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장한나 하면 11살에 첼로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로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은 첼리스트로 알고 있었다.
전에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는 말은 들은 적도 있다.[1] 그러나 그가 세계적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놀라웠다.
5월 30일 하나금융그룹이 주최하는 행사의 티켓을 얻어 잠실 롯데 콘서트홀에 갔다.
한국-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빈 심포니가 인천과 부산, 서울에서 3차례의 내한 공연을 갖는데 그 사이에 하나금융그룹이 소폰서가 되어 특별 이벤트로 마련한 공연이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의 랜드마크인 고층건물에 호텔이나 백화점 말고 이런 고급 문화공간이 있다는 게 가슴 뿌듯했다. 전면에 세계 최고수준의 파이프오르간이 시야를 압도하는 것 같았다. 무대 뒷편(파이프 오르간 쪽 합창대 석)에 객석이 있는 것도 베를린 필 콘서트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콘서트홀 내부의 구조나 내장재, 톤홀의 설계는 산토리홀, 디즈니 콘서트홀의 음향을 설계한 일본의 나가타 어쿠스틱스가 맡았다고 한다.
이윽고 우리의 자랑스런 마에스트라로 이름을 올린 장한나가 무대에 등장했다. 본래 파리 국립오페라단 음악감독이던 필리프 조르당이 지휘를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코로나 확진이 되는 바람에 긴급 대타로 장한나가 지휘봉을 들게 된 것이다.[2]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이 무대 중앙에 서자 지휘대에 오른 장한나 마에스트라가 지휘봉을 열정적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이날 장한나는 마치 지휘봉을 들고 펜싱 시합을 하는 선수처럼, 때로는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는 선생님처럼, 또는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포디움이 좁을 새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지휘를 하였다.
브람스가 절친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의 조언을 얻어 1878년에 악곡을 완성했고 그에게 헌정한 바이올린 협주곡의 제1악장은 비올라와 첼로, 바순이 함께 제1주제를 연주했다. 다행히 1층 로열석에 앉은 덕분에 낮게 흐르는 중저음의 음향이 콘서트 홀의 진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처음에 조용하게 시작되었던 오케스트라 연주가 끝나고 독주 바이올린이 힘차게 등장하면서 넓은 홀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연주음으로 꽉 차는 듯 했다. 맨 뒷줄의 팀파니 주자는 거의 쉴 틈 없이 곡에 박진감을 더 했다.
제2악장에서는 오보에 솔로에 이어 바이올린의 솔로가 이어졌다. 악곡의 전개가 매우 복잡함에도 바이올리니스트는 어떻게 전곡을 다 외워서 연주를 하는지 듣는사람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연주가 모두 끝나고 키가 큰 길 샤함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잠시 후 우레와 같은 청중들의 박수 소리에 다시 들어왔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두 앉아 있는 가운데 길 샤함은 "한 번 더"하고 외치더니 바흐의 파르티타 3번 가보트를 독주로 연주했다.
15분간의 인터미션이 끝난 후 장한나가 지휘하는 빈 심포니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을 연주하였다.
1813년 청각을 거의 상실한 작곡자가 직접 초연을 할 때 온몸으로 음악을 표현하는 듯했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장한나의 지휘하는 폼이 더욱 격렬해 보였다. 저렇게 온몸으로 지휘를 하면 얼마나 힘이 들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하게 되었다.
제1악장은 여러 목관 악기들이 단조로운 주제를 반복적으로 연주하고 특히 플루트와 오보에가 열일을 한다고 생각되었다.
제2악장에서는 우리 귀에 많이 익은 장송곡풍의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어느 전쟁 영화에서 전세가 불리함에도 진격을 명령하는 사령관의 고뇌가 느껴지는 비장미 넘치는 곡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이 번뇌하는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많이 쓰이곤 했다.
그 다음으로 베토벤의 역동적인 에너지가 흘러 넘쳐 절로 주먹을 쥐게 만드는 제3악장이 끝났다. 바로 이어서 빠르게 강렬한 리듬이 전개되는 4악장에서는 마치 콘서트 홀이 폭발 일보 직전에 이르는 듯했다.
마에스트라 장한나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이런 공연을 학수고대했던 한국 청중들에게 앙코르 곡으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제5번을 선사했다.
다시 무대에서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몇 차례. 포디엄에 올라간 장한나는 "빈 심포니 필하모니커의 선물이예요"라며 마지막 앙코르 곡으로 "아리랑"을 들려줬다. 호른으로 아리랑의 주선율을 연주할 때 콘서트 홀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어서 모든 악기가 아리랑의 멜로디를 반복해서 연주할 때 이런 장면이 연상되었다.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 이 땅을 떠났던 조선동포들이 고향에 돌아오면서 부르는 노래 같았다.
바로 오늘의 마에스트라가 음악수업을 받기 위해 해외로 나가서 향수에 젖을 때마다 부른 노래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오늘 비록 대타 지휘자였을 망정 "이렇게 성공했습니다" 하고 고국의 팬들에게 들려주는 인삿말처럼 들렸다.
Note
1] 한국이 낳은 ‘첼로 신동’ 장한나는 30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첼로보다는 지휘에 주력하고 있다. 2017년 노르웨이에서 오슬로, 베르겐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 트론헤임 심포니의 첫 여성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올렸다. 최근에는 독일 함부르크의 새로운 랜드마크 엘프 필하모니 홀(Elb Philharmonic Hall)에 상주하는 함부르크 심포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위촉되었다.
2] 지난 5월 24일 아침 유럽에 있던 장한나는 빈 심포니의 내한 공연에 동행할 지휘자를 급구하는 내용의 이메일과 부재중 전화 메시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당초 지휘봉을 잡을 예정이던 스위스 출신 명지휘자 필립 조르당이 코로나 확진으로 서울에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장한나는 급히 연주 곡목부터 확인했다. 베토벤·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베토벤 교향곡 7번.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들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당일 짐을 쌌고, 그 다음 날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장한나는 “한국에서 오케스트라와 만나서 딱 2시간 반 동안 리허설하고 곧바로 다음 날부터 무대에 올랐다”며 웃었다. “프로와 프로끼리는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지휘대에 올라서 10초 안에 자기만의 해석을 보여주지 못하면 오케스트라에 잡아먹히고 마는 것이 지휘자의 운명”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빈 심포니와 내한공연 마친 지휘자 겸 첼리스트 장한나", 2022.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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