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이라크 교도소에서 이라크 포로들을 학대하였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전세계적으로 이라크 전쟁에 대한 회의론과 비판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더욱이 최근 미국에서 출간된 "공격계획"(Plan of Attack)이라는 책은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이 이라크의 석유자원을 노려 전쟁을 감행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쳐 퓰리처상을 수상한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가 쓴 이 책에 따르면 미국의 개전 명분, 즉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를 보유하고 있다거나 사담 후세인이 알 카에다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픽션에 불과했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와 군부 지도자들은 구체적인 확증도 없이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정 하에 9·11 사건을 구실로 이라크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존 부어맨 감독의 2001년작 영화 "테일러 오브 파나마"(The Tailor of Panama)는 1996년에 발표된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존 르 카르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영화는 가상의 파나마 정치현실을 무대로 강대국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픽션이 전쟁마저 일으킬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을 뒤흔드는 픽션이 비단 파나마 한 곳에서 이루어질 뿐이랴.
영화의 줄거리
영국 정보부 요원 앤드류 "앤디" 오스나드(피어스 브로스넌)는 미국으로부터 운하를 돌려받은 후 정정이 불안정한 파나마로 급파된다. (실제로 미국의 파나마 운하 반환은 1999년 12월 31일 단행되었다.) 앤디는 마드리드에서 정보활동을 하면서 여성문제로 외교적 물의를 일으켜 본국에 소환되어 온 참이다. 파나마 지역은 영국인이 200여명밖에 살고 있지 않지만 파나마 운하는 영국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운하의 자유통행을 방해할지 모르는 제3국으로 운하 운영권이 넘어가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파나마에 도착한 앤디는 영국 거류민 중에서 파나마 정·관계의 핵심에 선이 닿을 수 있는 유력한 인물로 양복재단사인 해롤드 "해리" 펜델(제프리 러쉬)을 지목하고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해리는 정·관계 요인들을 대상으로 영국 스타일의 맞춤양복을 만드는 고급 양복점을 운영하는 데다 미국인인 그의 부인 루이사(제이미 리 커티스)는 파나마 운하위원회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해리는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하여 거래은행으로부터 빚 독촉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보험사기로 옥살이를 한 감추고 싶은 전력이 있다.
앤디는 해리의 양복점에 들어가 몇 벌의 고급양복을 맞추면서 그에게 물 좋은 곳(정치인·고위관료·기업인들이 많이 모이는 호텔)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모처럼 VIP 고객을 맞게 된 해리는 파나마 중심가의 호텔로 앤디를 안내하고 자신의 유력한 고객들을 과장을 섞어가며 소개한다. 그 중에는 노리에가 장군 치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였던 미키 아브락사스도 들어있다. 미키 선생은 호텔 바에서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파나마는 천국을 만들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파나마의 권력자들이 그것을 모두 팔아먹었다."
미키 선생에게 파나마 도심의 고층빌딩들은 마약으로 쌓아올린 탑이요, 즐비한 은행들은 불법자금을 세탁해주는 세탁소나 다름없다. 해리는 파나마의 재야단체인 침묵당의 지도자인 미키 선생을 마음 속으로 존경하고 있다. 대학 시절 노리에가에 대항하여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얼굴의 반쪽이 일그러질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던 현지 여성 마르타가 그의 양복점에서 일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앤디는 파나마 주재 영국 대사관에 들어가 대사를 비롯한 외교관들에게 자신의 임무를 소개하고 활동계획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름대로 파나마 사정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는 직업외교관들은 파나마에 온지 얼마 안 되는 앤디의 정세판단이 허황돼 보인다. 그러나 본국 정부 실세의 밀명을 받고 온 그의 활동을 밀어주지 않을 수 없다.
앤디가 자신의 보험사기 전과를 아내에게 폭로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해리는 앤디가 말해주는 대로 파나마의 요인들에게 접근하여 그럴 듯한 정보를 수집, 제공한다. 그 중에는 파나마의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다. 대통령궁에 들어가 가봉을 하는 척 하면서 대통령이 중국과 대만을 순방하고 온 것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본다. 노련한 정보요원인 앤디는 머리 속으로 그럴 듯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놓고 해리로 하여금 관련증거를 수집하게 하는 것이므로 대통령과 나눈 몇 마디의 일상적인 대화도 고급 정보로 둔갑해버린다. 그 결과 앤디는 쾌재를 부르며 파나마가 운하 운영권을 중국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충격적(?)인 정보를 런던 본부에 보고한다.
앤디의 그 다음 목표는 운하위원회가 운하운영권의 매각계획을 어떻게 추진하는지 알아보는 일이다. 해리는 앤디가 자기 아내에게 접근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지만 할 수 없이 앤디를 자기 가족의 피크닉에 초대한다. 해리의 아내 루이사가 그녀의 남편이 마치 호모 연인들처럼 붙어 다니는 앤디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앤디는 루이사와 이야기하던 중 해리가 파나마 운하 기술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외로워하던 루이사를 마치 공주처럼 떠받들어 가정을 이루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시나리오를 뒷받침할 만한 고급정보가 없어 애타던 앤디는 해리를 게이 바로 끌고 가서 "두둑한 공작금을 받았으면 성의를 표시하라"며 루이사의 서류를 복사해오도록 지시한다. 지금쯤이면 운하 운영권을 중국 정부에 넘기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운하위원회에서 근무하는 루이사에게도 일이 떨어졌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해리는 한밤중에 일어나 루이사의 서류를 뒤져 카메라로 촬영하고 필름을 앤디에게 넘겨준다.
앤디의 첩보를 신뢰한 영국 정보국은 미국에도 정보의 일부를 흘려준다. 미국 정부로서는 운하 운영권을 뺏기다시피 파나마 정부에 넘겨주고 절치부심하고 있던 차에 그 운영권이 중국에 넘어간다는 것은 하늘이 뒤집히는(?)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정부는 파나마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는 것을 계기로 군사작전을 개시하기로 하고 파나마 반정부단체와 연결되어 있는 영국 정보당국에 공작금으로 2천만달러를 건네준다. 앤디의 시나리오가 몇 차례 정보당국의 손을 그치면서 그럴 듯하게 윤색되고 공작금은 1천만달러, 1천5백만달러, 2천만달러로 치솟은 것이다.
그러나 해리를 통해 반정부 운동의 지도자로 지목되었던 미키 선생은 더 이상 반정부 활동을 벌일 기력이 없다. 마르타와 함께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다니던 그는 권총 자살을 하고 만다. 마르타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달려간 해리가 망연자실해 있는 사이 미국 군대는 작전을 개시하고 앤디는 공작금을 훔쳐 파나마 공항으로 떠난다. 앤디를 뒤쫓다 허탕을 친 해리는 자신의 거짓말로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것보다 그의 아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된 것이 두렵기만 하다. 사태의 진전에 크게 놀란 파나마 대통령이 미국 정부에 극력 해명함으로써 상황은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지만 말썽꾼 앤디가 사라진 파나마와 해리의 가정에 평화가 찾아올지 여부는 해리를 비롯한 남은 자들의 몫이다.
감상의 포인트
밥 우드워드의 책에는 딕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그 휘하의 막료 등 여러 명의 '네오콘'이 등장하는데 이 영화의 스토리를 이라크 전쟁에 대입한다면 앤디에 해당하는 X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는 아버지 때부터 원수가 된 사담 후세인을 이라크에서 축출하기로 마음먹는다. 보스의 심중을 헤아린 대통령보좌관은 그의 심복 X를 중동지역에 파견한다. X는 이라크 안팎에서 정보를 수집하던 중 후세인이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첩보에 귀가 번쩍 뜨인다.
X는 미확인 정보를 본부에 보고를 하는데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백악관에서는 공작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개전의 명분을 쌓도록 X에게 지시한다. 그런 사이에 알 카에다가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 테러 공격을 가하고, '알아보나마나' 미 정보당국은 사담 후세인이 알 카에다와 손을 잡고 미국에 선제공격을 가한 것으로 확신하고 대통령에게 보고를 한다.
부시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 이라크 작전을 개시하도록 지시하고, 더 이상의 증거수집에 한계를 느낀 X는 슬그머니 발뺌한다. 국제여론이 더 이상 미국 편을 들지 않자 미국 정부는 하는 수 없이 유엔에 이라크 무기사찰을 할 것을 제안한다.
틀림없이 X의 첩보원 중에는 이 영화의 양복재단사와 같은 현지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X로부터 두툼한 공작금을 받은 대가로 소문으로만 들었던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전달하였다. 그리고 비록 사실무근의 픽션이지만 이러한 정보에 목말라 한 미 정보당국은 이것을 개전의 명분으로 삼았으리라 짐작된다.
진상규명은 이러한 불확실한 정보를 검증 확인하는 장치를 얼마나 가동하느냐에 달려있다. 역사학과 고고학에서는 구체적인 유물과 유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이론을 하나의 가설(hypothesis)로 치부할 뿐이다. 실체적 진실발견을 중시하는 형사소송에서도 사실인정의 자료로 삼을 수 있는지 알아보는 '증거능력', 증거가 사실의 증명에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는 '증명력', 유력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면 그에게 불리한 판단을 내리는 '입증책임'을 논하고 있다. 법정의 증인신문에 있어서는 상대방에게 '반대신문'(cross-examination)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는 왕년의 반체제 지도자 미키가 지금도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는지, 단지 술주정이나 하고 다니는지 검증하는 절차가 생략되었다. 비판적인 의견을 꺼낸 파나마 주재 영국 외교관은 앤디를 질투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는다. 이라크 개전에 대해 반대의견을 개진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미국 정부 내에서 따돌림을 받았다. 그 결과 터무니없는 픽션이 현실을 뒤흔들고 전쟁을 촉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後 記
X가 누구인지 밝혀졌다. 적어도 영화 속의 양복재단사 역할을 한 X의 현지 첩보원이 아마드 찰라비 이라크 국민회의 의장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다음은 이에 관한 미국 New Yorker지의 보도를 소개한 국내 신문기사이다.
이라크 친미 인사였던 찰라비는 미국을 어떻게 속였나
이라크의 대표적 친미(親美) 인사였던 아마드 찰라비 이라크국민회의(INC) 의장이 이란에 미국의 비밀정보들을 제공해온 의혹을 받고 있는 가운데, 그가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유도하기 위해 미국 내에서 온갖 로비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뉴요커 지가 최근 보도한 그의 막후 활동은 다음과 같다.
찰라비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유도하기 위해 먼저 여론조성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1996년 워싱턴시 조지타운에 거점을 마련하고, 미국 내 유대인 그룹들과 네오콘(신보수주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로비활동을 벌였다. 그는 1997년 6월 미 국가안보를 위한 유대인 기구에서 연설을 통해 "후세인이 축출되면 이라크에 친이스라엘 정부를 수립하는 일이 가능하다"며 "미국은 최소한의 군사지원만으로도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으로 네오콘 인맥에 접근해, 중동 민주화와 아랍인들의 인권보장을 위해서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때 주로 접촉한 인물이 현재의 딕 체니 부통령,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등이다.
부시 행정부가 집권하자 찰라비는 각종 채널을 통해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WMD) 등에 관한 허위정보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미 CIA(중앙정보국)에 이라크에는 이동식 생물학무기 연구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유엔에서 연설을 통해 이를 말했다. 그러나 전쟁 후 이는 거짓임이 밝혀졌다. 2001년 찰라비는 측근을 통해 후세인이 이라크의 병원 지하 등 20여개 소에 대량살상무기를 저장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이것도 거짓임이 밝혀졌다.
9·11 테러 직후 찰라비는 알 카에다와 후세인을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9·11 테러의 주역인 모하메드 아타가 바그다드 근교에 있는 특수시설에서 비행기 납치 훈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미국 언론들은 그의 주장을 대부분 사실로 보도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9·11 테러 6일 후 찰라비는 미 국방위원회에서 연설했다. 당시 그는 미국에 대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이라크를 바로 치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라크 내에서는 게릴라 저항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출처: 조선일보 200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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