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네고시에이터(The Negotiator, 1998)

Whitman Park 2022. 2. 15. 09:00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적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에는 짐짓 후퇴하는 척 하다가 적을 함정으로 유인한 후 포위 공격하는 방안, 적의 중심부에 싸움을 걸면서 주력을 양옆으로 우회시켜 삼면에서 협공하는 방안도 있지만 적의 주력부대를 공격하면서 정면돌파(breakthrough)를 시도하는 방안도 많이 사용된다.

영화 <네고시에이터>(The Negotiator; 감독 F. 게리 그레이, 1998년 워너 브라더즈 제작)는 인질(hostage)이 무사히 풀려나도록 범인과 협상(negotiation)을 벌이는 특수경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질범을 진압해야 하는 경찰관이 자신을 범인으로 모는 동료 경찰들을 인질로 잡아 우여곡절 끝에 누명을 벗는 아이러니가 이 영화의 묘미라 할 수 있다. 반전을 거듭하지만 다행히 정면돌파라는 극약처방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원칙적으로 정면돌파는 적의 주력부대와 직접 대결하는 만큼 병력·화력이 적을 압도할 정도가 되지 못하면 아군의 피해가 더 커질 수 있다. 1999년 한 해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옷 로비 의혹 사건만 해도 그렇다. S그룹 회장 부부가 모두 구속 기소되는 珍記錄을 세운 이 사건은 S그룹 측에서 본다면 연이은 작전의 실패가 최악의 결과를 빚은 것이다. 검찰의 최종 발표에 따른다면 S그룹 회장 내외는 당초 외자유치설을 퍼뜨려 수사의 예봉을 피하려다가 이것이 여의치 못하자 敵將을 매수하고자 하였으나 이것마저도 실패하자 아예 적장을 낙마시키려 한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못된 여우를 혼내주려고 꼬리에 불을 붙였는데 여우가 밭에 들어가 날뛰는 바람에 애써 지은 밭농사를 모두 망쳐버린 꼴이 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치밀한 계획하에 자신이 인질범이 되어 감옥에 들어갈 각오를 하였다면 사태가 이처럼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과거 우리 나라의 엄격한 외국환관리법 하에서는 여러 개의 회사를 경영하는 기업인 치고 국제경영의 과정에서 外換事故는 알게 모르게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줄거리

시카고 경찰의 대니 로만 경위(사무엘 잭슨)는 인질범과의 협상에 능한 경찰관이다. 자기 딸의 얼굴에 총을 겨누고 집 나간 마누라를 데려오라는 형편없는 남자를 멋지게 처치한 그는 경찰국장의 생일파티에 갔다가 놀라운 첩보를 듣는다. 그의 파트너인 네이트 형사가 경찰의 보훈기금(Disability Fund; 직무 수행중 부상을 당한 경찰관을 위한 후생복지기금)이 2백만달러 이상 유출된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범인은 경찰 내부에 있는 것 같다는 귀띔이었다.

만혼을 한 대니의 부인은 경찰 네고시에이터로서 그의 행동이 자칫 위험할 수 있다고 걱정을 하지만 그는 미친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장담한다. 그때 마침 대니는 네이터 형사의 호출을 받고 약속장소인 호숫가로 나간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네이터 형사는 차 안에서 괴한에 의해 피살된 후였으며 사건 현장을 확인하던 대니는 동료 경관을 살해한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호수물 속에서 발견된 범행에 쓰인 권총이 그가 얼마전 압수한 총기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불안한 가운데 네이터 형사의 장례식을 치르고 대니 경위는 가택 압수수색을 당한다. 그의 집에서 발견된 것은 그도 모르게 해외 예금계좌에 돈이 입금된 것으로 되어 있는 명세서였다. 결국 대니는 경찰관 뱃지와 권총을 회수 당하고 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동료들로부터 범인시 당하는 그는 너무 억울해 참을 수가 없다. 그는 인질범을 다루던 솜씨를 발휘하여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을 감찰과(Internal Affairs Division)를 찾아가 항의를 한다. 그러나 자신의 호소와 해명이 통하지 않음을 알고 감찰과장인 니바움 경감(J.T. 월시; 영화 '브레이크다운'에서 악한 트럭 운전사로 출연하였던 그는 1998년 2월 이 영화의 촬영 직후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이 영화는 그에게 헌정되었다.)과 여직원, 자신의 직속상관인 반장 등 4명을 인질로 잡고 동료 경찰과 대치를 벌인다. 그런데 경찰국 건물은 연방청사(federal building)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구내에서 벌어진 사건은 연방수사국(FBI)의 관할에 들어간다.
대니는 시카고 경찰에서도 손꼽는 협상의 명수이자, 명사수, 폭발물 전문가, 최고의 작전가이기에 경찰 수뇌부는 협상이냐 초기진압이냐를 놓고 갈등을 벌인다. 게다가 범행동기는 자신들의 치부인 경찰 내부의 비리고발이라고 하지 않은가. 대니는 자신이 인질로 붙잡은 니바움 경감부터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신문을 한다. "범인은 대니 로먼 당신"이라고 주장하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심증은 가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애를 태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질범이 된 대니가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누명을 호소하기 위해 성직자를 불러달라는 게 아니라 뜻밖에도 타 경찰서의 인질협상 전담인 크리스 세비안(캐빈 스페이시)이다. 인질사건의 현장에서 이틀이고 사흘이고 끈질기게 범인과 협상을 벌여 사상자를 내지 않기로 유명한 크리스도 집안에서 모녀간의 대립을 해결하는 데는 서투르다.
사건 현장에 달려온 크리스는 "나에게 범인과의 협상을 맡기려면 지휘권(authority)을 넘겨달라"고 요구한다. 경찰국장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 받은 크리스 세비안은 대니와 협상을 벌이기 위해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는 18층으로 올라간다. 동료들의 배신으로 '믿을 수 있는 건 이방인(stranger) 뿐'이라는 대니와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인질의 안위이지 범인의 결백 입증이 아니다'라는 크리스 사이에 불꽃 튀기는 신경전이 벌어진다. 이 두 사람의 연기가 이 영화의 긴장도를 한층 고조시킨다.

인질로 잡은 여직원으로부터 니바움의 개인 파일(디스켓) 소재를 알아낸 대니는 컴퓨터를 작동하기 위해 18층에 대한 전력 공급의 재개를 요구한다. 그 대신 인질 중의 한 명인 반장이 풀려난다. 그리고 폭풍과도 같은 경찰특공대(SWAT)의 무력진압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크리스는 좌절하고 경찰특공대원마저 포로로 붙잡은 대니는 기세를 올린다.
협상은 벌어지고 있지만 조바심이 나는 것은 비리에 연루된 경찰관들이다. 이들은 18층의 환기통 닥트로 침투하여 우선 증거물인 컴퓨터부터 파괴하려 든다. 이어 총격전이 벌어지고 경찰의 협상 과정을 지켜보던 FBI가 이 사건의 강제진압을 위해 전면에 나선다. 세비안은 인질사건의 협상에서 손을 떼야 하지만 다시 18층으로 올라가 특공대의 침투작전 틈을 타 대니를 연방청사 밖으로 빼돌린다. 그 역시 경찰관으로서 복잡하게 얽힌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야 할 책무를 느꼈기 때문이다.

니바움의 집으로 가서 컴퓨터에 수록된 나머지 증거를 파악한 대니와 크리스는 현장에 출동한 비리사건의 주범인 반장과 맞닥뜨린다.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크리스는 대니를 총으로 쏘아 쓰러뜨리고 반장더러 보훈기금에서 횡령한 돈을 나누어 갖자고 제의한다. 범행증거물인 컴퓨터 디스켓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반장은 40%를 크리스에게 주기로 약속한다. 집을 포위하고 있던 경찰에게 반장은 이 사건의 주범 대니 로먼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외친다. 그러나 그를 에워싼 경찰들은 냉담하다. 집안에서 이루어진 반장과 크리스 세비안과의 협상이 경찰 무전기를 통해 낱낱이 중계방송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머리를 쏘려던 반장은 경찰의 총격을 받아 자살이 미수에 그치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대니는 크리스의 부축을 받고 걸어 나온다.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명예(경찰 뱃지)가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감상의 포인트

주인공 대니 로먼 경위는 호랑이 새끼를 잡기 위하여 스스로 인질범이 되는 정공법을 택하였다. 이것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격이었지만, 아직 적군(敵軍)이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였고 믿을 만한 우군(友軍, 크리스 세비안)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승산이 있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S그룹의 회장도 그가 사회적 명망과 부를 장악하고 있었을 때 자신의 과오를 자백하고 당국의 선처를 바랬다면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빼앗기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비슷한 시기에 그보다 적지 않은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았던 다른 재벌 총수는 약간의 벌금만 물고 풀려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가 사법처리된 후에 분하다고 적장을 낙마시키는 정공법을 택한 것은 말 그대로 자살행위였다.)

다른 하나는 같은 법 집행자(law enforcer)로서 자신의 누명을 해명할 수만 있다면 그 과정에서 스스로 인질범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 편이 신속하고 효과적이라는 계산도 작용했다는 점이다. 만일 대니가 재판을 통하여 자신이 결백함을 입증하고자 했다면 경찰 조직내의 직위나 인적·물적 자원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적들을 이길 수 없거나 승소하더라도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 '상처뿐인 영광'에 그쳤을 공산이 크다.

이와 같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하여 새로운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경우 우리 나라나 미국의 형법에서는 이것이 정당방위(正當防衛, self-defense)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검토하게 된다. 원칙적으로 법은 개인의 자구행위(自救行爲)를 인정하지 아니하므로 부득이한 경우에만 엄격한 요건하에 이를 허용하게 된다.
우리 형법 제21조 제1항은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라 하여 정당방위를 위법성 조각사유로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법익(法益)'이란 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이익을 말하며, 개인적 법익에 한하지 않고 사회적 법익, 국가적 법익도 포함한다. 또 '현재'란 침해가 목전(目前)에 절박해 있거나 현시(現時)에 행하여지거나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부당한'이란 객관적으로 위법이면 족하고 침해자가 유책임을 요하지 않는다. '침해'란 법익에 대한 공격으로서의 사람의 행위를 말하며, 작위든 부작위이든 불문한다. 그리고 방위행위는 그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는 방위의사를 필요로 한다. '상당한 이유'란 방위행위가 당해 침해행위에 상당하는 것이라야 된다는 의미이다.

미국에서는 우리 나라보다 정당방위를 다소 넓게 인정한다. 타인의 행위로 인하여 자기의 생명, 신체에 중대한 위험이 가해지는 개인이 자기방위를 위해 합리적으로 필요한 실력을 행사하는 것은 미국법에서도 정당한 행위로 본다. 그러나 상대방의 공격가능성을 예상하고 만일 공격이 가해지면 반격을 할 작정으로 이를 준비하는 경우, 상대방이 반드시 공격할 것으로 생각되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이에 선제공격을 가하는 경우에도 정당방위가 성립한다.

이 영화에서 대니가 인질을 잡고 경찰과 무력으로 대치한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이지만 같은 경찰내의 상사나 동료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처벌받게 하려는 것에 대하여 그러한 행동을 하였다면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살해하였다면 과잉방위가 되어 처벌을 피할 수 없으므로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를 죽이려 하였던 반장에게서 총뿌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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