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제스틱(The Majestic, 2001)

Whitman Park 2022. 2. 19. 00:05

2001년에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 <마제스틱>(The Majestic,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은 우리를 타임머신에 태우고 50년 전의 미국 헐리우드로 데려간다. 주인공은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사람인데 어느 날 갑자기 좌익분자로 몰려 고초를 겪는다. 직장도 위태로워지고 연인까지 떠나버리자 이름을 바꾸고 다른 사람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현실이 된다.

이 영화는 헐리우드에 불어닥친 매카시즘을 테마로 하여 <시네마 천국>과 같이 옛날 영화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작위적이고 우연한 사건을 조합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 비슷한 사건이 실제로 발생하여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87년 홍콩에서 아내를 죽인 남자가 살인죄를 면하기 위해 "북한 공작원과 위장결혼을 하여 북한에 끌려갈 뻔하였으나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싱가포르에서 거짓 기자회견을 한다. 바로 '수지 김 사건'이다. 당시 안기부는 수지 김이 간첩이 아니었고 남편인 윤태식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인지하였음에도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조작한다. 언론(동아일보 이정훈 기자 및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집요한 추적보도로 2001년 12월 검찰은 IT사업가로 변신한 윤태식이 범인임이 밝혀내고, 2003년 8월 서울지방법원은 지난 16년 동안 말못할 고초를 당한 수지 김의 가족에게 공권력을 그릇 행사한 국가가 총 42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법무부는 항소를 포기하고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비롯한 안기부 고위간부들과 윤태식에 대해 구상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영화의 줄거리

1950년대 초 헐리우드 영화사에서 영화 각본을 쓰는 피터 애플턴("피트", 짐 캐리)은 스스로 말하듯이 B급 시나리오 작가이다. 그는 헐리우드의 차이나 극장(Grauman Theater)에 자기가 각본을 쓴 영화의 포스터가 내걸리는 것이 큰 기쁨이다.

당시 헐리우드에는 매카시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찰리 채플린은 FBI 후버 국장에게 추방 당하다시피 했고 게리 쿠퍼 같은 영화 배우도 활동을 정지 당한 터였다. 그런데 '반미활동규제위원회'가 피트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이기 시작해 기관원들이 영화사에 찾아와 그가 쓴 각본을 압수해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가 대학 다닐 때 '총 대신 빵 클럽'에 가입했던 것이 빌미가 된 것이다. 영화사의 법률고문은 위원회에 나가 증언할 수밖에 없지만 몇 사람 이름만 대면 무사할 것이라고 말한다.

피트는 그가 A급 작가로 도약할 수 있다고 믿은 시나리오 "재에서 재로"(Ashes to Ashes)가 마르크시즘을 선전하는 대사로 가득 차 있다는 당국의 지적에 용기를 잃는다. 더욱이 한창 뜨기 시작한 여자 배우 산드라 클레어도 절교를 선언해왔다. 피트는 연거푸 독한 술을 들이키면서 "아침해가 뜰 때쯤 자동차 기름이 떨어진 곳에서 이름부터 바꾸고 새로 인생을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말이 씨가 되었다고 할까 천둥 번개가 치는 한밤중에 다리 위로 차를 몰고 가다가 그만 난간을 들이받고 다리 밑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내 급류에 휩쓸린 그는 정처 없이 떠내려간다.

 

이튿날 아침 낯선 해변가에 쓰러져 있던 피트는 산책 나온 인근 마을 노인에 의해 발견된다.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까지 얻어먹은 피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낯 익은 얼굴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로슨이라는 그 마을에서는 2차 대전 중에 징집되어 나간 젊은이가 무려 62명이나 전사했다고 한다. 피트는 의사의 진찰을 받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지만, 보안관에게 가서 사고 경위를 진술할 때 도무지 사고 전에 무엇을 하였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기억상실증에 빠진 것이다. 마침 레스토랑에서 피트를 목격한 한 노인이 피트가 프랑스 전선에서 실종된 자기 아들 루크임에 틀림없다고 말하고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해리 트림블이라고 하는 그 노인은 마을의 유일한 영화관이던 '마제스틱'이라는 영화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주민들이 LA, 샌프란시스코 등 인근 도시로 대거 이주한 데다 TV의 등장으로 영화 관객 수가 급감하여 영화관은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다.

피트는 소파에 누워 꼬박 이틀을 잔다. 그리고 깨어난 후 극장을 재건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자신이 시나리오 작가라는 사실은 잊었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해리 트림블은 살아 돌아온 아들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아들의 가묘로 데려간다. 루크가 유럽 전선의 후방에 낙하산으로 뛰어내렸다가 전우들을 구하고 자신은 산화하고 말았다며 시신을 찾지 못해 유품만으로 묘지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달리 대책을 찾을 수 없는 피트는 루크처럼 살 작정을 하고 활력을 상실한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을 할까 골똘히 생각을 한다. 그 때 의사의 딸 아델(로리 홀덴)이 고향에 돌아온다. 바로 루크의 약혼녀였다.

시장은 루크가 생환한 것을 축하하여 축제를 열기로 한다. 시장으로서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듯 마을에 활력이 되살아났으면 하는 바램이 컸기 때문이다. 아델 역시 루크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옛날에 같이 다녔던 장소를 돌아다닌다. 시청 지하실은 학우들의 비밀 집회장소였다. 그리고 아델이 왜 변호사가 되려고 하였는지 이야기도 한다. 루크네 극장에서 <에밀 졸라의 생애>라는 영화를 보고 유태인 장교 드레퓌스를 단죄하려는 프랑스 정부에 대해 정의의 대변자로서 사자후를 토하는 졸라처럼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만의 비밀 장소는 마을 해변가의 등대이다. 그 등대에서 첫 키스를 나누었던 것이다. 갑자기 딸꾹질을 시작하는 아델과 딸꾹질을 멈추게 하려면 롱 키스가 제일이라는 피트. 이 순간은 피트가 아니라 진짜 루크로 돌아간다.

헐리우드에서는 갑자기 종적을 감춘 피트의 신분이 공산당 비밀조직책으로 굳어진다. 당국은 아마도 공산당 상부조직에서 피트를 해외로 도피시키려 하거나 입막음 하기 위해 죽였을 것이라 보고 그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드디어 루크의 생환을 축하하는 마을 축제가 열리고 빅밴드의 반주에 맞춰 피트와 아델이 블루스를 춘다. 클라리넷을 부는 루크의 고교 친구 스펜서는 훌륭한 뮤지션이 되어 있었다. 다만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상이용사는 루크 행세를 하는 피트가 못마땅하다. 의사 역시 루크가 지난 9년 반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을지 걱정이 된다고 말한다.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루크가 다른 곳에 가정을 꾸렸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루크가 피아노 연주하는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피트의 정체가 루크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시의 재정지원을 받아 극장 재건사업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동네 주민들도 힘을 보태 마제스틱 극장이 개관을 한다. 그랜드 리오프닝 네온사인이 다시 화려하게 명멸하는 가운데 첫 상영작품은 진 켈리 주연의 <파리의 아메리카인>이다.

그러는 사이에 해변에서 피트의 승용차가 발견되고 피트 역시 극장에 내걸린 자신의 영화 포스터를 보고 과거의 기억을 되살린다. 그러나 해리가 갑자기 쓰러지자 노인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끝까지 아들로서 행세한다. 그러나 아델에게는 사실대로 고백한다. 아델도 루크가 아닌 줄은 알았지만 믿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때 FBI 요원이 마을에 들이닥쳐 루크가 아닌 피트에게 반미(反美)활동 규제 위원회에 출석하라는 소환장을 전달한다. 온 마을에 소문이 퍼지고 피트는 루크가 아니라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 한 공산주의자로 바뀐다. 그리고 마제스틱 극장에는 손님이 끊어진다.

소환 당일 피트는 루크의 무덤 앞에서 아델과 작별인사를 한다. 아델은 극장을 다시 열 생각을 한 사람은 공산주의자일 리가 없다면서 에밀 졸라처럼 당당히 맞서 싸울 것을 주문하고 옛날에 루크가 변호사 지망생인 아델에게 선물하였던 미국 헌법전을 건네준다. 헐리우드 영화사로 돌아온 피트는 고문변호사의 자문에 따라 진술서를 낭독한 후 그가 알만한 몇 사람 이름을 대는 것으로 타협을 하고자 한다.

위원회의 청문회 실황은 TV로 생중계가 된다. 루크는 검사의 질문에 자기가 공산당 서클에 가입한 것은 젊은 혈기에 여자를 쫓아간 것일 뿐 무슨 이념적인 동기는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정치적 신념도 용기도 없는 보통사람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피트를 하나의 속죄양으로 삼기로 한 위원회에서는 공산주의자였다는 진술을 강요한다. 피트는 청문회장에서 보여지는 미국은 편협하고 냉혹하다며 건국지도자들이 추구하던 너그럽고 관대한 미국은 어디로 갔느냐고 외친다. 나아가 미국 헌법에 규정된 사상의 자유, 언론·출판, 집회·결사의 자유는 미국민들이 서로 약속한 권리장전이고 이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열변을 토한다. 자기가 잠시 경험했던 로슨 시의 전몰 용사들은 이와 같은 편협하고 잔혹한 미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환호하는 방청객을 뒤로 하고 피트는 청문회장을 걸어나온다. 당황한 위원회 측은 피트가 왕년에 쫓아다녔던 여자가 CBS 스튜디오의 프로듀서라는 것을 알아내고 피트를 순교자로 만들지 않기로 한다.

피트는 아델에게 전보를 쳐서 루크가 준 헌법책과 무공훈장을 돌려주겠다고 알린다. 역에 아델이 없으면 역장에게 전해주고 곧바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피트가 탄 열차가 로슨 역에 다다르자 전혀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의 각본은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그 핵심은 헐리우드에 불어닥친 매카시 선풍과 에밀 졸라가 사자후를 토했다는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다.

2차 대전 후 서유럽에서는 소련의 위성국들이 들어서고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의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는 1950년 2월 공산권의 세력확장에 속수무책인 국무부를 질타하고 국무부에는 공산주의자가 205명이 있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승전국인 미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여기던 여론이 이를 적극 지지하자, 상원에 반미활동 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고 FBI의 주도로 1954년까지 언론, 정치, 예술 부문에서 공산주의자 색출작업이 벌어진다. 그러나 매카시의 주장이 무슨 근거가 있다기보다 평소에 밉보이던 사람을 내쫒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자 미 의회는 1954년 사문(査問)결의를 통해 매카시를 사퇴시킨다.

이 영화에서처럼 어느 유명인사도 후버 국장이 찍으면 FBI의 형식적인 조사를 거쳐 공산주의자로 몰리기 일쑤였다. 당시 헐리우드에서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개관을 축하하는 전보만 쳐도 공산주의자로 몰렸다고 한다. 20세기 말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공산주의에 대해 비이성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일컬어 '매카시즘'이라고 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10월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대위 드레퓌스가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종신유형의 판결을 받은 것에서 비롯되었다(오른쪽 그림은 1895.1.5 행해진 불명예 해임식 장면). 유일한 증거는 독일대사관에 건넨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뿐이었는데 그가 유태인이라는 점이 혐의를 짙게 하였던 것이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고 재심(再審)을 요구하던 가족은 1897년 11월 진범인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지만, 군부는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그를 무죄 석방하였다. 그러자 에밀 졸라가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공박하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논설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의 형식으로 1898년 1월 13일자 [오롤]지에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프랑스 전체가 '정의와 진실, 인권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파와 '군(軍)의 명예와 국가질서'를 내세우는 反드레퓌스파로 나뉘었다.

마침내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석방이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적 쟁점으로 확대되면서 제3공화정을 위기에 빠뜨렸다. 1898년 여름 군부가 새로운 증거를 발견했다며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인하였으나, 그것이 날조된 증거로 판명됨에 따라 정부는 재심을 결정했다. 1899년 9월에 열린 재심 군법회의가 드레퓌스에게 재차 유죄를 선고하자 전세계적으로 프랑스를 비난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결국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드레퓌스는 석방되었다. 그는 법정 투쟁을 계속한 끝에 1906년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영화나 드레퓌스 사건, 수지 김 사건에서 줄곧 부각되는 것은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억울하게 고초를 당하는 민조(民草)들과 국가안보, 조직의 명예와 위신을 내세워 이를 억누르려는 국가권력, 그리고 양심에 따라 국가권력을 질타하는 지성 그리고 그 전달수단이 되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 할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야기된 국론분열의 위기 속에서 프랑스인들은 기본적 인권과 국가권력 특히 군부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터득했다. 또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참모습을 에밀 졸라는 용기있게 보여주었다.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에밀 졸라의 기고문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입니다.
내가 취한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서두르기 위한 혁명적 조치입니다. 그처럼 많은 것을 지탱해왔고 행복에의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인류의 이름에 대한 지극한 정열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이 외침으로 인해 법정으로 끌려간다 해도 나는 그것을 감수할 것입니다.
다만 청천백일하에 나를 심문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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