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Dolores Claiborne, 1994)

Whitman Park 2022. 2. 19. 07:50

1995년말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돌로레스 클레이본(Dolores Claiborne)>은 법률영화라기보다는 심리영화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같다. 한 여자가 남편과 딸로부터 버림받고 게다가 살인 누명까지 썼다면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에 누구나 동정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근친간의 성폭행, 미필적 고의 내지 부주의에 의한 살인, 범죄의 입증과 변론 등 몇 가지 흥미로운 이슈를 찾을 수 있고 이것들이 스토리의 전개에 빠져서는 안될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원작자인 스티븐 킹은 헐리웃이 좋아하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는 고향인 메인주를 무대 삼아 많은 공포 미스터리 소설을 발표하고 있는데, 미국의 어느 서점엘 가나 '스티븐 킹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그의 소설은 독자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 영화화된 작품도 많아 우리나라에서도 초능력을 가진 여고생에 관한 호러 무비인 1976년작 <캐리>, 잭 니콜슨 주연의 1980년작 <샤이닝>, 미국 시골 소년들의 시체 찾기 모험을 그린 1986년작 <스탠드 바이 미> 등이 소개된 바 있다.

90년도 영화 '미저리'(돌로레스 클레이본 역을 맡은 캐시 베이츠가 오스카 여우 주연상을 받았다)나 1994년작 <쇼생크 탈출>(쇼생크 감옥은 스티븐 킹의 소설에 나오는 허구의 교도소이지만 이 영화의 대사에도 등장한다)도 '돌로레스 클레이본'처럼 작품성이 좋고 인간심리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의 줄거리

미국의 북동쪽 끝 메인주의 한 섬 외진 저택에서 노부인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한다. 그 곁에 국수 방망이를 들고 서 있던 하녀 돌로레스 클레이본(캐시 베이츠)은 우편배달부의 증언에 따라 살인 혐의를 받고 노련한 매키 형사('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대령으로 나온 크리스토퍼 플래머)의 조사를 받는다. 뉴욕에서 잡지사(Esquire) 기자로 있는 딸 셀리나(제니퍼 제이슨 리)가 연락을 받고 급히 고향으로 달려온다.

돌로레스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살인자' '미친 년'으로 손가락질 당하지만 본인도 스스럼없이 악인임을 자처한다. 법정출입 경험이 많은 셀리나는 어머니의 태연함이 안타깝기 전에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18년전 아버지가 어머니 때문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어머니가 다시 살인을 했다고 짐작한다. 다만 혈육으로서의 의무감에 유능한 변호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애리조나주에 가서 특종기사를 쓰겠다는 것뿐이다.

돌로레스는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딸에게 이야기하면서도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이 안타깝다.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집에서 딸과 함께 며칠을 지내는 동안 문득문득 과거를 회상하면서(회상장면에서는 화면이 무채색에서 컬러로 바뀐다)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신경안정제·수면제 게다가 술도 일정량은 마셔야 잠을 잘 수 있는 셀리나가 슈퍼에서 사 온 스카치 위스키 '화이트 앤 블랙'은 18년전 개기일식이 일어날 때 남편에게 권했던 술이 아닌가.

오랜 불화 끝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온 셀리나는 아버지가 딸을 건드리고 자기가 피땀 흘려 모은 돈마저 훔친 것을 알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어머니의 말에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화를 내며 집을 뛰쳐나간다. 사실 돌로레스는 술주정뱅이에 낭비벽이 심한 남편으로부터 사사건건 무시당하면서도 오직 예쁘고 총명한 셀리나만큼은 잘 가르치겠다는 일념에 온갖 고생을 감수해 온 터였다.

돌로레스가 하녀로 일하는 저택의 여주인 베라 도노반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혼자 사는 부유한 미망인이었다. 남편이 죽은 뒤 볼티모어에서 메인으로 거처를 옮긴 그녀는 남편이 정부와 어울리는 것을 알고 자동차 고장으로 남편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불의의 사고가 불행한 여인에게는 유일한 구원이 될 수 있다'며 악녀가 되는 것만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도노반 부인의 말에 고무되어 돌로레스는 힘든 결심을 한다. 그리고 개기일식이 일어나던 날 오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싸가지고 집에 일찍 돌아와 모처럼 남편의 시중을 든다.

은행에서 빼돌린 돈을 다시 되찾았다는 돌로레스의 말에 남편은 격분하여 돌로레스를 밀쳐 쓰러뜨리고 돈을 찾아오라며 내쫓는다. 마침내 개기일식이 일어나 천지가 어두워지고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돌로레스를 추격하던 남편은 뒤뜰의 함정에 빠진다. 돌로레스가 그곳에 함정이 있는 것을 알고 유인한 셈이었다. 남편이 살려달라고 외쳤음에도 그를 구조하려 들지 않고 떨어져 죽도록 내버려둔다. 사고의 뒤처리를 마친 그녀는 알리바이를 꾸미기 위해 동네 사람들에게 남편을 못 보았느냐고 일부러 찾으러 다닌다.

사방에 적을 만들어 놓는 어머니로부터 탈출하듯 고향을 떠나는 셀리나는 차안에서 담배를 찾다가 돌로레스가 녹음해 놓은 테이프를 듣고서야 진상을 깨닫는다. 더욱이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숨기고자 노력했던 생부한테 성추행을 당하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되면서 가던 길을 돌이킨다. 마침 돌로레스는 지방검사로부터 신문을 당하고 있던 참이었다.

셀리나는 매키 형사가 주장하는 유산을 노린 살인동기나 혐의사실이 아무런 근거 없음을 낱낱이 밝힌다. 페리보트 선착장에서 모녀는 화해와 동시에 석별의 정을 나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 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만 노심초사했던 돌로레스로서는 도노반 부인이 남겨준 뜻밖의 유산 160만달러보다도 셀리나의 태도변화가 고맙고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심리묘사와 복선으로 전후사정을 이해하거나 결론을 내리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오히려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처지를 일방적으로 동정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가 될 정도이다. 그러나 돌로레스는 딸에게 말한 것처럼 남편의 실족사와 도노반 부인의 추락사에 대해 과연 결백한가.

두 사건 모두 물증(hard evidence)은 없고 정황증거(circumstantial evidence)뿐이어서 피의자가 유죄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매키 형사가 당초 돌로레스를 몰아세운 것처럼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 끝에 죽음의 함정으로 유인하고 실족사하도록 방치한 것은 미국법상 '인명에 대한 고도의 위험을 부주의하게 방치'한 것으로 살인죄를 구성하는 행위이다. 비록 친딸을 추행한 패륜아였지만 술에 만취된 남편이 쫓아오다 빠져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함정이 있는 곳으로 유인한 것은 '파렴치한 악한 마음'(abandoned or malignant heart)의 발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형법에서도 이러한 경우에는 일응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 문제될 것이다.

도노반 부인의 추락사에 대해 매키 형사는 거액의 유산을 노린 의도적인 범행이라고 돌로레스를 추궁한다. 그러나 돌로레스가 주급 80달러만 받고도 10년 이상 하녀로서 묵묵히 일했던 것은 상대방의 비밀을 아는 불행한 여인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아끼는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셀리나가 추천하는 뉴욕의 유능한 변호사들이 배심원들 앞에서 시골뜨기 매키 형사를 묵사발 만드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95년 10월 OJ 심슨의 형사재판 결과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당시 심슨의 변호사들이 힘을 쏟은 것은 그가 죄가 없다는 게 아니라 검찰이 제출한 증거가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 수사관에 의해 수집되었다는 이유에서 흑인인 심슨의 유죄를 인정하는 자료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셀리나가 추천하는 뉴욕의 기라성같은 변호사들(long list of New York lawyers)은 매키 형사가 들고나온 어떠한 증거든지 그의 선입견이 작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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