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The Thomas Crown Affair, 1999)

Whitman Park 2022. 2. 15. 09:25

OECD 가입으로 명목상의 선진국이 된 우리 나라에도 영국의 '프로퓨모-킬러 스캔들', 프랑스의 '롤랑 뒤마-크리스틴 드비에 종쿠르 스캔들' 못지 않은 스캔들이 떴다. 구 정권의 국방장관을 지낸 인사와 미모의 미국 방산업체 로비스트 린다 김이 벌인 스캔들이 은밀한 사적인 연서(戀書)까지 신문지상에 공개되면서 화제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중년 남녀의 사랑은 "월광(月光)에 바래면 로맨스가 되고 햇빛에 바래면 스캔들"이 된다고 했던가. 얄궂게도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인터넷 상에는 'Loveletter for You'라는 신종 e-메일 바이러스가 전세계적으로 급속히 유포되어 PC 기능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중년 남녀라 해도 그것이 윤리적으로 비난받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지 아니한다면 아름다운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최근 비디오로 출시된 20세기 폭스 영화사의 1999년작 로맨스 스릴러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The Thomas Crown Affair)는 1968년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뒤늦게 찾은 중년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 점에서 오늘의 '린다 김 스캔들'과 대비가 된다. 영어 상으로도 'love affair'라 하면 남녀간의 건전한 사랑 이야기이지만, 'scandal'이라고 하면 돈, 권력, 섹스를 둘러싼 추문이라는 용례 상의 차이가 있다.

 

영화의 줄거리

토마스 크라운(피어스 브로스닌)은 뉴욕에서 M&A 부티크를 경영하는 인베스트먼트 뱅커이다. 소문난 미술애호가이기도 한 그는 M&A 거래를 하는 사이사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그가 점 찍어놓은 작품을 감상한다. 미술관 소장품은 애당초 거래가 불가능한 만큼 M&A 거래와는 다른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 감쪽같이 훔칠 음모를 꾸미는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작품은 1억달러를 호가하는, 모네가 1908년 베네치아를 여행할 때 그렸던 '황금빛 저녁놀에 싸인 베네치아 궁전'(Venice in Twilight)이다.

이날 미술관에는 유럽에서 탁송된 커다란 나무상자가 콘테이너에 실려 온다. 화물의 정체가 불명인 채로 지하창고에 입고된 나무상자가 안으로부터 열리고 첨단 장비로 무장한 전문절도단이 활동을 개시한다. 그들은 삼엄한 보안시설을 피해 지하실의 냉방설비를 무력화시킨다. 이튿날 미술관 경비원 복장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폐관시간도 되기 전에 관객들을 인상파 회화 전시실에서 내보낸다. VIP가 방문하기 전에 청소를 해야 한다는 구실이다. 곧이어 헬리콥터가 미술관 상공으로 날아오고 혼잡한 틈을 타서 토마스는 모네의 그림을 떼어내 가방에 넣고 유유히 사라진다.

뉴욕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여 법석을 피우는 사이 미술관측에 보험금을 지급해야 할 보험회사에서도 조사관을 급파한다. 캐서린 배닝(르네 루소)은 폐쇄회로 TV 녹화필름을 검토하면서 맥칸 형사반장(데니스 리어리)이 간과한 중요한 사실을 찾아낸다. 범인이 열감지 감시카메라가 작동불능 상태에 이르도록 실내온도를 10℃ 이상 올려놓은 점, 전시실 벤치 밑에 온도조작용 가방을 숨겨놓고 비상 방화문이 닫히지 않도록 20톤 하중에도 견디는 티타늄 삼소나이트 가방을 받혀놓은 점, 범인은 루마니아계 전문절도단에게 일을 맡길 정도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자본가이자 무엇보다도 최근 미술품 시장에서 모네 작품에 열을 올린 미술품 콜렉터라는 점 등을 제시한다.

이상의 조건에 딱 들어맞는 사람은 부유한 금융가 토마스 크라운이다. 캐서린은 10만달러짜리 경주용 요트가 망가져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그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리셉션에서 일부러 그에게 접근한다. 크라운이 모네 작품의 분실을 안타까워 한 나머지 같은 인상파 작가인 피사로의 수채화를 미술관에 기증한 것을 감사히 여기고 미술관이 베푼 리셉션 자리이다.

캐서린은 자신의 신분을 당당하게 밝히고 당신의 소행임을 알고 있으니 모네의 그림을 돌려보내라고 말한다. 아울러 자기는 그림을 회수하면 보험금의 5%를 보상금(bounty)을 받게 되므로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밝힌다. 토마스는 정신과의사(카운슬러로 분한 페이 더너웨이는 1968년 원작에서 스티브 맥퀸과 공연을 하였음)를 찾아가 권태로움을 벗어나려다 스트레스 받을 일에 봉착하였다고 말한다. 한편 캐서린은 맥칸 반장으로부터 용의자와의 사적인 대화는 삼가도록 경고를 받는다.

토마스가 모네 그림을 집안에 숨겨놓았을 것으로 짐작한 캐서린은 토마스의 집에 들어갈 궁리를 한다. 우선 그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고 냉방이 잘 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소매없는 원피스를 입고 추위에 떠는 척 하면서 그의 웃옷을 자연스럽게 받아 걸치고는 토머스의 열쇠를 복제하기로 한다. 그리고 자기는 바로 옆자리의 고호 그림이 더 탐난다고 말한다. 뉴욕의 최고급 식당에서 최고급 포도주를 마셔가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토머스는 웬지 그녀에게 마음이 쏠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튿날 아침 토마스의 아파트가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복제한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캐서린 일행은 모네의 그림을 발견하지만 경찰서에 들고와 보니 매우 정교한 복제그림인 것으로 밝혀진다. 캐서린은 불법으로 주택을 침입한 데다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림을 들고 나온 셈이 되어 난처한 지경에 빠진다.

 

캐서린은 디스코텍에서 매력적인 젊은 여성과 춤을 추는 토마스에게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받을 수 있는 5백만달러를 생각하며 그와 정사(情事)를 갖는다. 이튿날 아침 그와 식사를 함께 하는 순간에도 그림 회수의 노력을 포기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녀에게 허점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긴장감과 함께 연정(戀情)을 느끼는 토마스는 이러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글라이더 활공과 카리브해 휴가를 제의한다.

두 사람은 다정한 연인처럼 카리브해(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제도)로 가서 둘만의 해방된 시간을 즐긴다. 토마스가 소중하게 여기는, 혹시 모네의 그림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나무상자를 캐서린은 하찮은 물건인 양 모닥불 속에 던져 넣는다. 불 속에서 꺼낼 생각도 안하고 르노아르 그림이 들어있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토마스와 주말을 보내고 뉴욕에 돌아온 캐서린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림을 찾겠다는 집념을 불태운다. 형사반장은 바람둥이 토마스와 놀아나는 캐서린이 미덥지 못하다.

이 때 뉴욕 경찰서에는 유력한 단서가 포착된다. 보험회사가 갖고 있는 그림 테두리의 무늬와 모조품의 테두리가 일치한다면 그가 범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인리히 너츠혼'이라고 알려진 명화 위조범은 미국의 교도소 안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의 아들이 그림을 위조한 것인가? 그리고 토마스와의 커넥션은?

그림을 되찾아 거액의 보상금을 타내겠다는 일념으로 토마스를 밀착 조사하는 가운데 연정을 품게 된 캐서린은 토마스도 과연 그녀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바로 이 영화의 주제가("The Windmill of Your Mind")인 풍차 같은 여자의 마음이다. 맥칸 반장은 그녀 심경의 변화를 알아채고 "중도에 사건을 포기할 줄 알았다"고 말한다. 캐서린은 토마스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뉴욕을 떠날 것이라 짐작하고 그의 아파트로 달려간다. 집사의 제지를 뿌리치고 그의 침실에 가보니 디스코텍에서 만났던 젊은 여자가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다. 배신감을 느낀 캐서린은 토마스의 집에서 뛰쳐나온다. 토마스는 그녀에게 "모네 그림은 제 자리에 걸어놓겠다. 경찰을 데리고 오든 말든 알아서 하라. 맨해튼 남단 배터리 파크의 헬기장에서 당신을 기다리겠다"는 말을 전한다.

캐서린은 토마스를 잃었다는 아픈 가슴을 안고 토마스가 모네 그림을 돌려주기 위해 미술관으로 찾아오기로 했다고 형사반장에게 일러준다. 당일 미술관에는 30여명의 형사들이 물샐 틈 없이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다. 과연 중절모를 쓴 토마스가 나타났으나 미술관에는 중절모를 쓰고 가방을 든 신사가 순식간에 수십 명으로 불어난다. 수사관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인상파 회화 전시실에는 화재경보가 울리고 천장에서는 스프링쿨러가 물을 뿜기 시작한다. 그 사이 피사로의 수채화는 물에 씻겨 나가고 모네의 그림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신 캐서린이 원했던 그림은 비어 있다. 토마스가 캐서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훔친 것이다. 캐서린이 배터리 파크 헬기장으로 뛰어갔을 때 중절모를 쓴 낯선 신사가 문제의 그림을 전해준다. 토마스가 만나던 젊은 여자는 바람을 피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명화 위조술을 써먹고자 그가 양성했던 '티롤 안나 너츠혼'이었던 것이다.

토마스가 전해준 그림을 경찰에 보내라 이르고 런던행 비행기에 오른 캐서린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해준 남자를 잃었다는 비탄에 빠져 흐느껴 운다. 토마스가 상담하던 정신과의사의 "피터팬이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조언은 바로 그녀 자신에 해당된 말이었다. 그런데 뒷좌석의 신사가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 온다. 바로 토마스 크라운이었다.

 

* 스티브 맥퀸, 페이 더너웨이 주연의 오리지널 Thomas Crown Affair (1968)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중년 남녀의 러브 어페어이고 고가의 미술품을 소재로 했어도 서로가 장삿속으로 만난 게 아니므로 추해 보이지 않는다. 1968년도 전작(前作)이 은행강도를 다룬 데 비해 좀더 고상하게 미술품 절도를 소재로 하였다. 형사반장이 토마스를 찾아가는 캐서린에게 말한 것처럼 "고가의 미술품이란 돈있는 사람들이 서로 가치를 부풀려가며 거래하는 것"이기에 생사의 문제로 서로 죽이고 훔치는 사건을 다루는 형사에게는 맞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시가 1억달러의 모네 그림을 훔친 후 며칠 후 피사로의 수채화로 덧칠한 진짜 모네 그림을 그 자리에 걸어놓도록 기증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모네 그림의 점유를 며칠간 가로챈 것일뿐 그림의 소유권을 완전히 침해한 것은 아니다. 우리 형법의 해석상으로는 이것을 '사용절도'라 하여 절도죄(형법 329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통설과 판례의 입장이다. 절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물건을 무단 사용함으로써 "물건 자체가 가지는 경제적 가치를 상당한 정도로 소모하거나, 사용후 본래의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버리거나 곧 반환하지 아니하고 장시간 점유한 때에는 소유권 또는 본권을 침해할 의사가 있다"(대판 1992.4.24 92도118)고 보아 불법영득(不法領得)의 의사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사건에서는 토마스 크라운에게 그러한 주관적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토마스 크라운의 두 번째 절도행각도 해당된다. 비록 미술관에서 감쪽같이 그림을 훔쳐냈지만 사건관계자에 의해 그 다음날 정확히 반환되었으므로 역시 절도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맥칸 형사반장은 굳이 사건수사에 나설 의향이 없음을 캐서린에게 비친 것이다.

이 문제를 영미법에서는 어떻게 다룰까. 미국법(common law) 상으로는 절도의 의사로 타인의 재물을 절취하였을 때 'Larceny'(절도죄)가 성립한다. 다시 말해서 타인의 재물 위에 지배를 설정(possession)하고 장소적으로 이동(asportation)하는 것, 그리고 소유자에게 피해를 주게 됨을 인식하는 것(anumus furandi)을 요건으로 한다. 주관적 요건은 권리자를 배제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는 이득의 의사(lucri causa)와는 다르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주인공은 미술관 측을 일시 혼란에 빠뜨리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당해 미술품으로부터 소장자를 배제하려는 의사는 없었으므로 절도죄로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의 본업인, 타인이 멀쩡하게 경영해온 기업을 주식을 더 많이 매집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인수(hostile takeover)하는 것이 오히려 '당해 기업으로부터 경영진을 배제하는 기업절도'에 해당한다는 생각도 든다. 뉴욕의 쟁쟁한 변호사들이 변론에 나선다면 토마스 크라운은 절도의 의사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 석방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에서는 명예훼손죄(libel and slander; 우리 형법 307조 2항)도 문제될 수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로케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인상파 회화에 관한 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보다 더 값진 소장품을 자랑하는 이 미술관이 허술한 보안시설과 미술품을 훔친 자에게 감사의 리셉션을 열어준 것 등으로 관객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미술관 측이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미술관의 명예와 평판(reputation)을 해쳤다"고 이 영화의 제작자와 감독(감독은 '다이 하드'로 유명한 존 맥티어난이며, 피어스 브로스넌은 공동제작자로 참여)을 고소할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이러한 사태를 우려한 나머지 이 영화는 끝나기 무섭게 "이 영화는 특정 미술관의 승인을 얻어 그 내부에서 촬영한 것이 아니며, 이 영화의 스토리는 완전한 허구이고(fictitious) 우연히 일치하는 것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현실의 상황을 방불케 하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사용하는 안전장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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