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 1996)

Whitman Park 2022. 2. 14. 21:20

1998년 여름 엘니뇨의 영향으로 지구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온통 물난리를 겪었다. TV에서는 우리나라의 집중호우와 중국 양쯔강의 범람위기 상황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여름밤의 납량 = 귀신 이야기'라는 공식에 따라 어느 해보다도 풍성한 귀신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대부분 황당무계한 내용이 많았지만, TV에서 먼 고장의 홍수피해 상황을 보여줄 때 우리 집 지붕도 함께 샌다는 식으로 모르는 이의 귀신 이야기가 우리 신변에도 닥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었다.

이런 여름밤에 볼 만한 비디오 중에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가 있었다. 폴리스 드라마로 유명한 <NYPD Blue>를 연출한 그레고리 홀비트 감독의 이 영화(1996년 파라마운트사 제작)는 존경받는 대주교의 피살사건을 다룬 법정 스릴러이지만 정신과에서도 인정하는 '다중인격(multiple personality)'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영화의 줄거리

시카고의 이름난 마틴 베일 변호사(리처드 기어 분)는 어떠한 형사 피고인도 최고의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에게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란 "변호사가 법정에서 12명의 배심원들에 심어주는 진실이라는 이름의 환상(illusion of truth)"일 뿐이다. 그는 악명 높은 조직폭력배 두목의 변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때 그의 관심을 끄는 사건이 일어난다. 시카고 시민의 존경을 받는 대주교가 주교관 침실에서 손가락이 잘리고 두 눈이 도려내지고 온 몸이 80여 군데나 난자 당한 채 살해된다. 그의 가슴에는 암호와 같은 B32 156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TV에서는 범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도주하다가 결국 경찰에 체포되는 장면이 현장 중계된다.

베일 변호사는 벌떡 일어나 관할경찰서로 찾아가 피의자의 무료변론을 자원한다. 대주교 살해용의자로 체포된 아론 스탬플러(에드워드 노턴 분)를 위해 변호사들이 일정 시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공익봉사(pro bono) 변론을 자청한 것이다.

전혀 살인범 같아 보이지 않는 19세의 순진한 청년은 거리에서 유리걸식하던 자기를 구해주고 성당에서 복사(altar boy) 겸 성가대원으로 일하게 해준 아버지 같으신 대주교님을 왜 죽였겠느냐며 그 방에 누군가 있었다고 말한다. 자기는 대주교에게 책을 돌려드리려고 들어갔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깨어나 보니 온 몸이 피범벅이 되어 있어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설명한다. 그의 말을 믿은 베일 변호사는 제3자의 개입 가능성을 법정에 제시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기억상실증 전문의를 불러 스탬플러의 정신감정을 의뢰한다. 그러나 검찰 수뇌부는 사건 현장에 남은 모든 증거에 비추어 스탬플러가 진범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하고 전에 베일 변호사의 검사시절 후배 검사였던 미모의 자넷 베너블 검사(로라 리니 분)에게 이 사건을 맡긴다.

 

검사의 1급 살인 기소에 대하여 변호사는 수정헌법 제5조(Amendment V)의 형사소송의 적법절차(Due Process of Law에 의하지 않고는 생명과 자유, 재산을 뺏기지 않는다는 국민의 기본권)를 강조하고 피고인에게 검사의 유도신문에 넘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그러나 베일 변호사를 돕는 조사원들의 눈에 수상쩍은 사실이 포착된다. 즉 성당 부근의 낡은 건물을 사들인 후 이를 철거하고 고급 아파트를 짓기로 한 투자조합의 사업계획을 대주교가 반대했고 투자조합에는 베일 변호사를 눈엣가시로 보는 쇼너시 검사장이 깊숙이 개입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법정 증언 결과 피살된 대주교의 몸에 쓰여진 B32 156이란 암호는 주교관 지하실 B호 서가에 32번째로 꽂혀 있던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주홍글씨' 156쪽에 밑줄 처진 "어떤 인간도 진실된 모습을 들키지 않고 2개의 가면을 쓸 수는 없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살인자는 대주교가 이중인격자임을 고발한 것이다.

그러나 베일 변호사는 스탬플러가 주홍글씨를 읽어본 적도 없다는 말을 곧이 듣고, 스탬플러와 같이 복사 생활을 하다 쫒겨난 알렉스라는 젊은이를 의심하는가 하면 주교관에 있는 문제의 비디오를 슬쩍 바꿔치기 하여 내용을 검토한다. 사무실에서 비디오를 본 베일 변호사 일행은 대주교가 스탬플러를 비롯한 3명의 미성년 남녀를 데리고 포르노 연출을 한 충격적인 내용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바로 스탬플러로서는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여자 친구를 미쳐버리게 만든 대주교를 살해할 동기가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교도소를 찾아가 왜 거짓말을 하였느냐고 따져 묻는 베일 변호사에게 스탬플러는 머리를 벽에 쿵쿵 부딪히며 전형적인 다중인격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씨와 음성이 다른 사람 로이의 것으로 바뀌면서 자기가 대주교를 죽였지 스탬플러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떠벌린다.

베일 변호사는 "가끔은 선한 사람도 나쁜 짓을 한다"며 검사측이 고의성을 밝힐 때까지 무죄추정을 받아야 한다(presumed innocent)고 말하고 조사원을 시켜 검사 집으로 비디오 테이프를 보낸다. 물론 검사측은 노발대발하며 문제의 비디오가 교회측에 문제를 안겨주는 일없이 폐기되도록 조치를 한다.

베일 변호사는 급기야 수정헌법 제6조에 의거 "형사피고가 신속한 공개재판을 받고 증인을 신문할 수 있음"을 들어 전례없이 쇼너시 검사장으로 하여금 증언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에 대해 검찰측이 격한 반응을 보이는 사이에 피고인을 다중인격 증상으로 몰아 형사책임을 질 수 없음이 부각되도록 한다. 열이 오른 베너블 검사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때 로이의 성격을 나타낸 피고가 검사의 목을 조르고 법정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된다. 급기야 재판장은 '심리의 오류'(Mistrial)를 인정하고 배심원단을 해체하기로 한다. 스탬플러 역시 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조만간 석방될 것이 확실해진다.

검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며 실의에 찬 검사와는 대조적으로 기쁨에 들뜬 베일 변호사에게 연신 고맙다고 하는 스탬플러. 베일이 뒤돌아서 나갈 때 검사의 목을 졸라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인격의 전환이 일어날 때면 기억상실증으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터인데 검사에게 한 짓을 기억하다니······  바로 다중인격 증상은 스탬플러가 무죄석방을 노리고 꾸민 간교한 연극이었던 것이다.

 

감상의 포인트

귀신이나 영혼, 정신의 문제는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지만 정신의학에서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는 문제이다. 일례로 1998년 8월 22일 크리스천 아카데미 하우스에서는 소장 정신과의사들의 '빙의(憑依, 귀신들림)'에 관한 세미나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임상사례를 중심으로 빙의 현상을 토의했다. 신체질환을 포함하여 몸과 마음의 평정상태가 깨졌을 때 자주 일어나는데 빙의 현상을 이해하면 환자의 치료나 예후가 좋다는 주장도 있었다. 상당수의 사례에서는 정말 귀신이 들렸다기보다는 주의력이 저하되거나 외부자극이나 감각이 박탈된 상태에서 환상이나 허상을 본 것이라는 반론도 있었다.

빙의 세미나의 개최 사실을 소개한 1998년 8월 28일 저녁의 KBS 2 '미스테리 극장'에서는 고속도로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실험을 통하여 재연해 보였다. 예를 들어 깜깜한 창고 안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채 한 시간 이상 달리다 보면 외부의 자극이 둔해지고 이러한 상태에서 두뇌가 자극을 잘못 이해하면 차 앞으로 귀신이 달려드는 착각현상이 일어난다는 설명이었다.

또 어두운 곳이나 밀폐된 장소에서도 자기최면이나 암시를 통하여 귀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TV 기자는 귀신론으로 유명한 서울 성낙교회의 김기동 목사와 인터뷰를 했다. 김 목사는 "오늘날의 개인적·사회적 병리현상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절대자의 능력을 통해 귀신의 능력을 부정하고 이를 쫓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떻게 보면 귀신 이야기는 실체가 존재한다기보다 이것을 믿고 싶어하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베일 변호사는 처음부터 사건의 결론을 정해놓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검찰을 묵사발 내는 것이다. 사건 현장에 실제로 제3의 인물이 없었다면 귀신이라도 만들어 낸다. 스탬플러가 연기를 한 아론과 로이의 모습은 한 사람의 몸에 둘 이상의 혼을 가진 다중인격(독일어로 'Doppel Gaenger'라고 하는 말이 더 일반적임)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스탬플러가 아론의 모습을 할 때에는 말을 더듬는 순진한 청년이지만, 로이의 모습을 할 때에는 속사포 달변에 산전수전 다 겪은 장년의 모습을 한다. 그의 몸에 로이라는 귀신이 들려(빙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귀신의 존재를 만들어 내고 싶었던 베일 변호사는 증인신문 도중에 피고인더러 "로이는 어디 갔느냐"고 종용하고 이 말에 용기를 얻은 스탬플러는 천연덕스럽게 로이의 연기를 한다. 거의 모든 귀신 이야기도 파헤쳐 보면 거짓과 속임수와 다름 아니다.

이 영화에서 베일 변호사는 형사사건에서 검찰의 살인죄 기소에 대해 제3자의 범행이라는 항변(plea)을 잘못 제출하고 이를 적절히 시정하지 않음으로써 피고인을 위기에 몰아넣고 사건 심리를 방해하였다는 이유로 변호사 자격마저 박탈당할 수 있는 위기에 처한다. 그럼에도 다중인격이라는 빙의현상으로 위기국면을 타개하지만 그 다음 순간 섬뜩한 귀신의 웃음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광야에 홀로 섰을 때처럼 오싹하게 느끼는 원시적인 공포(primal fear)를 그 스스로 만들어 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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