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림슨 리버(Crimson Rivers, 2000)

Whitman Park 2022. 2. 16. 10:10

 

1991년 해발 3000m의 오스트리아와 이태리 접경의 알프스에서는 5,300년 전 청동기 시대의 사냥꾼("아이스맨")이 거의 완전한 미이라 형태로 발견되어 큰 화제를 모았다. 아이스맨은 염소가죽 옷에 풀로 만든 망토를 입고 있었으며, 구리도끼와 화살통을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돌화살에 맞아 죽은 상태에서 꽁꽁 얼어 있었다.
프랑스 알프스의 얼음산에서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의 백인 시체가 발견되었다. 예리한 흉기로 찔린 상처가 많이 있고 손목이 잘려 있었으며 눈알도 빠진 상태였다. 사체의 신원은 인근 게르농 대학장이 바로 이틀 전에 실종선고를 한 32세의 교수로 밝혀졌다.

알프스의 아이스맨은 분석을 위한 과학기술이 좀더 발전할 때까지 티롤 박물관의 아이스박스에 20∼30년 더 보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처음 접한 지방경찰은 지체하지 않고 파리시 경찰청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바로 2000년 여름 프랑스에서 개봉되었을 때 3백만명 이상의 관객을 유치한 영화 <크림슨 리버(Crimson Rivers)>의 첫 대목이다. <증오>, <암살자(들)>에서 파격적인 영상을 보여준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영화의 줄거리

스릴러 영화는 보기 전에 그 줄거리를 듣는 것(spoiler)만큼 김빠지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비디오를 볼 때 흥미를 더할 수 있는 몇 가지 요령만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이 영화는 아주 엽기적으로 살해된 백인의 시체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리한 흉기로 찔리고 베인 상처에서는 온갖 벌레와 구더기가 스물거린다. 제작팀은 전문의와 장의사의 자문을 받아가며 인체와 유사한 동물의 사체를 가지고 분장을 했다는데, 얼음으로 뒤덮인 알프스 고산지대에 벌레와 구더기가 있다는 것인지 너무 실감나게 하려다 옥의 티(?)를 만든 셈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산골짜기 속으로 승용차를 타고 가는 모습은 이 사건의 배경인 게르농 대학이 산간벽지에 소재하고 있다는 것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곳에 스키 리조트가 아닌, 학생 1200명, 교수 100여명을 수용하는 유서깊은 대학이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세 유럽의 대학은 대부분 사람과 물자가 많이 유통되는 지역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게르농 대학은 빌 게이츠 같은 정보과학의 천재를 양성하는 학교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대학 도서관에는 고색창연한 장서들만 즐비하고 도서/인터넷 검색용 컴퓨터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그건 그렇다 쳐도 이 대학의 우생학, 생명공학 연구는 상당한 수준에 있음을 보여준다. 대학병원 시설이 그렇고 지역주민들을 무료 진료해준다는 지방경찰서장의 설명이 그러하다. 바로 이 대학이 무료 진료를 기화로 천인공노할 범죄(baby swapping)를 저지르는 무대가 되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에 함몰되어 감상할 때에는 콘트라스트 복선(複線)구조부터 이해하여야 한다. 산골마을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수사를 지원하기 위해 파리시 경찰청의 강력계 형사 피에르 니먼(장 르노)이 파견된다. 많은 경찰병력이 수사에 동원되었음에도 살인동기를 알아내기조차 어렵다. 연쇄살인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니만은 범인이 뭔가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는 직감을 얻는다. 한편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사작에서는 신참형사 막스(뱅상 카셀)가 공동묘지 훼손사건과 초등학교 서류절취 사건의 수사에 나선다. 마침내 막스가 학적부 절취범의 소재지를 파악하고 게르농으로 오면서 모든 사건이 한 뿌리에서 시작되었음이 밝혀진다.

 

 

과묵한 중년의 고참형사와 행동이 앞서는 신참형사는 서로 티각태각하면서도 이상적인 팀플레이를 벌인다. 뭐라 말해줄 수는 없어도 직감에 따라 행동하는 고참형사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용의주도한 선배를 존경하며 따르는 신참형사는 각자의 역할 분담에 충실하다.

이 영화의 콘트라스트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진다. 니만은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하였던 얼음산/눈사태 전문가이자 알피니스트인 파니(나디아 파레)가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선량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직감으로 안다. 실제로 그의 뒤에는 자신의 인생을 망친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엽기적인 범죄도 불사하는 진짜 범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영화 속 사건의 피살자들은 "혈통의 지배자"(Master of Crimson Rivers)라는 우생학(eugenics)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 학교의 자원관리를 맡았던 도서관사서 레미, 순혈통주의의 열성화를 피하기 위해 주민의 갓난아이와 바꿔치기를 자행한 산부인과 전문의 필립 서티스, 그리고 유전적 동일성 식별을 어렵게 하기 위한 안과수술을 담당한 안과 전문의 샤네즈 등이다. 그러나 진짜 피해자는 그릇된 우생학적 사고방식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지낸 학장과 교수들이라기보다는 그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던 학생과 그들을 신뢰한 지역주민일 것이다.

 

감상의 포인트

1930년대에 독일에서는 아리안족의 천년제국 건설을 꿈꾼 히틀러의 권장으로 우생학(eugenics) 연구와 실험이 매우 활발하였다고 한다. 당시 나치 독일은 [미래시대의 유전질병 방지법]을 제정하여 집시와 장애인들에 대한 불임시술을 강행하고, 히틀러가 열성인종으로 규정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심지어는 젊고 예쁜 여자와 친위대의 장병을 결혼시켜 얼마나 잘 생기고 똑똑한 2세가 태어나는지 인종개량 실험을 하기도 했다. 비인간적인 이러한 실험은 별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는데, 이 영화는 아직도 히틀러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머리 좋은 2세를 생산하기 위한 연구에 매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도 그 폐해가 심각하여 주민들의 갓난아기와 바꿔치기 할 수밖에 었었던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우생학은 아이러니칼하게도 근친결혼의 결과 각종 유전자 이상을 가진 기형아의 출생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인간복제(human cloning) 실험에 대하여 반대론이 무성한 것도 과학적인 시비논란 이전에 실험 결과 기형적으로 태어나는 복제인간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하는 생명의 윤리성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류의 조상이 외계인이라고 믿고 UFO를 신봉하는 '라엘리언' 종교집단(Raelian Movement)에서 인간복제 실험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놀랍게도 "인간이 하나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엘로힘)이 자신을 구성하는 유전자 코드를 본따 사람을 만들었다는 의미이므로 인간복제는 종교윤리에 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복제 실험은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판도라의 상자'가 될 것으로 믿는 이들이 많아 미국, EU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인간복제 금지법'의 제정을 추진하였거나 추진 중이다. 유럽의 지도자들은 2001년도 유엔 총회에서 이 문제를 정식 거론하기로 코피 아난 총장에게 요청한 바 있다. 우생학의 현대적 함의에 대하여는 박희주, "새로운 유전학과 우생학" 참조.

최근 들어 생명공학(bio-engineering)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도 많은 과학자들이 우생학의 실험대상을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돈 되는 식품개발이나 질병치료로 바꾼 데 기인한다. 유전자변형식품(genetically modified organisms: GMOs)의 연구, 인간 유전자의 DNA 분자구조를 밝혀내는 게놈(genome) 프로젝트는 본질적으로 우생학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까지 미국과 EU 등 주요국에서는 생산·유통업자들에게 제품 겉포장에 GMO 표시를 하도록 하는 정도의 규제만 가해왔으나 앞으로는 생산농장명 등 GMO 식품에 관한 모든 정보의 표시를 의무화할 방침이라 한다. GMO 식품이 늘어남에 따라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7월 24일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유전자조작 농산물 표시규정을 의결했다. 집행위의 결정(Regulation)은 미국과의 통상마찰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우려를 무릅쓰고 ▷유전자조작 농산물로 만든 모든 식품은 표시를 의무화하고 ▷유전자조작 식품과 사료의 승인을 위한 집중관리 체제를 만들며 ▷유전자조작 식품을 농장에서부터 슈퍼마켓까지 철저하게 추적할 수 있는 구체적 시스템을 갖추는 것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규정은 회원국 정부와 유럽 의회의 승인을 거쳐 늦어도 2003년부터는 발효될 예정이다.

다음으로 이 영화가 관심을 끄는 것은 비리를 폭로하는 방법론(methodology)이다. 이 영화에서는 수백년간 봉건영주처럼 그 지역을 지배해 온 학교 당국에 반발하여 그 주모자를 엽기적으로 살해하는 수법이 동원되었다. 일반적으로는 공권력(검찰 및 경찰,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을 발동하거나, 의회에서 특별검사를 임명하거나, 언론매체를 통하여 비리를 파헤치는 방법이 더 많이 이용되고 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정상이 아닌 것 또는 상식으로부터의 일탈과 변형을 '엽기적'이라고 표현한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우리나라 공권력의 언론 세무조사를 둘러싸고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공방이 치열하다. 여기에 동원되는 언사(言辭)를 보면 가히 엽기적이라 할 만하다. 아무리 이유와 명분은 충분하다 해도 제4부로서 성역화되었던 언론, 그것도 정부비판적인 언론의 사주를 느닷없이 옭죄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법은 준수되어야' 하고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국내의 모든 기업들이 적용을 받아 온 세법 앞에 언론 사주라고 예외취급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 사회의 지식인·유권자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조세정의가 중대한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자신과 가족의 억울함을 세상에 폭로하기 위해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벌였던 그녀는 대자연의 눈사태 속에 영원히 파묻히고 만다. 자연[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自然)]의 이치를 거슬렀던 '엽기적'인 자는 모두 하늘이 내린 벌을 받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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