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고 폭우까지 몰고 온 여름 바람이 걷히고,
조석으로 서늘함을 안겨주는 바람이 분다.
Where the sultry wind went away,
here comes autumn breeze
in a cool mode.
불교적 분위기의 미당(未堂 徐廷柱, 1915-2000)의 시에 김주원이 현대적 감각의 곡을 붙인 가곡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듣고 또 들었다.
이 곡이 화제가 된 것은 소프라노 박혜상이 우리말로 불러 독일 도이치그라모폰(DG)에서 음반으로 발매했기 때문이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Like the Wind Coming back after
Meeting the Lotus by Seo Jeong-ju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Feeling sorry,
but
feeling like sorry a little bit
not feeling very sorry.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1]
Saying good-bye,
but
saying good-bye to meet again
somewhere in the next life
not to say good-bye for good.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1]
Not the wind
coming to meet the lotus
but like the wind
coming back after meeting the lotus ……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Not the wind a few days ago
coming back after meeting the lotus
but like the wind a few seasons ago
coming back after meeting the lotus ……[2]
TV 음악 프로에서 이 성악곡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이러했다.
조수미의 대를 이을 소프라노의 유망주, 한국적인 여백(餘白)과 정한(情恨)이 느껴지는 가곡, 한국 시단을 대표하던 시인의 함축적인 시어(詩語) - 슈베르트의 어느 예술가곡 못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몇 번을 더 들을수록 가사 - 미당의 시(1968 <동천>에 수록)에 더 마음이 쏠렸다.
섭섭하게, 이별이게, 연꽃을 만나러 가는 가는 바람이 아니라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이라니 ......?
처음엔 말장난처럼 여겨지더니 ......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연꽃이 만개한 연못에 부는 바람이 연꽃이 피기 전과 후에 무엇이 달라질까 싶었는데[1] 내 지나간 삶의 여러 장면과 겹쳐 보였다.
- 초등학교 시절 소풍가기 전날 밤의 설레는 마음
- 여러 차례의 입학시험과 사법시험 보기 전의 긴장된 마음
- 결혼을 앞두고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던 심정
- 처자를 데리고 처음 해외 유학 길에 오를 때의 기대감과 책임감
- 인생 제2막을 열고 처음 대학 강단에 섰을 때의 부풀었던 가슴
. . . . .
이 모든 것을 함축하는 말로 '연꽃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이상 가는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위 사건들의 결말(結末)을 모두 겪고난 후에는 기쁠 것도 후회될 것도 없다는 관조(觀照)의 마음이 된 것이다.
연못 위로 부는 바람이야 어느 때고 쉼 없이 불게 마련이지만, 여름이 가고 연꽃이 모두 지고 난 후에 내년의 꽃피는 시절을 기약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부는 바람은 참 멋 있을 것 같다.
Note
1] 바꿔 말해서 연꽃이 피기 전에 부는 바람과 피고난 후에 부는 바람의 차이라 할 수 있다.
꽃선비님이 네이버 블로그에서 풀이한 것처럼, "그때 다시 만나러 가는 길/ 사랑 찾듯 이별 찾듯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사랑 거쳐 이별 거쳐 만나고 오는 바람 같구나."
2] "연꽃 만나고 가는 ..." 가곡은 한국어로 부른 음반을 해외에서 유통시켜야 하는 만큼 "이게 무슨 말이지?" 갸우뚱할 외국인 구매자를 위해 특히 정확한 번역이 요구된다. Kinsley Lee, YouTube 등 여러 가지 버전이 있지만 여기서는 필자의 관점에서 운율을 살리기에 적합한 단어를 골라 배열하는 데 힘썼다.
이를테면 '섭섭하게'는 sad, sorrowful도 있지만 feel sorry가, '이별이게'는 farewell보다는 say good-bye가 마음에 와 닿을 듯 싶었다. 그 결과 미당의 시의 가치를 10으로 친다면, 처음엔 7~8 정도였으나 이리저리 고심하며 마땅한 단어를 찾아서 번역한 다음에는 행간의 느낌까지 실감(實感)하게 되었으니 15 이상 되지 않을까!
그밖에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시와 노랫말을 영어로 옮긴 것을 더 많이 보시려면 이곳을 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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