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엔트랩먼트(Entrapment, 1999)

Whitman Park 2022. 2. 15. 09:05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전세계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던 Y2K(컴퓨터의 2000년 인식오류) 문제가 별 탈없이 지나갔다. 너무나 싱겁게 끝난 나머지 미국의 컴퓨터관련 대기업들이 사기극을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과 차제에 컴퓨터 시스템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일반의 정보화 마인드가 확산된 것은 기대 이상의 효과였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어찌되었건 존 아미엘 감독의 영화 <엔트랩먼트>(Entrapment; 1999년 리전시 엔터테인먼트 제작)는 바로 Y2K에 대처하기 위한 국제금융기관의 컴퓨터 가동중단을 틈타 국제자금을 가로채려는 사이버 범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사건의 리얼리티보다는 제작 및 주연을 맡은 숀 코네리와 40년 가까이 나이 차이가 있는 여주인공(영국 웨일즈 출신인 30세의 캐써린 제타-존스는 역시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더글러스와 이 영화 개봉 직후 약혼하였다)의 로맨스가 더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FBI 수사관이 공범자로 등장하는 데다 제목부터 미국의 형사소송 절차에서 피고인측 항변으로 자주 제기되는 '함정'(entrapment)으로 되어 있어 법적인 관점에서도 얘깃거리가 풍부하다.

 

영화의 줄거리

밀레니엄 16일전 뉴욕 맨해튼의 한 고층건물에서 루벤스의 그림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 명화는 웨블리 손해보험에 들어 있었으므로 보험회사의 조사요원들이 즉각 수사에 착수한다.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은 동일 수법의 전과자인 로버트 "맥" 맥두걸(숀 코네리)이다. 그는 돈 때문에 미술품을 훔치지는 않는다고 알려진 나이 지긋한 미술애호가이다.

보험회사의 조사관 버지니아 "진" 베이커(캐써린 제타-존스)는 헥터 크루스 반장(앵글로 윌 패튼)의 허가를 얻어 런던으로 가는 맥을 미행한다. 맥 역시 미모의 여성이 그를 미행하는 것을 수상쩍게 여긴 나머지 그녀의 호텔 방에 잠입하여 정체를 캐묻는다. 그러자 진은 맥에게 며칠 후 런던 베드포드 궁에서 개최되는 중국의 가면전시회에서 중국의 국보급 가면을 함께 훔칠 것을 제의한다.
맥은 진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런던의 골동품상에서 명나라 도자기 속에 감춰진 필름을 훔쳐오도록 지시한다. 진이 순발력있게 이 임무를 수행하자 맥은 베드포드 궁의 중국 가면을 함께 절취하기로 하고 스코틀랜드에 있는 그의 고성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간다.

해변가의 외딴 고성에는 맥의 안목을 자랑하는 미술품이 즐비하다. 당대 최고의 절도기술을 가진 맥의 집에 자물쇠가 없는 것도 기이하다. 미술품 콜렉션이 돈을 주고 산 것이냐는 진의 질문에 맥은 피땀 흘려(with blood) 마련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진과 맥 두 사람은 집안에 베드포드 궁 설계도면을 펼쳐 놓고 가면 전시실의 보안 시스템을 그대로 재현한 다음 궁에 침투하는 것에서부터 가면을 훔쳐들고 나오기까지의 모든 상황을 연습한다. 평균대 운동으로 단련된 진은 물샐 틈 없이 설치되어 있는 적외선 감시 시스템을 고난도 체조를 하듯이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간다. 진은 은근히 맥을 유혹하지만 맥은 큰 일을 앞두고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킬 수는 없다며 사양한다. 그보다는 나이 차이를 의식한 데다 진을 100%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진이 밖으로 나갔을 때 맥은 그녀의 공중전화를 도청하는 것이다.

맥은 진이 무엇 때문에 루벤스의 그림을 훔쳤는지 묻는다. 그녀가 루벤스의 그림을 우편함에 넣자마자 1층 우편함에서 빼돌렸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일단 시험해 보고 믿기'(First try, let me trust)로 합의한다. 이 때 체격이 건장한 시바두(빙 레임스)가 맥이 주문한 고가의 장비를 성 안에 들여 놓는다. 4천만 달러나 하는 스파이 장비를 무엇에 쓰려느냐고 맥에게 질문하지만 그는 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할 드레스나 사다 달라고 주문한다. 맥을 찾아 성 위에 올라간 진과 맥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흐른다. 상대방을 적으로 여긴다면 성 밑으로 밀쳐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 바닥에 떨어진 것은 진이 들고 올라간 위스키 술잔이었다.

밀레니엄 4일 전. 베드포드 궁에서는 가면 무도회가 열리고 두 사람은 늦게까지 홀에 남아 있다가 호수 밑 비밀통로로 전시실 지하로 잠입한다. 경비가 순찰을 도는 사이 작업에 허용된 시간은 단 3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중국 가면을 손에 넣지만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두 사람은 가면을 팔아 무엇을 하려는지 진실을 밝히라고 서로 다툰다. 이때 진은 맥에게 쿠알라룸푸르 작전을 설명한다. 그의 도움이 진정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루벤스 그림이나 중국의 가면은 말레이시아의 지하조직 두목으로부터 쿠알라룸푸르 은행의 비밀암호(공자님 말씀?)와 홍채 패스(biometric pass)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새해를 며칠 앞두고 쿠알라룸푸르에 간 두 사람은 관광객을 가장하여 이 도시의 명물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에 오르지만 관심은 오직 이 빌딩 안에 있는 국제결제은행(International Clearing Bank; ICB)의 대형 컴퓨터 시설에 쏠려 있다. 12월 31일 밤 11시부터 ICB의 컴퓨터 시계를 늦춰놓고 12시 정각 ICB 본점에서 밀레니엄 버그 방지를 위해 30초간 컴퓨터 네트워크 가동을 중단한 사이에 80억 달러의 자금을 진의 비밀계좌로 이체시킨다는 계획이다.
그 사이에 진의 행동을 못내 수상히 여긴 보험회사 헥터 반장이 뉴욕에서 쿠알라룸푸르로 날아오고 맥을 도와가며 그의 더 큰 범행을 감시하던 시바두 FBI 수사관도 행동을 개시한다. 진과 맥 두 사람은 밀레니엄이 바뀌는 순간 계획한 대로 ICB의 컴퓨터 조작에는 성공하지만 탈출과정에서는 계속 차질이 생긴다. 말레이시아 경찰 특공대가 진압에 나서고 스카이 브리지의 오색 전구 전선줄에 매달려 있던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만다. 진이 당초에 바랬던 대로 그녀의 탈출로를 열어주고 맥은 경찰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반전의 연속이다. FBI에 협조하기로 약속하고 맥은 푸두 역에서 진과 만난다. FBI가 노린 것은 처음부터 시바두 수사관과 협력관계에 있던 맥이 아니라 진짜 큰 도둑 버지니아 베이커였던 것이다. 그러나 맥은 진에게 도피수단을 제공하며 피신하도록 한다. FBI 수사관과 보험회사 조사관들이 전철을 타고 달아난 진을 추격하는 사이에 다시 유유히 나타난 진은 맥과 사랑의 도피 길에 나선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의 스토리에서는 눈을 씻고 보아도 법률적 소재를 찾기 힘들다. 그러나 제목인 '엔트랩먼트'는 미국의 형사소송 절차에서 피고인이 "억울합니다. 형사가 쳐놓은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라고 주장할 때 쓰는 말이다. 수사기관이 미끼를 던져 당초 犯意가 없던 사람에게 범의를 유발하고 범죄의 실행에 이르게 한 때에는 이를 당해 범죄의 소추에 대한 항변사유로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다른 말로는 '올가미의 항변'이라고 한다.

수사기관의 입장에서는 범죄의 성정이 충분한 자가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범죄의 실행에 착수하였을 때 旣遂 시점에서 체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범죄의 예방이 아니라 검거실적을 올리기 위한 범죄의 조장이라 할 수 있다.

진 베이커와 맥두걸, 시바두 세 사람이 형사피고인이 되어 법정에 섰다고 가정하고 그들의 진술을 들어보자.

 

진: 저는 말레이시아 ICB 은행이 새해 자정에 컴퓨터를 30초 가동 중단한다는 것을 알고 그 틈을 타 계좌이체를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저 혼자 무슨 수로 그 엄청난 일을 실행에 옮기겠어요?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지요. 생각하는 것만으로 죄를 짓는다면 이 세상엔 죄인 아닌 사람이 없을 거예요. 제가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 때문입니다.

 

맥: 저는 누군가 루벤스의 그림을 훔치려는 것을 알고 슬쩍 중간에 가로챘을 뿐입니다. 중국 가면을 훔친 것이나 ICB 뱅크 컴퓨터 시스템에 침투하려 한 것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저야말로 미끼를 덥썩 문 불쌍한 사냥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 맥이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알고 그의 동태를 감시하였을 뿐이지 일부러 함정을 파놓고 사냥감이 걸려들기만 기다렸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 사건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공범자를 모으고 실행에 옮긴 자는 진 베이커입니다.

 

이 영화는 도입부가 그럴 듯하고 캐써린 제타-존스의 관능미 넘치는 액션도 볼 만하다. 숀 코네리가 제작까지 맡아서 그런지 연말의 Y2K 버그 소동처럼 유쾌한 사기극(詐欺劇) 같다는 느낌이 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가 감독·주연하는 영화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로 보이려고 애쓰듯이 숀 코네리 역시 20대의 젊은 여성이 반할 정도의 멋있는 스코틀랜드 남자라고 은근히 뽐내는 것 같다.

수사기관으로서는 더 큰 범죄 행위자를 현장에서 붙잡는 것이 스릴 있겠지만 일반 시민으로서는 작은 범죄부터 진압하고 예방하는 것이 훨씬 마음 든든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관객들은 모두 이 영화의 함정에 빠진(entrapped)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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