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인메이커(The Rainmaker, 1998)

Whitman Park 2022. 2. 18. 08:45

IMF 체제하에서 구조조정 전문가들이 각광을 받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분야의 전문변호사들은 여기저기 법률자문에 응하느라 寧日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신문보도에 의하면 변호사들이 對고객관계를 고려하여 대기업에 대립된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극력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5대 그룹의 부당 내부거래에 관한 행정소송에서 기업측 변호인은 진즉 진용이 갖추어졌으나 공정거래위원회를 대변할 변호사는 구할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개인변호사를 위촉했다는 것이다(한국일보 1998.12.29자 28면).

변호사도 일종의 비즈니스를 하는 이상 돈이 될 만한 사건을 맡아 열심히 하는 것을 흠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대기업과 유착되어 서민들의 정당한 권리주장을 짓밟는다면 이는 별개의 문제이다. 신참 변호사의 입장에서 이러한 윤리문제를 다룬 1998년도 법정영화 <레인메이커(The Rainmaker)>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밀리언셀러 법률소설을 많이 발표한 존 그리샴 변호사의 신작소설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비록 "代父"와 같은 스케일은 느껴지지 않지만 엘머 번시타인의 영화음악처럼 제도화된 不義에 맞서는 개인의 위대함을 매우 절제된 영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

멤피스 법과대학원을 갓 졸업한 루디 베일러('굿 윌 헌팅'에서 주연을 맡았던 맷 데이먼)는 아직 변호사 시험을 패스하지는 못했지만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동안 아르바이트하던 술집 주인의 소개로 브루저 스톤(미키 루크) 변호사 사무실에 일자리를 구했는데 매달 1천달러 이상 수입을 올리지 못하면 그 미달액 만큼 부채를 지는 조건이다. 브루저는 사창가의 포주가 그리하듯이 소속변호사로 하여금 경찰서와 병원으로 쫓아다니며 사건을 수임하도록 한다.

루디가 맡은 사건은 로스쿨 워크샵에서 다루었던 부자 할머니의 유언장을 작성하는 건과 백혈병 환자를 위하여 보험회사에 보험금을 청구하는 건이다. 백혈병 환자 청년은 한창 젊은 나이임에도 보험회사가 골수이식에 필요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는 바람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집에서 죽을 날만 기다릴 뿐이다. 루디는 그레이트 베니피트라는 대형 보험회사를 상대로 한 보험금 청구소송을 위임받고 승소하면 1/3을 받기로 한다. 이 삼분의 일이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반적으로 변호사가 차지하는 몫이다. 그 대신 변호사는 착수금이나 실제비용(out-of-pocket expenses)을 받지 않으므로 큰 사건을 놓고 소송의뢰인과 공동으로 투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편 부자 할머니는 자식들을 불신한 나머지 1백만달러가 넘는 유산을 모두 TV 부흥사(TV Evangelist)에게 기부하겠다고 말하고 루디 더러 유언장을 작성해 오라고 한다. 그는 앞뜰의 잔디를 관리해주는 조건으로 할머니의 아파트에 세를 든다.

보험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야 하는 루디는 보험회사 출신의 노련한 덱 쉬플릿(대니 드비토)과 한 팀이 된다. 덱은 보험업무에 정통하지만 변호사시험에 번번이 낙방한 까닭에 법률보조원(paralegal)으로 일할 수 있을 뿐이다. '앰뷸런스 체이처' 마냥 병원을 순례하며 변호사 시험준비를 하는 루디의 눈에 기이한 젊은 부부의 모습이 비친다. 남편에 야구 방망이로 얻어맞아 중상을 입고 입원한 켈리 라이커(클레어 데인즈)의 모습에서 끄떡하면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에게 얻어맞아 몸이 성할 날이 없었던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병원에서 자주 만나는 동안 켈리를 동정하게 된 루디는 남편에게 이혼소송을 제기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켈리는 남편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며 막무가내이고 이혼소송을 제기하면 변호사인 루디부터 죽이려 들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마침내 루디는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그동안 배심원매수, 사기, 탈세 등의 혐의로 FBI의 내사를 받아온 대표변호사(브루저 스톤)의 신변에 불안을 느낀 덱과 루디는 독립하여 사무실을 차린다. 출자금은 승소했을 때 보험회사로부터 받을 수 있는 배상금이다.

보험금 청구소송에서 매우 노련한 1급 변호사 레오 드러먼드(존 보이트)가 보험회사의 소송대리인으로 나와 소의 각하 신청(motion to dismiss)을 구한다. 첫 재판에서 루디는 재판장으로부터 "변호사 자격도 없이 어떻게 법정에 나왔느냐"는 호통을 듣지만 애송이 변호사를 쉽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 드러먼드의 요청으로 그가 입회한 가운데 테네시주 변호사로서 선서를 한다. 드러먼드는 재판장을 설득해 5만-7만5천달러의 합의금을 제시하고 재판상의 화해(settlement)로 사건을 끝맺으려 한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보험회사 편을 드는 판사의 태도에 실망한 루디는 배상금으로 얼마를 받든지 자기 때문에 고생한 부모님께 드리고 싶다는 백혈병환자 청년의 부탁을 받아 보험회사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며 각오를 다진다.

 

그런데 재판장이 급사하고 인권변호사 출신의 흑인 판사(대니 글로버)가 그 뒤를 이으면서 상황이 급전한다. 덱은 승소는 따 놓은 당상이라며 "돈벼락을 맞게 되었다"(rainmaking)고 좋아한다. '레인메이커'란 가뭄 때 비를 내리게 하는 인디언 마술사처럼 부유한 고객의 소송위임을 받아 수입을 많이 올리는 법률회사의 스타 변호사를 일컫는 말이다. 신속한 소송진행(fast-track)을 주장한 러드먼드 변호사는 신임판사에게 무안을 당하고 와병중인 원고의 증언청취를 위해 판사가 입회한 가운데 사전 증거조사가 실시된다. 반대로 보험회사를 방문하여 실시된 데포지션(deposition)에서는 기이하게도 원고측에서 요청한 증인들이 모조리 회사를 그만둔 뒤이다. 루디는 시간당 1천달러 이상 받는 러드먼드를 비롯한 회사측 변호사들의 司法 시스템을 비웃는 오만함에 치를 떤다.

그 사이에 켈리는 다시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고 루디에게 도움을 청한다. 루디는 주인 할머니에게 켈리의 보호를 요청하고 보험회사 소송대책에 부심한다. 사무실이 도청되고 있음을 감지한 루디측은 역정보(逆情報)를 흘려 배심원 선정때 루디측이 배심원을 매수하러 들었다(도청한 거짓 정보의 내용)고 주장하는 러드먼드측을 곤경에 빠뜨린다. 배심원단이 구성되고 재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만 루디의 미숙한 소송진행은 사사건건 러드먼드에 의해 "이의 있습니다"(objection)라는 벽에 부딪치고 만다.

어느 비오는 날 켈리의 옷가지를 가지러 집으로 갔다가 그녀의 남편과 맞닥뜨린 루디는 그의 폭력행사에 맞서 야구 방망이를 빼앗아 휘두르다가 그만 그를 죽이고 만다. 모든 사태를 스스로 감당하겠다며 켈리가 루디를 집밖으로 내보내자 루디는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한다. 현행범으로 구속된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변호사를 자임하고 보석을 신청하는 동시에 정당방위로 기소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다.

법정에서는 보험회사가 8번이나 골수이식 수술을 위한 원고의 보험금 신청을 거절한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이냐, 보험회사측이 원고측 증인(보험금신청 접수담당자)의 증언을 의도적으로 방해한 것이 아니냐가 쟁점이다. 왜냐하면 실험적인 치료방법에 대하여는 보험회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덱이 수완을 발휘해 이미 사직한 보험회사의 담당자를 찾아내 증언대에 서게 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이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 러드먼드가 아니다. 전직 실무자의 증언은 회사의 홀대에 앙심을 품은 것으로 공정성을 결하였으며, 회사의 업무편람을 들고 나온 것은 회사의 물건을 훔쳐 가지고 온 것이므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루디측은 보험회사 사장까지 증인으로 불러내 보험회사가 가난한 사람들을 무더기로 보험에 가입시키지만 보험금을 청구하면 갖은 핑계를 대고 80% 이상 거절하고 있음을 밝혀낸다. 루디는 또 보험회사에서도 골수이식은 일반적인 치료방법으로 보험금지급이 타당하다(financially justified)고 한 보험회사 내부문건을 공개한다.

결국 배심원들은 원고측 승소를 평결하고 보험회사로 하여금 5천만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보험회사의 파산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어 루디와 덱은 보험회사를 응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지만 수고비를 한 푼도 건지지 못한다. 루디는 정당방위라 하여 석방된 켈리와 함께 멤피스를 떠나기로 한다. 그 자신 본의 아니게 켈리의 남편을 살해하였듯이 변호사가 의도하지 않은 양심(良心)의 선을 넘기도 하지만 승소를 위해 선을 자주 넘다보면 아예 '더러운 물에 사는 상어'처럼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감상의 포인트

법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는 데포지션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징벌적 손해배상은 어느 때 명하는 것인가, 배심원의 손해배상액 결정은 상소심에서는 깰 수 없는가 등의 의문을 자아낸다.

우선 '디스커버리'(증거의 개시/開示)라고 하는 미국 소송의 증거조사 절차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법정에서 증거조사에 들어가기 전에 일방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자기가 알고 있거나 갖고 있는 것, 당해 소송의 쟁점에 관계되는 사실 및 증거를 보이고 이를 열람시키는 것을 말한다. 주로 원고와 피고가 증거조사 단계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소송쟁점에 관한 질문서(interrogatory), 서류제출 요구서(request of document production), 사실인락(事實認諾)요구서(request for admission) 등을 보내고, 상대방이 제출한 증거서류와 자료를 열람하거나 증인에게 선서시키고 질문도 할 수 있다. 특히 선서에 의한 증언을 '데포지션'이라 한다. 데포지션은 정식 변론에 앞서 어느 한 편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진술자로 하여금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선서(oath) 또는 '진실과 부합된다'는 확약(affirmation)을 받고 진술한 것을 녹취(錄取)한 서면에 선서를 시킨 사람(통상 법원서기가 담당)의 서명을 첨부한 것이다. 질문은 상대방 변호사가 주로 맡아하고 증인도 자기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증언은 속기로 기록을 하거나 비디오로 녹화한다. 데포지션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부적당한 질문을 제지하는 법관 없이 실시하고 쟁점에 대한 관련성이 훨씬 완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법정에서의 변론과는 구별된다.

이 영화에서 배심원단이 15만달러의 실제 손해배상(actual damages) 말고도 5천만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을 결정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미국에서 불법행위로 인한 민사소송의 평결(verdict)은 주로 책임과 손해배상액에 관한 판단이다. 즉 피고는 원고의 권리를 침해하였는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피해를 보상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소박한 법관념을 가진 배심원들이 내리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피고에게 악의(惡意: 사정을 알고 행했다는 뜻)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에는 백만달러 이상 단위의 일벌백계식(一罰百戒式) 징벌적 손해배상을 명하는데 특히 제조물책임(products liability) 소송의 경우에 그 예가 많다.

끝으로 배심원이 평결로 정한 손해배상액은 얼마나 확정적인지 알아보자. 통상 12명으로 구성되는 배심원은 원칙적으로 전원합의의 방식으로 사실문제를 결정하는데, 재판장이 배심원들이 평결을 하기 전에 법률문제에 관하여 설시(instruction)를 할 수 있고, 평결 내용이 법과 증거에 반할 경우 당사자의 신청에 따라 평결을 무시한 판결(judgment n.o.v.)을 내리는 외에는 대체로 평결을 존중한다. 즉 사실발견자(fact trier)로서 배심원의 판단을 중시하여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상소심에서도 손해배상액은 그대로 인정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처럼 배심원들에 극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 변호사의 최종진술이 중요시될 뿐만 아니라 노련한 러드먼드 변호사 역시 징벌적 손해배상 평결을 듣고서는 항소를 포기하고 아예 파산신청을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존 그리샴의 다른 원작소설(The Firm, Pelican Brief)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법조계에 환멸을 느끼고 소송실무보다는 가르치는 일(teaching)이나 해보겠다며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현재 소송업무를 전폐하다시피 하고 변호사의 실체를 낱낱이 공개하는 소설 쓰기에 전념하고 있는 원작자 그리샴 변호사의 현재 활동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흘러간 영화’(Old Movies) 전체 감상: 리스트는 이곳을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