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어웨이(Runaway Jury, 2004)

2003년 초 대법원은 사법발전 추진과제로 배심원 또는 참심원 제도의 도입을 제시했다. 그 이후 법조계를 중심으로 논의가 활발한데 이러한 제도를 도입하려면 법관만이 재판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은 헌법(제27조 1항)을 개정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 벌어진다면 어떠한 사태가 벌어질까. 미국의 경우 주마다 사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6명 또는 12명의 배심원이 피고인의 범죄사실 또는 당사자간에 다툼이 생긴 사실관계의 판단을 담당하므로 그만큼 일반인의 상식에 부합되는 재판이 가능하리라 본다. 반면 원·피고측이 배심원을 매수하는 등 부작용이 우려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정을 다룬 게리 플레더 감독의 법정영화 <런어웨이>(원제는 "Runaway Jury"로 'runaway victory'와 같은 뜻의 '결정적인 배심원'이라 해석된다)는 배심원 선정 및 평결을 둘러싸고 법정 안팎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싸움을 잘 보여준다.

 

영화의 줄거리

뉴올리안즈의 어느 월요일 아침 즐거운 주말을 보낸 증권사 직원들이 고객을 맞을 채비를 할 때 갑자기 괴한이 뛰어들어 총을 난사한다. 해고당한 데 앙심을 품은 전 직원이 자동소총을 들고 뛰어든 것이다.

2년 후 그 날 현장에서 즉사한 간부사원의 미망인이 총기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다. 뉴올리안즈 법원에서는 12명의 배심원을 선정하기 위한 절차가 진행된다. 배심원 선정(jury selection)이란 원고와 피고의 소송대리인이 후보자들의 인상과 성격, 직업, 경력에 비추어 재판 결과에 선입견을 갖고 있는지, 자기편에 유리한 평결을 내릴 것인지 검토하여 찬성, 반대하는 것을 말한다.

원고와 피고 양측은 자기편에 유리한 성향을 가진 배심원단을 구성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총기회사 측은 이 방면에 노련한 쥬리 컨설턴트 랜킨 피츠(진 해크먼)를 고용한다. 그는 조사원, 심리전문가, IT전문가들로 팀을 이루어 배심원 명단에 올라 있는 후보자들의 성향과 전력을 면밀히 검토한다. 반면 원고측 변호사인 웬델 로(더스틴 호프만)는 총기회사의 전 중역이 유리한 증언을 해주기로 했다며 배심원 선정에 돕겠다고 찾아온 심리 및 필체감정 전문가의 제의마저 뿌리치려 한다.

그 사이 배심원 소환장을 받은 니콜라스 이스터(존 쿠삭)는 많은 상금이 걸려 있는 온라인 게임대회 출전을 이유로 배심원을 사양하겠다고 버티다가 판사에게 면박을 당한다. 유권자 중에서 선출하는 배심원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시민의 의무이므로 하기 싫으면 나라를 떠나라는 말을 듣는다.

 

법정에서는 배심원 후보자를 놓고 원고와 피고 양측 변호사가 "이의 있다"(Objection), "이의 없다"(No objection)가 분분한데 법원 이웃건물에 본부를 차린 랜킨 피츠는 무선연락으로 변호사에게 일일이 지시를 한다. 피고측에 유리한 배심원을 선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랜킨 피츠의 발언권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번 소송에 임하는 총기회사들의 각오도 대단하다. 빈발하는 총기사고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잇따르는 터에 한 번 패소하면 피해자들의 소송이 봇물 터지듯 하여 회사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송이 제기된 것만으로도 주가가 하락하므로 관련회사들은 연대하여 소송에 임하기로 하고 배심원 선정에서부터 최고의 전문가를 투입하여 소송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등장한 시각장애 노신사를 배심원에서 제외시키려 하였으나 그는 루이지애나 주대법원의 판결을 인용하면서 배심원을 못할 이유가 없다고 재판부에 항변하여 배심원으로 선정된다. 배심원 선정이 끝나자 랜킨 피츠는 그들의 성향을 파악하여 안정적으로 자기편을 만들기 위한 공작을 전개한다.

이어 열린 배심원들의 첫 모임에서 배심원 대표를 선정해야 한다. 예비역 해병상사, 주부, 회사원이 자천 타천으로 나서지만 이스터는 조리있게 자기주장을 편 시각장애 신사를 추천한다. 몇 차례의 배심원 토의에서 이스터는 토론의 흐름을 좌우하는 언변을 구사하고 해병 출신의 배심원은 이스터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이때 원고와 피고 변호사에게 1천만불을 내면 배심원을 팔겠다(Jury for Sale)는 괴쪽지가 전달된다. 랜킨 피츠는 지문을 채취해보라며 펄쩍 뛰는데, 배심원 회의는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점심을 주문한 음식점에 배달사고가 나자 이스터는 담당판사가 식사하고 있는 법원 앞 레스토랑에 나가 판사로 하여금 배심원들의 식사를 사게 만든다. 또 친구가 죽은 날이라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배심원들이 법정에 나가 "국기에 대한 맹세"를 낭독하도록 한다.

랜킨 피츠는 배심원 토의가 묘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누가 배심원들을 조종하는지 알아볼 것을 지시한다. 법정에서 진행된 증거조사 과정에서 총기회사는 판매대리점이 총기밀매업자로 알려진 사람에게 총기를 112정이나 판매한 사실, 담당 매니저는 캔쿤으로 포상휴가를 다녀온 사실 등이 밝혀진다. 그 사이 이스터의 집에 괴한이 침입하여 서류와 컴퓨터 자료를 탈취해 간다. 직감으로 반대파의 책동임을 알아차린 이스터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때 괴쪽지를 원·피고 양측에 보낸 정체불명의 말리(레이첼 와이즈)가 자신의 영향력을 보여주겠다며 배심원 한 사람을 아웃시킬 것이라는 전화를 걸어온다. 반신반의하고 있는 사이에 회의 도중에 술을 마신 여자 배심원이 판사에 의해 축출 당한다. 이 일로 랜킨 피츠의 이스터에 대한 견제도 강화된다. 그의 집에서 가져온 MP3 플레이어에서 총기사고 재판이 열렸던 피츠버그 등 여러 도시의 유권자 명부가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스터는 누구의 편인지, 단순히 배심원 매수를 알선하여 돈을 벌려는 협잡꾼인지 혼란스럽다. 이스터는 말리와 성당에서 몰래 접선을 한다. 이들도 정체가 밝혀지면 사법방해죄로 처벌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말리와 어렵사리 회동한 랜킨 피츠는 50만 달러를 줄 테니 승소에 협력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여자는 천만불을 만들어놓은 다음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총총이 사라진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판사는 배심원들을 텍사스 접경도시의 모텔로 멀찌감치 격리시킨다. 배심원들은 재판이 열리는 날만 뉴올리안즈 법정으로 이동할 수 있을 뿐이다.

말리의 제안을 일축하였던 원고측 변호사는 믿었던 총기회사 전직 간부가 법정에 나타나지 않자 당황한다. 한 사람의 양심에 재판의 결과를 건다는 것은 너무 큰 도박이었던 것이다. 랜킨 피츠도 사태의 진전에 당혹감을 갖고 피고회사들에게 자금을 준비해달라고 요청한다. 증언을 하러 법정에 나간 총기회사 대표는 총기의 지문감식을 막기 위해 녹 방지 명분의 화학약품 처리를 한 것까지 폭로하게 만든 신문절차에 분개한다. 법원 화장실에서는 웬델 로와 랜킨 피츠가 마치 결투하듯 설전을 벌인다.

그 사이 랜킨 피츠가 보낸 조사원이 말리와 이스터의 학적부를 뒤져 정체를 밝혀낸다. 말리와 이스터는 몇 년 전에 발생한 가드너 시의 블랙웰 총기사고에서 원고측으로 나섰던 피해자의 가족들로서 랜킨 피츠를 낙마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배심원 평결이 내려지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여겨졌던 소송은 기막힌 반전을 맞는다. 랜킨 피츠의 대책본부는 도난신고를 받은 경찰이 급습하는 바람에 황급히 철수하고 랜킨 피츠 역시 피고측의 질책과 여론의 비난으로부터 쫒기는 신세가 된다.

 

감상의 포인트

<런어웨이>는 존 그리샴의 동명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존 그리샴 소설의 정석대로 해피엔딩과 정의의 승리로 끝난다. 원작은 O.J. 심슨 케이스 등 미국에서 실제로 발생한 여러 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식 배심원 제도가 어떠한 문제점을 갖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이슈은 미국 수정헌법 제2조에서 허용하는 민간인의 총기소지이지만 이것은 미국 대통령선거전의 단골 쟁점이므로 본고에서는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

영미의 배심원(陪審員) 제도는 사실관계 및 책임 유무의 판단(fact trial)을 배심원들에게 맡기고 刑 또는 금액의 양정은 법관이 맡아 하므로 국민의 참여 면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사법제도라 할 수 있다. 반면 참심원(參審員) 제도는 독일에서 발달한 것으로 사실문제와 법률문제를 법관이 참심원과 합의하여 결정하게 되어 있다. 참심원은 일반 국민 중에서 선거 또는 추첨으로 선임되며 주로 사형, 무기징역 등의 중형이 예상되는 형사사건과 명예훼손 등 일부 민사사건에서 실시된다. 배심원 재판(jury trial)은 영국과 미국에서 오랫동안 시행되어 왔는데 보통사람들이 법을 선언한다고 하여 영미법에는 "보통법(common law)"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본에서는 1920년대부터 배심원제도를 시행하다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폐지되었는데, 오랜 논의 끝에 2001년 참심원제를 도입키로 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배심원제도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지적된다. 비법률 전문가가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과연 정의의 실현에 부합될까, 원·피고 소송대리인이 배심원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과장된 변론을 하지는 않을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매수공작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그로 인하여 재판이 지연되고 심리무효가 되는 등 재판의 신속·공정을 해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그것이다.

참심원 제도 역시 비법률 전문가가 법관들에 의해 설득되고 만다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관존민비 사상, 옛날 과거제 같은 사법시험의 현실을 두고 볼 때 민간인이 법관에 맞서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배심원·참심원 제도는 재판비용의 증가를 가져오고 소송의 지연이 불가피한 만큼 현행 경력 법관제가 초래하는 재판의 오류를 얼마나 개선할 수 있을지 검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배심원·참심원 제도가 도입된다면 "법대로" 하기를 좋아하는 우리 국민은 법 운영의 현실이 어떠한지 실감하고 정의구현의 경험을 평생 간직하면서 법을 지키려 할 것이다. 또한 법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고 사법제도를 신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배심원 선정이 중요시된다면 배심원 자문(jury consulting)이라는 새로운 직종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참고] 미국의 배심원 제도

대한변호사협회(협회장 박재승)가 2004년 3월 4일 변호사회관에서 국민의 사법참여 방안에 관한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날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서울대와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미국 댈러스시의 채동배 판사는 '미국의 배심재판 상론'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고 질의응답을 가졌다.

채 판사는 "배심재판은 국가의 압제로부터 일반 형사피의자를 지키기 위한 제도로서 지나치게 열정적인 나머지 불합리하고 불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검사, 혹은 위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피의자에 대해서는 동정심이 없는 판사로부터 피의자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배심제에는 약점도 있지만 지난 200여년의 역사가 전문적인 법률지식이 없는 일반 서민들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실제 통계를 보더라도 판사판결과 배심평결이 거의 같은 결정을 내리고 있으며, 5∼10% 정도에서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배심재판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채 판사는 배심원 소환, 배심원 오리엔테이션, 배심원 기피, 배심원 재판절차 등 미국의 배심재판제도 전반에 대해 설명하고, 이어서 우리나라 연고주의와 배심제의 연관성, 배심원 사실심리의 범위, 배심판결의 유죄율과 비용, 플리 바겐의 비율 등에 대한 참석자들의 질문에 응답했다.

국민의 사법참여에 대한 논의는 법관에 의한 재판이 초래하는 불신과 함께 사법제도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얻지 못하면 진정한 사법개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정한 절차를 통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법관의 임무이자 법조계가 지향해야 할 방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대한변협신문 2004.3.15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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