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한국 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영화 <쉬리>. 한국 영화는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통념을 깬 공전의 히트작이다. 개봉 두 달만에 서울지역의 관객수가 영화 '타이타닉'을 제치고 2백만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 영화를 기획하고 각본을 쓴 강제규 감독이 단연 매스컴의 각광을 받았지만, 사업축소 위기에 몰린 삼성영상사업단이 사상 최대의 히트작을 만들고, 벤처캐피틀 회사(현 산업캐피탈)가 투자금의 몇 배 수익을 올렸다고 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이 영화 개봉 직후 사설에서 "꽉 막힌 한국 영화계의 새 출로를 여는 가능성을 보면서 [쉬리에 관객이 몰리는] 사건이 침체된 영상산업에 새로운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할리우드 영화 일변도의 관객 취향, 미국 영화의 직배체제와 스크린 쿼터제 축소 압력 등으로 설자리를 잃어가는 우리 영화계에도 좋은 작품이라면 관객이 몰린다는 가능성을 모범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쉬리>다"(중앙일보 1999.2.21자 사설)라고 말했다. 이 이상의 찬사가 어디 있을까.
영화의 줄거리
한국의 비밀 정보기관 O.P.의 특수요원 유중원(한석규 분)과 이장길(송강호 분)은 이상한 제보전화를 받고 약속장소인 쇼핑몰로 간다. 그네들이 접선하려던 남자가 갑자기 달아나는 바람에 뒤를 쫒는데 그는 막다른 골목에서 의문의 저격수로부터 살해되고 만다. 무기밀매상인 임봉주로 하여금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한 존재는 누구란 말인가. 유와 이는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이방희 파일을 다시 꺼내본다. 암살 수법이 몇 년전 그들이 쫒던 북한출신 미모의 저격수 이방희의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유는 신경이 마르는 첩보전에서 기분전환을 위해 관상어를 기르는 것이 취미다. 취미가 지나쳐 수족관을 운영하는 이명현(김윤진 분)과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고, 심지어는 그가 실장으로 있는 O.P. 사무실에도 관상어 어항을 여러 개 들여놓았다.
그 사이 남북간에는 화해 무드가 조성되어 2002년 월드컵 게임에 남북한 혼성팀을 출전시키기로 합의를 본 상태이다. 서울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때 잠실 운동장에서 남북 화해를 상징하는 남북 친선 축구시합을 개최키로 한 바 있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을 원치 않는 것은 북한의 군부, 그것도 최정예 특수 8군단이다. 특수 8군단에서는 박무영 소좌를 부대장으로 하는 특수부대를 남파하여 이러한 화해 무드를 뒤엎고 남북간에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북한의 군부는 왜 전쟁을 원하는가. 그들은 인민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부르짖고 있음에도 남북 위정자들은 통일을 정권안보 차원에서 이용하는 것이라고 의심한다. 현재 남북간 친선 무드가 진전되면 될수록 조국 통일은 멀어지고 남북 분단상황은 영원히 고착된다고 보는 것이다.
박무영 부대가 노리는 것은 한국 국방과학기술연구소에서 개발한 신소재 액체폭탄 CTX이다. 이것을 탈취하여 남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남북 축구시합이 열리는 잠실 경기장에서 이를 폭발시킴으로써 한반도를 전쟁상태로 몰고 간다는 계획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오래 전에 밀파된 것이 특수 8군단의 최정예요원 이방희였던 것이다. 그녀는 신형폭탄 개발관련인사를 차례로 암살하고 한동안 잠적함으로써 유와 이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쉬리'(한반도의 맑은 개울물에 서식하는 토종 민물고기)라는 암호명을 가진 이방희는 과연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유와 이의 추리가 실체에 거의 접근할 즈음 박무영 부대는 이미 활동을 개시하여 군단 포격훈련에 사용하기 위해 이송 중이던 CTX 폭탄을 감쪽같이 탈취, 고층 백화점의 옥상에서 시범적으로 터뜨린다. 그리고 한국 정부당국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미화 1천만달러와 해외로 도피할 항공기편을 요구한다.
한 달 후에 결혼할 이명현의 정체에 의심을 갖게 된 유중원은 제주도로 가서 진짜 이명현은 장기 요양중이고, 가짜 이명현은 일본에 가서 성형수술을 받고 돌아와 서울에서 암약하고 있는 이방희임을 알고 허탈해 한다. 한편 O.P.내에서 극비정보가 새어나가고 있음을 감지한 이장길 역시 수족관의 이명현이 특수 8군단 행동대원임을 눈치채고 그녀를 체포하러 가지만 박무영과의 총격전 끝에 죽임을 당한다.
박무영이 노리는 것을 알게 된 유중원은 필사적으로 잠실 스타디움으로 향한다. 수많은 관중 속에서 북한 특수부대원과 저격수 이명현을 찾던 유는 빛과 열이 있어야 폭발하는 CTX의 특성을 상기하고 변전실로 가서 귀빈석 라이트를 켜놓도록 한 박무영 일당과 맞닥뜨린다. 이념과 가치관에 의해 움직이는 두 사나이의 대결에서 유는 가까스로 액체폭탄의 폭발 직전에 전원을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 이명현은 사태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요인 암살로 타깃을 바꾸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한 유중원에게는 차마 총을 쏘지 못하고 테러진압 경찰에 의해 사살 당하고 만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경기시작 전에 유에게 남긴 전화 음성 메시지는 그와 함께 보낸 지난 1년간이 그녀 인생의 전부였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좋아하던 "When I Dream"의 멜로디를 들으며 유는 진짜 이명현을 만나러 제주도로 간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 이상으로 재미있다. 장면의 전개가 스피디하고 도심 총격전, 헬기 추격전 등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제작비를 아끼지 않은 영화촬영이 돋보인다. 특히 북한의 특수공작원 이방희가 수족관을 차리고 정보기관에 공급하는 물고기의 뱃속에 도청장치를 삽입한다는 것이나, CTX라는 무색무취의 액체폭탄이 빛과 열에 반응한다는 설정이 기 막히다. 해외 출품을 겨냥한 영화답게 로케 장소가 한국의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세계화되어 있는 장소들이다. 정보기관의 명칭이나 브리핑 용어도 모두 영어 일색이다. 따로 번역이 필요없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은행나무 침대'를 만들었고, 또 한국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감독이라는 말을 듣는 강제규 감독이 3년간에 걸쳐 철저히 검증하였다는 시나리오에는 몇 가지 빈틈이 엿보인다. 영화 <벤허>를 본 어느 역사학자도 로마 제정때 예루살렘 부근에는 전차경주가 벌어질 만한 경기장이 없었다고 흠을 잡지 않았던 것처럼 이것은 사실적 비판을 요하지 않는 픽션 영화이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상식 수준에서 실정법 및 관계기관의 내규, 행동강령(code of conduct)에 관한 법률 검토를 거쳐야 하지 않았을까.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상식을 토대로 이 영화의 허점을 찾아본다.
첫 번째, 쇼핑몰에서 유중원과 박무영이 무기밀매상 임봉주를 접선하는 장면. 도심의 대형 쇼핑몰 안에서 괴한들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일 때 쇼핑객, 행인들의 피해가 속출함에도 자체 경비원이나 인근 경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시민들이 넘어지고 다치고 불안에 떠는데도 사회공공의 질서유지를 책임진 경찰(경찰관직무집행법 1조)은 어디에도 없다. 요즘 쇼핑몰이나 대형할인점에서는 경비절감 차원에서 일반 판매직원은 줄이는 대신 절도사고의 방지 및 자체 방호를 위해 제복을 입지 않은 경비원을 확충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일선경찰은 기동성있게 순찰차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건 현장에 수 분내에 도착할 수 있다.
두 번째, CTX라는 액체폭탄의 호송 장면. 신형 폭발물을 극비리에 호송하는 루트에 일반 차량은 어떻게 통행을 금지시켰는지(도로교통법 6조), 또 백주에 위장 군인에 의하여 초고성능 폭탄 탈취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즉각 사후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영화 '시실리안'에서는 범인들이 하이재킹한 제트여객기가 고속도로상에 비상 착륙하지만 아직 개통전이라 폐쇄되어 있는 고속도로라는 대사가 나와 관객들의 의구심을 해소해준다. 북한 특수 8군의 훈련 장면에서도 옆에 동료를 죽이는 끔찍한 장면이 나오는데 이들은 훈련상대용 죄수라는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또 군(軍)관련 사건이 발생하면 현장에는 군 기동타격대(task force)가 즉각 투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는 O.P. 요원이 헬리콥터를 타고 먼저 날아온다. 한국 군대가 그렇게 무신경하지는 않다면 이것은 현실을 왜곡시킨 감마저 있다. 비록 영화 촬영때 국방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해도 말이다. 미국 대통령이 기내에서 납치되는 내용을 다룬 영화 '에어포스 원'에서는 합참의장을 비롯한 군 관계자들이 모든 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세 번째, 액체폭탄의 제1차 폭발 장면. 잠실의 대형 백화점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한다. 북한 테러리스트들의 협박이 당국에 전달되었음에도 잠실 경기장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남북한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남북한 친선 축구시합이 열린다. 폭탄 테러범의 신원이 북한 특수부대원들이라면 정부는 서울지역에 계엄선포 등 거의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다(헌법 77조)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할리우드의 신작 '피스메이커'에서도 핵무기가 보스니아 반군에 탈취 당하는 스토리를 담고 있는데 특수군부대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네 번째, 잠실 경기장에서의 남-북한 축구시합 장면. 양측 정상이 참석한 경기장에서의 보안검색이 물이나 술 같은 액체의 소지 여부에 국한된다. 평소 대통령 임석행사의 보안검색 매뉴얼이 이 정도일까. 경비경찰의 모습이 많이 보이지만 테러진압 경찰이나 요소요소에 포진한 저격수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많은 무기가 어떤 식으로 반입되었는지 그 경위 설명이 생략되어 있다. 개선문 기념식장에서 프랑스 대통령을 저격하려고 현장에 접근하는 테러리스트의 사전준비를 치밀하게 묘사한 영화 '자칼의 날'과는 대조적이다.
다섯 번째, O.P. 요원 결혼상대방의 신원조회 장면. 유중원은 사건이 한참 벌어진 다음에야 진짜 이명현의 소재지를 파악하고 제주 요양소를 찾아간다. 상황에 따라서는 동료와 상사마저도 의심할 수 있는 1급 정보요원임에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보안규정에 둔감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최근 중국 공산당간부의 딸과 결혼하게 된 국가정보원 직원이 직장에서 권고사직 당한 것처럼 특수기관의 경우 프라이버시는 인권 차원의 보호대상이 될 수 없다. 내규위반으로 징계 정도가 아니라 줄줄이 파면 감이다.
이상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쉬리는 한반도 상황이 통일을 앞두고 극적인 국면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 한국의 신무기(CTX, CDMA 뿐만 아니라 인기영화(?)까지도) 개발능력이 상당 수준이라는 점 등을 국내외에 과시하였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정보기관 1급 요원인 유중원이 그의 작전대상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눈 러브스토리는 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쉬리가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흥행기록을 수립한 타이타닉을 제꼈다고 화제 만발이지만, 해외시장에서도 좋은 평판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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