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마에스트라 여자경의 토요 콘서트

Whitman Park 2022. 3. 20. 12:00

2020년부터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클래식 공연은 대부분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

2022년 들어서는 공연이 재개되는 듯하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친(親)푸틴 음악가들이 무대에서 배제되면서 일부 차질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2월 25일 뉴욕 카네기 홀에서 비엔니 필하모니와의 협연이 예정되어 있던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공연에서 배제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대타로 나서게 되었다.

평소 암보(暗譜)로 피아노를 연주하던 조성진은 이날 리허설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거의 완벽하게 연주했다고 극찬을 받았다. 조성진은 빈 필과의 협연, 카네기 홀 데뷔 무대 둘 다 성공적으로 마치고 북미 투어에 돌입하게 되었다.

 

3월 19일 비와 눈이 섞여서 내리던 날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토요 콘서트에 참석했다. 나로서도 정말 오래 간만이었다. 서예박물관 벽에는 새로 대형 전광판이 설치되어 여러 성악가들이 봄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1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착석한 후 강남 심포니(Gangnam Symphony Orchestra)의 예술감독 마에스트라 여자경이 나와 오늘의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한양대 음대 졸업 후 비엔나 국립음악대학교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한 여자경은 영문 이름을 YEAR Jakyung이라고 부른다. 이미 유럽의 여러 국제지휘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으로 입상한 바 있고 국내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기에 '마에스트라'(Maestra: 여자 음악거장)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2020년부터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강남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작년에 네 차례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는데 코로나로 모두 취소되었다고 하면서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첫 순서는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가 작곡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Op.45)로 협연자는 2011년 스무 살 때 루마니아 에네스쿠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손정범이었다.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1782~1840)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교와 연주력을 보여주는 카프리치오(Caprice: 규칙이나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활기차게 기교를 부리는 음악)를 여러 곡 남겼는데 그중 24번 주제를 가지고 슈만, 리스트, 브람스 등 여러 작곡가가 연주회용 피아노 연습곡을 작곡했다.

러시아 귀족 출신인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혁명 직후 1918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작곡[1]보다는 연주를 많이 해야 했던 그는 1934년 여름 휴가를 이용해 스위스 루체른 호숫가 별장에 머물며 그가 흠모하는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를 가지고 랩소디를 작곡했다. 그리고 피아노 비르투오소(virtuoso)의 정수를 보여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보다 키도 키고(198cm) 손가락이 길었던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초인적인 기교와 테크닉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콘체르토를 작곡하면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대화[2]를 하는 식으로 조성과 멜로디를 바꾸는 다채로운 변주곡을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18번 변주곡이 파가니니의 주제를 거꾸로 진행하여 매우 감미롭고 누구나 따라서 흥얼거릴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의 음악은 노래 같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풍부하고도 화려한 표현력이 아주 매력적이다. 특히 18번 변주곡은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의 BGM으로 또는 광고음악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고 있으니[3] 클래식 작곡가의 음악 애호가들을 위한 깜짝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평소에 클래식 FM 방송과 CD를 통해 클래식 명곡을 즐겨 듣고 있지만 이날 콘서트 홀 2층에서 지휘자와 협연자는 물론 모든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면서 감동을 느꼈다.

중저음의 친절한 해설로 일차 청중들의 호감을 샀던 여자경 지휘자는 시종 진지하게 각 연주 파트와 눈을 맞춰가면서 지휘를 했다. 지휘자의 양손 놀림은 주빈 메타 못지 않게 아주 커서 마치 발레리나가 춤을 추는 듯 했다.

 

피아니스트 손정범은 악보를 태블릿에 담아 간간히 보면서 연주를 했는데 역시 운지 테크닉이 현란하여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는 저렇게 힘있게 치고나면 탈진하지나 않을까 우려가 되었다.

무사히 연주를 마치고 우레 같은 청중의 박수 소리가 계속되자 몇 차례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했다. 청중들도 그동안 콘서트에서 못쳤던 박수를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손바닥 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손정범은 피아노 앞에 앉아 아주 조용한 무드의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터미션이 있었다.

 

제2부는 드보르작(Antonin Leopold Dvořák, 1841-1904)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From the New World)"(Op.95)였다.

마에스트라 여자경은 드보르작이 기차 매니어였다는 말로 해설을 시작했다. 그러한 까닭에 제1악장 도입부에서 기차 가는 소리가 들리고, 제4악장에서는 흰 증기를 뿜으며 기관차가 힘차게 굴러가는 소리를 음악적으로 표현했으며 간간히 기적 소리도 들린다고 했다.

제2악장은 "꿈속의 고향(Going Home)"으로 유명한 멜로디가 나온다. 그가 향수에 젖어 잉글리시 호른으로 연주하는 아주 애조 띤 곡조를 지었다. 드보르작은 아주 좋은 조건으로 미국 뉴욕에 새로 설립된 내셔널 음악원장직 제안을 받았다. 그는 1892년 미국으로 건너가 백인과 흑인, 인디언을 가리지 않고 음악도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드보르작은 그들에게서 들었던 흑인 영가, 아메리칸 인디언의 전통음악 가락을 교향곡, 협주곡 여러 장르의 음악 작곡할 때 반영했다고 한다.

여자경은 "장산곶 마루에"로 시작되는 우리 민요 "몽금포 타령"을 들려주며 드보르작은 5음계를 차용하여 아주 동양적인 멜로디가 나올 테니 주의해서 잘 들어보라고 말했다.

 

마에스트라의 친절한 설명을 들어서인지 드보르작의 교향곡 신세계는 제1악장부터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실로 맨 뒷줄의 티파니스트와 타악기 주자가 이처럼 열일하는 레퍼토리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심벌즈도 간간히 등장했다.

특히 제4악장에서는 점차로 고조되는 리듬이 영화 <조스(Jaws)>에도 차용이 될 정도로 공포스러운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당시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미 대륙의 활력과 긴장감을 표현하려는 것 같았다.

 

박진감 넘치는 제2부 순서가 끝나고 1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청중들의 박수 소리가 멈출 줄 몰랐다. 그러자 금관악기를 든 오케스트라 단원 몇 사람이 새로 추가되었다.

다시 지휘대에 오른 여자경이 선물한 앙콜 곡은 요한 시트라우스의 "천둥과 번개 폴카"였다.

오늘 공연에서 보여준 것처럼 클래식 연주자들과 애호가들의 열정이 오랫 동안 억눌려 있다가 폭발하듯이 코로나바이러스 오미크론을 퇴치하기 위해 천둥과 번개를 부르는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여운을 남기고 콘서트가 모두 끝났다.

3월과 4월 무슨 연주가 예정되어 있는지 공연 안내 리플렛을 훑어 보았다. 4월 중순까지 프로그램 안내지가 꽉 차 있는 걸로 보아 수요(ticket sales) 측면에선 변수가 많지만 공연의 공급(recitals)은 코로나 이전 상태로 거의 회복된 것 같았다. 

3월 27일 IBK체임버홀에서 열리는 "프리다 칼로, 자클린 뒤 프레를 만나다" 공연 안내에 눈길이 갔다. 작년에도 IBK체임버홀 공연 때 전석 매진을 기록한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미술과 첼로에 있어서 신기원을 열었던 두 여성 예술가의 사연 많은 비련(悲戀)의 스토리를 반도네온과 첼로를 가지고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해졌다. 음악은 피아졸라와 브람스, 엘가의 곡을 빼놓을 수 없다. 자클린 뒤 프레와 바렌보임에 대하여 어떻게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첼리스트 박유신의 공연 리플렛도 눈길을 끌었다. 얼마 전 KBS 음악실에 출연하여 라이브로 첼로 연주(위 사진)를 들려주었기에 급 호감이 갔다. 사람의 목소리와 흡사한 첼로로 들려주는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은 얼마나 감미로울까? 피아노 반주는 이젠 한국 사람 같은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다. KBS 1FM의 '보이는 라디오'는 감사하게도 화질이나 음향에 있어서 1번열 좌석을 보장해주므로 클래식 공연에 대한 갈증을 크게 덜어주고 있다.

 

봄이 오는 길목

 

우면산 자락
예술의 전당에
봄을 재촉하는 가랑비
전광판에선 흥겨운 노랫가락
무심한 듯 우산 쓰고 오가는 시민들

 

Note

1] 라흐마니노프는 1892년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하고 발표한 교향곡 제1번의 초연이 실패로 돌아가자 4년 동안 아주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러다가 정신의학자 니콜라이 달 박사를 만나 자기암시와 최면요법으로 우울증을 극복하고, 1901년 작곡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재기에 성공했다. 그 연간의 작곡가의 고뇌와 그를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정신과의사의 노력을 다룬 국내 창작 뮤지컬 <라흐마니노프>(2016, 2021)가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그후 라흐마니노프는 주옥 같은 작품을 속속 발표하는 한편 볼쇼이 극장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미국에 망명한 뒤로는 1000회에 달하는 피아노 연주에 매달린 나머지, 작곡 편수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교향곡 제3번, 교향적 무곡(Symphonic Dances) 등 6곡에 불과했다.

 

2]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는 곡이다. 조성진도 2021년 12월 31일 밤 신년음악회에서 이 곡을 라디오 프랑스 심포니와 협연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1934년 12월 필라델피아에서 이 곡을 직접 초연하였는데 마지막 변주가 어렵다며 걱정을 하자 친구가 크림 드 민트(crème de menthe) 칵테일 한 잔을 권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곡의 24번 변주곡은 '크림 드 민트'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3] 미국의 7080 싱어송라이터 에릭 카르멘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제2번 3악장 아디지오의 주제 선율을 가지고 "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는 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2악장의 선율을 이용해 "All By Myself" 노래를 불렀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에서 르네 젤위거가 "더 이상 혼자이고 싶지 않다"며 잠옷을 입은 채 립싱크로 절규하듯이 불렀던 바로 그 노래다.

2016년 JTBC의 《팬텀싱어》프로에서 정통 성악의 화음을 선보이고 최종 우승을 차지한 남성 사중창단 포르테 디 콰트로는 2017년 프라하 심포니의 반주로 Classica 앨범을 Decca에서 제작 발매했다. 그 중의 한 곡인 "좋은 날"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제2번 3악장의 주제를 가지고 고향친구들과의 즐거운 추억, 힘든 시절을 헤쳐온 삶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차게 부른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