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빼미의 성(梟の城, 1999)

Whitman Park 2022. 2. 16. 09:55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엮어 만든 소설이나 영화는 일단 성공의 보증수표라고 한다. 근대의 문턱에 선 주인공들의 독특한 개성과 사건의 전개가 오늘날에도 매우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2000년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올빼미의 성>(감독 시노다 마사히로)은 도쿠가와가 도요토미를 제거하기 위해 은밀히 자객을 찾고 있을 때 10년 전 오다에 의해 동족이 몰살 당한 원수를 갚고자 그 부름에 응한 닌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바 료타로(1923∼1996)가 1958년 신문에 연재하였던 <올빼미의 성(梟の城)>은 당시 '낙양(洛陽)의 종이값(紙價)'를 올린 소설이었다. 일본 영화 개방 폭이 커지면서 국내에 소개될 수 있었던 같은 이름의 이 영화는 일본에서는 흥행에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SFX 영화이다. 웅장한 성채는 모두 컴퓨터 특수효과로 재현된 것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임진왜란 전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집단학살과 복수, 용서와 화해라는 묵직한 주제를 스틸 사진 같은 아름다운 화면 속에 담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

일본의 이가(伊賀) 지방은 험준한 지세로 인하여 중앙 정치무대에서 밀려난 귀족, 무사들이 숨어 지내며 무술을 연마하고 권토중래를 꿈꾸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두 눈만 내놓은 검은 장속(裝束) 차림으로 발소리를 죽이고 돌아다니며 첩보활동을 벌이고 암살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가 닌자(忍者)'들의 불순한 움직임은 전국(戰國)의 통일을 꿈꾸던 실력자 오다 노부나가의 우려와 분노를 사게 되었다. 마침내 오다는 1581년 9월 5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이가 지방의 닌자 부락을 소탕할 것을 명했다. 이가의 닌자 족속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죽임을 당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신분을 숨긴 채 복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았으나 그의 라이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호시탐탐 그의 실각을 노리고 있다. 1591년 8월 도요토미는 노년에 얻은 아들 스루마쓰가 사망하자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굴다가 다음달에는 번주(藩主)들에게 군대를 모아 조선에 출병할 것을 명령한다. 크게 실망한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에 반대하는 사카이(堺) 상인들을 움직여 도요토미의 암살을 사주하기에 이른다. 당시 사카이 상인들은 네덜란드 상인들로부터 서양문물을 수입하는 등 해외무역에 종사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하카다 상인들에게 상권을 빼앗긴 처지였다.

히데요시 암살이라는 밀명을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은 이가의 닌자 중에서 뛰어난 무술을 자랑하던 쥬조였다. 그는 대학살 이후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 불상(佛像)을 새기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쥬조는 오다에게 복수하려 하였지만 오다는 죽고 그의 자리를 도요토미가 차지한 것을 알았다. 쥬조는 오랜 수도생활을 하면서 도요토미를 암살한들 또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터이니 복수는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하지만 누가 히데요시 암살을 지령하였는지 알고 싶어 도요토미가 거처하는 나라(奈良)로 떠난다.

히데요시의 궁이 있는 쿄토(京都)까지 간 쥬조는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고 그가 할 일에 관하여 고민한다. 그에게 접근해온 정체불명의 여인 오하기는 몰락한 명문 귀족의 딸로서 상인 쇼쿠의 양녀라고 하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사하는 사람이다. 도쿠가와의 밀명으로 움직이는 사카이 상인, 잠행 중인 닌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터에 도심에서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 어릿광대 곡예사도 대부분 닌자 출신이다.

 

그 무렵 쿄토에는 무술이 뛰어난 무관이 등장하여 닌자들의 어설픈 칼솜씨로는 싸움질이든 도적질이든 그의 단속에 걸려들고 만다. 쥬조는 무관의 정체가 닌자 시절 그의 라이벌이었던 고헤이임을 알아챈다. 경비가 삼엄한 도요토미 궁의 기와지붕 위에서 재회한 그들은 누가 누구를 설득할 계제가 못된다. 쥬조는 쥬조 대로, 고헤이는 고헤이 대로 삶의 목적과 명분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고헤이는 히데요시의 막료인 마에다家 소속 무사로서 닌자라는 신분을 숨긴 채 실력만으로 출세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도요토미가 말년에 연극에 심취하자 쥬조는 연극 무대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암살을 결행할 계획을 세우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시간은 흘러 1592년 3월 도요토미는 宮을 쿄토에서 나고야(名古屋)로 옮기고, 4월에는 조선 출병을 명한다. 방어 태세가 덜된 조선군을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던 왜군이 조선의 수군과 의병들에 협공에 시달리는 사이 오사카에 거처하는 도요토미에게 후계자가 태어난다는 낭보가 전해진다. 이 소식을 들은 토쿠가와는 히데요시 암살 계획을 철회하고 그 바람에 극비사항을 알고 있던 쥬조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에 쥬조는 나름대로 야심한 시각에 히데요시의 궁에 침투할 계획을 세운다. 무술은 둘째치고 나침반 없이는 끝없는 공포의 미로 속에서 방향을 잃어버릴지 모른다. 용케도 도요토미의 침소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 쥬조는 잠에서 놀라 깨어난 히데요시를 보고 "내가 누구더냐" 하고 물어본다. 그를 시해하는 대신 주먹 한 방을 먹이고 빠져 나온 쥬조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고헤이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데 정작 경호대에 붙잡힌 것은 고헤이이다. 그의 주군인 마에다가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하자 그는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끓는 기름솥에 빠뜨려진다. 그리고 쥬조와 오하기는 먼 곳으로 함께 떠난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비록 봉건시대의 권력자일망정 한 부족을 지상에서 말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을 범하는 것이며, 누대에 걸쳐 복수의 악순환을 불러오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가 닌자의 대표격인 쥬조는 10년 동안 불상만 조각을 한 것이 아니라 증오와 복수의 감정을 그의 마음속에서 깎아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도요토미의 침소에 들어가 한낱 힘없는 노인에게 주먹 한 방만 먹이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쥬조 대신 도요토미 암살미수범으로 붙잡힌 것은 동족을 희생시켜 가며 출세의 야심을 불태웠던 고헤이였다.

 

과거의 멍에를 벗어 던지지 못하고 광분하다가 역사의 제물이 된 인물로서는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대표적이다. 마찬가지로 발칸 반도의 수백 년 묵은 인종적 갈등을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pogrom, holocaust)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감행한 밀로셰비치(Milosevic)도 그 못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유고연방 대통령으로서 10년 재임하는 동안 코소보 지방에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추방하고 살상하고 재산을 약탈하는가 하면 세르비아계 군인들을 시켜 조직적으로 알바니아계 부녀자들을 능욕(신분청소)하게 하였다. 밀로셰비치는 집권과정에서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세르비아인들의 반감을 교묘히 선동하고, 능수능란한 언론플레이를 통해 이를 합리화하는 등 이른바 'TV 독재'를 펼친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1999년 현직 국가원수임에도 불구하고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ICTY)에 기소되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NATO 연합군의 공습에도 건재하였던 밀로셰비치는 2000년 9월 말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선에 패배하고 시민혁명에 의하여 권좌에서 쫒겨났다. 급기야는 지난 4월 초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대량학살과 반인륜 범죄 혐의이다. 그러나 세르비아 당국은 밀로셰비치를 ICTY에 인도하지 않고 권력남용·부패 혐의로 국내에서 사법처리할 방침이다.

유고 사태를 계기로 많은 나라 지도자들이 1998년 7월 로마에 모여 조약을 체결하고 대량학살(genocide), 전쟁범죄(war crimes), 반인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를 저지른 자를 처벌할 목적으로 국제전범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ICC)를 설립하기로 합의하였다. 60개 국가가 이를 비준하는 대로 2002년 초쯤 발족하게 된다. ICC는 국제법상으로 강력한 기구이지만 소급하여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구 유고 지역의 전범을 처벌하기 위한 ICTY가 관련국의 협조를 얻어 전범을 재판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현재 미국과 EU는 유고 연방정부에 경제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밀로셰비치 일당을 ICTY에 인도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현재 UN의 주도로 국제전범재판소의 설립이 추진되는 지역은 내란이 휩쓸었던 시에라 레온과 킬링 필드로 유명한 캄보디아 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지 얼마 안되어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찾게 되었다. 겨레의 집과 여러 기념관을 차례로 관람하는 동안 한 무리의 일본 학생들과 마주쳤다. 한국에 수학여행을 온 일본 고등학생들이 마침 민비 시해의 장면을 보여주는 비디오 전시장에서 여행 가이드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었다.

명성황후의 시해에 가담한 낭인(浪人, 일본말로는 '로닌')들도 결국 이 영화 속의 닌자들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저 일본 학생들은 우리가 "일제는 조선 침략을 위해 국모(國母)까지 시해하다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닌자들은 독립자행(獨立自行)하는 사람들이라 어느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았다"고 우기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밀로셰비치를 축출하기 위해 NATO 공군기들이 4개월에 걸쳐 대규모 공습을 감행―말하자면 국제사회에서 일본 군부의 종군위안부 소집을 비난―했음에도 밀로셰비치는 오히려 이를 기화로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온 국민을 결속시키고 권력을 강화―최근 일본 사회의 右傾化 현상―하였던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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