는 회사가 변호사비용을 포함한 손해배상을 해주기로 타협을 본다. 그러나 샌더스에게 보내온 친구의 전자우편은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경고한다. 회사 측이 자신을 무능하다고 몰아세워 내쫓을 계획임을 알고 그는 우여곡절 끝에 회사의 메인 컴퓨터로 들어가 말레이시아 현지공장의 문제점을 밝혀낸다.

운명의 금요일, 합병 건은 성사되지만 문제의 CD롬 드라이브 불량작동은 원래 본사의 고위직에 있던 매리더스의 지시로 야기되었음이 폭로된다. 합병 파트너 측의 요구로 강제사직 당한 매리더스는 끝까지 자신이 남자들의 각본에 따라 함정에 빠졌다고 불평을 털어놓는다. 후임 부사장에는 여자 간부가 임명되는데 그동안 샌더스에게 전자우편으로 경고와 자문을 해준 장본인이었음이 드러난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에서 제일 화제가 된 것은 직장내 성희롱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직장내 성희롱이란 고용과 관련된 장소에서 성적 관계를 요구하거나 성적인 발언과 불쾌한 신체접촉 등을 통하여 굴욕감을 주고 고용이나 근로조건에 악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993년과 금년 학원내 성희롱 사건이 법정에서 문제되었다. 전자는 민사소송으로 피고인 대학교수가 1심에서 3천만원 배상판결을 받았으나, 후자는 성희롱 사실을 진정한 제자를 무고죄로 고소한 교수가 되레 허위 고소를 한 것으로 밝혀져 성희롱과는 관계없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조만간 우리나라 국회에서도 '성폭력범죄처벌법'의 개정 등 성희롱에 관한 법률대책이 논의될 전망이다.

 

미국에서는 1964년 민권법에서 성희롱을 성차별의 일종으로 처음 규정한 이래 직장 상사와 같이 고용조건 등을 무기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많이 적용되어 왔다. 현재 美연방 고용균등위원회가 규정하고 있는 직장내 성희롱의 개념은 "타인에게 성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행위"로 거의 무제한적이다. 예컨대 남성 상사가 여성 부하에게 "얼굴이 예쁘다"고 해도 당시의 상황과 여성이 받아들이기에 따라 얼마든지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93년 11월 성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은 "심리적 피해를 증명할 필요없이 보통 상식을 가진 사람이 괴로움, 불쾌함을 당한 것으로 족하다"는 전원일치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가벼운 농담으로 직장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걸 굳이 범죄라 할 수 있느냐"는 인식이 뿌리깊은 데다 대부분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관계로 성희롱 사실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칭 피해자가 법이론으로 무장을 하고 연기를 능란하게 할 경우에는 이 영화에서와 같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뀔 수도 있다. 미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은 최근 미쓰비시 자동차 현지공장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듯이 문화인식의 차이로 대범하게 넘어가려 했다가는 '성적으로 위험한 직장'이라 하여 매스컴의 지탄을 받고 천문학적 금액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양측이 기업합병을 앞두고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 서둘러 조정(mediation)을 받기로 한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민사조정 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하였다지만 미국에서는 소송 건수의 90% 이상이 화해·중재·조정 등 재판외 해결방법(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ADR)으로 처리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조정의 여지없이 명백한 증거가 제출되어 쉽게 끝나버리지만, 의료사고·증권분쟁·노동쟁의 등 전문적인 사안에 있어서는 중재나 조정으로 해결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구체적으로 타당성 있는 해결방안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끝으로 법적인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 'Disclosure'는 투자자들에 대한 공정공시(fair disclosure: FD)의 '공시(公示)'에 해당하는 말이다. 회사 사무실에서 성희롱이 자행되어 회사가 법률분쟁에 휘말릴 수 있다거나 첨단제품의 생산공정에 불량률이 높다는 것을 은폐한 것은 기업가치를 떨어트릴 수 있는 중대한 사유로서 합병계약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합병대상 기업으로서는 기업의 자산가치를 측정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인수기업 측에 전부 숨김없이 공개(disclose)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디지컴의 경영진은 곡예사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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