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냉전 체제가 무너지면서 강대국의 첩보전은 국지분쟁, 마약, 산업 스파이 사건으로 옮겨가는 듯 하다. 이에 따라 헐리웃의 액션 영화도 SF 가상무대 아니면 체첸 반군(<에어포스 원>, <피스메이커>), 마약 문제(<긴급명령>, <트래픽>), 산업 스파이(<네트>, <엔트랩먼트>) 이야기를 즐겨 다루고 있다. 종전에 맹활약하던 첩보요원, 수사관, 특수부대 장병들도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고 있다 한다.
<돌로레스 클레이본>, <데블스 애드버킷>을 연출한 테일러 핵포드 감독이 잡지기사(Vanity Fair, "Adventures in the Ransom Trade")를 읽고 영화로 만든 <프루프 오브 라이프(Proof of Life)>는 탈냉전 시대에 몸값을 노린 조직적인 납치(kidnap and ransom: K&R)가 성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도 IMF 위기 이후 고급차를 몰고 다니는 등 돈이 있어 보이는 남녀를 노린 납치극이 심심찮게 발생함에 따라 보안 및 경호업체들이 성업중이다.
영화의 줄거리
영국군 SAS 요원 출신인 테렌스 쏜("테리": 러셀 크로우)은 루탄 리스크라는 보험회사에서 인질협상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영국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납치범들에게 붙잡힌 인질이 되도록 적은 비용으로 살아서 석방되도록 보장하는 것이 주된 업무이다.
테리가 최근에 성사시킨 건은 러시아군을 따돌리고 작전을 벌여가며 체첸 반군에 납치된 프랑스 기업인을 그들이 요구한 5백만달러 대신 75만달러에 석방되게 한 일이었다. 이 회사는 지난 2년간 12건의 납치사건을 처리하면서 보험료수입 28백만달러, 지출 26백만달러로 짭잘한 이익을 올리고 있다.
이때 남미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소국 테칼라(이 영화의 로케 장소는 에쿠아도르이지만 ELT 같은 게릴라의 준동은 없다)에서 고객기업의 미국인 엔지니어가 반정부 게릴라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테리가 현지에 급파된다. 미국의 석유회사 콰드 카본의 기술부장 피터 바우만(데이빗 모스)은 테칼라의 안데스 협곡에서 홍수 방지용 댐 건설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것은 표면상의 프로젝트이고 콰드 카본은 실제로는 게릴라 점령지역을 통과하는 송유관 건설을 추진 중이나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해 있다.
아프리카, 이집트, 태국 등지로 다니며 건설공사를 수행해 온 피터는 어느 날 회사로 출근하는 길에 반정부 게릴라 단체(ELT)에 납치되고 만다. ELT 게릴라들은 피터의 신분을 알아낸 후 그를 깊은 산 속의 캠프에 숨겨놓고 몸값 3백만달러를 요구한다. 그러나 옥타놀과의 합병을 논의하는 콰드 카본으로서는 돈이 많이 드는 임직원들의 납치(K&R) 보험을 이미 해지한 상태이다. 따라서 회사측은 루탄 리스크에서 파견된 테리에게 인질협상을 의뢰할 수 없다고 말하고, 현지 보안책임자에게 일처리를 맡긴다
인질구조 전문가인 테리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었던 피터의 아내 앨리스 바우만(맥 라이언)은 회사가 남편의 석방교섭을 별로 미덥지 못한 현지 보안책임자에게 맡기기로 했다고 하자 당황해 한다. 런던으로 돌아간 테리는 애절하게 호소하던 앨리스에게 이끌린 나머지 개인 자격으로 작업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테칼라로 돌아온다. 아니나 다를까 회사의 보안책임자는 피터가 살아 있다는 증거도 확인하지 않은 채 선급금 조로 15억페소(5만달러)를 보내려고 한다. 테리는 전에 비슷한 일을 함께 했던 디노와 함께 이들을 내쫓고 혼자서 납치범과의 협상에 나선다. 왜 돌아왔느냐는 앨리스의 질문에 테리는 제대로 된 사람들이 나서지 않기 때문에 자기라도 그녀를 돕고 싶었다고 말한다.
테리는 9년 동안 수많은 인질 사건을 다룬 베테랑이지만 상대방도 만만치 않다. 피랍 44일째 되는 날 연락을 받고 테리와 앨리스는 시내 성당으로 나간다. 자주색 옷을 입은 예수상 밑에 놓여 있던 편지에서 ELT측은 앞으로 지정한 일시에 무선통신으로만 교신할 것을 지시한다. 피랍자가 살아 있다는 것을 매번 확인하고 납치범 대표인 마르코와 무선통신으로 몸값을 흥정하는 것이므로 테리와 앨리스는 신경의 소모가 많다. 사이사이 두 사람은 서로 불우한 가정생활을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위로한다. 앨리스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아이를 사산한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피터가 납치 당하기 전날 밤에도 언쟁을 벌였다. 호주 출신인 테리는 부인과 이혼하고 중학교에 다니는 외아들과도 진심을 통하지 못하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는데 앨리스와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을 느낀다.
그 사이 깊은 산 속의 게릴라 기지에 정착한 피터는 억류 19개월째의 미치광이 백인선교사 케슬러를 만난다. 피터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대화상대를 만나 가족 이야기를 나누며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는다. 테리가 피터의 몸값 상한을 60만달러로 정하자 테칼라에 와있던 시누이는 석방자금을 마련하러 미국으로 돌아간다. 앨리스는 시누이에게 죽을 때까지 일을 해서라도 갚겠다고 다짐한다. ELT의 폭발물 테러는 시내 일원에서 계속되지만 테리는 마르코한테 피터는 댐 기술자에 불과하니 몸값을 40만 달러 이상 줄 수 없다고 못박는다. 반대로 납치범의 대표 마르코는 피터가 옥타놀사의 중요한 인물이므로 2백만 달러는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랍 97일째 테리는 인수자인 옥타놀사가 피터의 구명에는 관심이 없고 보험처리도 되지 않는다며 가족이 부담하는 60만달러 이상은 곤란하다고 선언한다. 이에 마르코는 65만달러만 준다면 동지들과 이야기해보겠다고 말한다. 남은 절차는 은행을 통하여 20만달러 미만으로 나누어 마르코가 지정한 계좌에 입금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 피터가 게릴라 캠프에서 비밀지도를 입수해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인 케슬러와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불행히도 피터는 덫에 걸려 붙잡히고 케슬러는 폭포 밑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마르코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앨리스의 하녀에 의해 정부 요인으로서 이중생활을 하던 마르코의 정체가 밝혀진다.
상황이 급반전되자 협상은 결렬되어 버리고, 피터가 살아있음을 확신한 테리는 직접 구출작전을 펴기 위해 디노와 함께 특공대를 조직한다. 앨리스가 거짓 정보를 흘려 테칼라 육군이 ELT 게릴라를 공격하자 게릴라 주력부대가 송유관 쪽으로 이동한다. 그 사이에 테리의 특공대는 헬리콥터로 출동하여 피터를 구조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한다.
피랍 124일째 헬기가 이륙하기 직전 앨리스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남편을 구하러 떠나는 테리에게 연모의 정을 느끼고 그를 뜨겁게 포옹한다. 작전은 한 치의 오차 없이 계획대로 실시되어 테리 일행은 피터와 또 한사람의 이태리인까지 무사히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헬기 착륙장에서 앨리스는 남편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향한다. 웬지 허전해 하는 테리를 남겨 놓고······ 마치 '카사블랑카'에서 잉글리드 버그만에게 미국행 비행기표를 주고 홀로 남는 험프리 보가트를 보는 것 같다.
감상의 포인트
글로벌 시대에 앤티-글로벌(anti-global)한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다. 최근 들어 WTO나 IMF는 국제회의를 마음놓고 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글로벌리즘에 반대하는 NGO들의 시위가 극성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영을 모토로 하는 다국적 기업(MNC)들도 이들을 거부하는 현지 사회분위기에 편승한 각종 범죄의 타깃이 되고 있다. 치안이 불안한 나라에서 납치되는 다국적 기업 중역의 숫자가 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현지 사정상 또는 기업 이미지상 언론에 공표되지 않고 있으나, 이 영화가 보여주듯이 이들의 몸값을 노린 납치 사건과 이에 따른 인질구출(K&R)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한다. 탈냉전 시대의 새로운 비즈니스 유형임에 틀림없다.
'프루프 오브 라이프(proof of life)'란 피랍자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증명사진 같은 것으로 피랍자의 생환을 목표로 협상을 벌일 때 납치범들에 대해 이것부터 요구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는 ELT 납치범들이 피터가 근일자 신문 1면을 들고 고통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을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찍어 보내온다.
이 영화는 전세계적으로 현지 경찰이나 군대 등 공권력을 배제한 채 민간 보험회사 또는 개인이 나서서 인질을 구조하는 私的 구제활동이 상당한 수준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여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불문율처럼 지켜지고 있다 한다.
첫째, 납치범들은 '인민해방'이라든가 정치성은 배제한 채 오로지 몸값을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해 조직적으로 행동한다. 둘째, 납치범들과 피랍자의 구조기관은 서로 주고받는 비즈니스라는 인식 하에 협상을 벌인다. 즉 협상의 요체는 구조자측이 경제적으로 부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납치범이 만족할 수 있는 최저금액을 제시하고 금액 차이를 좁혀나가는 것이다. 셋째, 모든 협상은 피랍자가 생존해 있다는 전제 하에 진행된다. 만일 그가 이미 죽었다면 더 이상 민간 구조자가 나설 필요 없기 때문이다. 넷째, 인질협상이 법의 테두리 밖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절대적인 상호신뢰가 중요하다. 예컨대 선수금을 제때 지불하고 공권력에 수사를 의뢰하지 않기로 하는 것 등이다. 다섯째, 석방금의 지급은 은행계좌를 이용하고 배달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현금인도(hand delivery)는 가급적 피한다.
이 영화를 보면 탈냉전시대에도 새로운 비즈니스가 출현하여 여전히 냉전시대의 프로들(첩보원, 특수부대원)을 필요로 함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질 구출작전이 완벽한 성공을 거두자 구출작전에 나섰던 디노는 테리에게 인질구출 전문 컨설팅 회사를 차릴 것을 제의한다. 항시 피랍의 위험을 느끼는 다국적 기업 등 잠재고객이 무수히 많으므로 이들에게 적절한 보안수칙을 이야기해주고 일이 터지면 직접 협상에 나서거나 조언만 해주는 것으로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위험도 별로 크지 않고 공권력이 힘쓸 수 없는 분야에서 민간전문가가 활약할 수 있는 분명한 틈새(niche) 시장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전문성이 요구될수록 비용지출도 그에 비례하여 늘게 마련이다. 공권력이 해결하기 어려운 K&R 사업이 번창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의료보험이 커버해주지 않는 암치료, 장기이식과 같은 전문적인 분야에 私保險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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