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우리 영화는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등이 2백만 명이 훨씬 넘는 관객을 동원하고 해외에도 수출되는 등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홍콩, 대만을 포함한 중국의 영화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 국제성을 획득하고 전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 것이 2001년초에 골든 글로브 감독상과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대만 출신 리안(李安, Ang Lee) 감독의 <와호장룡(臥虎藏龍)>(Crouching Tiger and Hidden Dragon: 영웅과 전설은 숨어 있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얼핏 보기에 그렇고 그런 중국 무협영화인 것 같다. 눈조차 따라가기 어려운 손·발동작과 칼 솜씨, 지구의 중력을 무시하고 날아다니는 듯한 무예의 대결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여느 무협영화와는 다른 스토리 전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영화의 줄거리
19세기 초 중국에서는 武林의 고수들이 청명검이라는 천하의 보검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청명검 때문에 스승이 암살을 당하자 무술에 환멸을 느낀 이무백("리무바이", 周潤發)은 옛 찬구의 약혼녀이자 무술의 고수인 유수련("수련", 楊紫瓊)에게 칼을 맡기고 "이 보검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말과 함께 베이징에 있는 사부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이 집에 놀러온 고관과 그의 딸 옥교룡("용", 章子怡)은 서재에서 청명검을 구경하는데 곧 시집을 간다던 용이 보검을 몹시 탐낸다. 수련은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결혼을 하는 용이 측은하여 의자매를 맺는데 며칠 후 서재에서 청명검을 훔쳐내는 도둑의 뒤를 쫓다가 그가 범상치 않은 무술을 지녔고 그가 피신한 저택이 고관의 집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고관의 저택 주변에서는 지방에서 파견 나온 감사관이 24시간 감시를 벌이고 있는 것도 알게 된다. 그 집에 범죄인이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수련은 이 집에 살고 있는 용과 그녀의 보모를 수상쩍게 여긴다. 아니나 다를까 용은 변방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가다가 그녀를 납치한 마적의 두목인 나소호("호", 장진)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그녀의 무술을 눈여겨본 파란여우(리무바이의 스승을 죽인 여자 고수)가 보모를 자청하고 그녀에게 무예를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리무바이가 베이징에 오면서 무림의 고수들이 화려한 무예의 대결을 펼치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결혼식을 며칠 앞둔 용에게 호가 나타나고, 용은 청명검을 다시 훔쳐 달아나고, 그녀를 쫓던 리무바이는 파란여우의 독침에 맞아 쓰러지고, 호는 리무바이와 수련의 도움으로 피신하여 용과 사랑을 이루려는 찰나 용은 청명검을 쫓아 벼랑 아래로 몸을 던진다. 이 영화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자 이 같은 허무한 결말 때문에 원작 소설에 따라 속편을 나올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하였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20세기 초에 출간된 왕두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왕두루는 몰락해 가는 청나라 지도자들과 도학자(道學者, 도교론자)들의 가치규범을 내세우며 '우슈'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무술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이를테면 무술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영웅적인 행동을 집대성한 것인데, 이안 감독은 우슈를 기본으로 '와호장룡'을 만든 것이다. 이안은 서양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그의 전작인 '센스 앤 센서빌리티'(Sense and Sensibility)의 武俠버전이라는 말을 곧잘 했는데, 연출자가 단순치 않아 보이는 무협영화 '와호장룡'을 통해 전달하려고 한 그 '무엇'을 이해하자면 '센스 앤 센서빌리티'가 무슨 영화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理性과 感性)은 영국의 여성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의 동명 소설을 각색, 영화화한 것이다. 이 영화 역시 1996년 골든 글로브 최우수작품·각본상, 뉴욕비평가협회 최우수 감독·각본상을 받은 데 이어 제4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7개 부문에 걸쳐 후보에 올랐던 제68회 아카데미에서는 각색상(엠마 톰슨)만을 수상했다.
19세기 초 영국의 부유한 귀족 대쉬우드가 죽자 여자 상속을 불허한 당시의 법률에 따라 모든 재산은 전처의 아들 존이 상속하게 되고 대쉬우드의 미망인과 세 딸은 하루아침에 무일푼의 신세로 전락한다. 이를 염려한 대쉬우드는 죽기 전에 외아들 존에게 네 여자를 간곡히 부탁하지만 심약한 성격의 존은 모친과 아내의 압력에 못 이겨 그들을 외면하고 만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의 맏딸 엘리노어(엠마 톰슨), 정열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둘째딸 마리안(영화 '타이타닉'으로 대스타가 된 케이트 윈슬렛), 말괄량이 막내딸 마가렛(에밀리 프랑소와) 앞에 세 명의 남자가 나타난다. 엘리노어를 사로잡은 남자는 성실해 보이는 에드워드 페라스(휴 그랜트)였는데 그는 아버지 전처의 동생이고, 이미 약혼한 몸이었다. 에드워드는 런던으로 떠나고 엘리노어는 슬픔에 잠기지만 동생들 앞에서 애써 태연한 척 한다. 마리안은 산책을 하다가 폭우 속에서 다리를 다치는데 그녀를 구해준 멋장이 청년 윌러비(그렉 와이즈)와 열애에 빠진다. 무뚝뚝한 신사 브랜든 대령(릭 맨) 역시 마리안에게 진지한 애정공세를 펼치지만 마리안은 윌러비가 떠나고 난 후에야 그의 사랑을 알아챈다. 이들 세 남자와의 만남을 통해 엘리노어와 마리안은 자신들의 지성과 감성이 조화롭게 갖추어졌을 때라야 진정한 사랑에 이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와호장룡'을 보면 전혀 새로운 스토리라인이 드러난다. 무예의 경지에 도달한 리무바이와 친구의 약혼녀인 수련은 서로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내색을 못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낸다. 중년에 이른 두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때에는 이미 늦었다. 리무바이는 그를 흠모해온 수련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집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준 장쯔이가 분한 용이다. 부모가 강권하는 결혼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분방한 틴에이저이다가, 무술을 위해서라면 밤도둑도 서슴치 않는 프로였다가, 신분과 제도를 뛰어넘은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연인이었다가 한다. 마치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여주인공들을 중국을 무대로 하여 다시 보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특히 서양의 관객들을 매료시킨 것은 뛰어난 영상미이다. 한밤의 베이징 도심에서 기와지붕을 타고 쫓고 쫓기는 추격 신('레드 코너'에도 나오는 한 장면이다), 그랜드 캐년을 능가하는 실크로드 西域의 황량한 풍경, 동양화에나 나올 법한 안개 낀 대나무 숲에서 두 사람의 고수가 벌이는 칼싸움 대결(와이어 액션과 컴퓨터 그래픽을 합성한 백그라운드는 어느 서부극에서도 볼 수 없는 명장면이다), 그리고 가끔씩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현란한 액션 장면이 그것이다.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영상미 넘치는 장면들을 볼 때 이 영화에서 청명검을 둘러싼 법률 이야기는 하찮은 소재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리무바이가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청명검의 소유권이 과연 누구에게 속하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리무바이가 소유권을 포기한 상태에서 "천하의 보검을 휘두를 자격이 있는 인품과 실력을 갖춘 자만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용은 무술 실력만으로는 청명검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인품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사회의 법은 누구의 소유인지 가리는 데 관심이 많지만 무림(武林)의 세계에서는 그와 다른 기준에 의하여 권리의 귀속이 결정되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피상속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여성의 재산상속을 인정하지 않았던 영국의 법률제도가 제인 오스틴의 비웃음을 샀던 것처럼 법률도 회사, 단체, 가정 등 공동체의 자율적인 의사결정은 가급적 존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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