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환경단체와 주민들이 반대해 온 동강댐, 제주도 송악산 개발계획이 백지화되면서 환경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지켜볼 때 지역개발을 서두르는 정부나 이윤을 앞세우는 대기업과 맞서 싸우는 환경운동은 보통의 열정만 가지고는 하기 어려운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역주민을 위하여 대기업과 환경소송을 벌이는 작은 로펌의 변호사 이야기를 그린 1998년작 <시빌 액션>(A Civil Action; '민사소송'이라는 뜻)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법률쟁송에 허덕이는 의뢰인들로부터 많은 돈을 받아내는 변호사도 자칫하면 파산할 수 있다는 점, 승소 여부가 불투명한 대형 민사소송은 그 자체가 막대한 투자를 요하는 벤처 사업이나 다름없다는 점, 환경문제는 정부가 엄격히 법을 집행함으로써 실효를 거둘 수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 영화는 실화에 바탕을 둔 조나단 하르의 넌픽션 소설을 <쉰들러 리스트>, <어웨이크닝> 등으로 오스카 각본상을 탄 스티븐 자일랜이 영화로 만들었는데, 뚱뚱해진 존 트라볼타가 '앰뷸런스 체이서'(인신상해 사건 전문변호사)에서 신념에 찬 환경전문 변호사로 변신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명의 실록소설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1999년 김영사에서 <시빌 액션>이란 이름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이 사건의 전말은 뉴잉글런드 지방지 취재기자에 의해 인터넷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영화의 줄거리
이 영화는 종합병원의 의료사고로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된 의뢰인의 휠체어를 밀고 가는 주인공 잰 쉴리크만(Jan Schlichtmann) 변호사(존 트라볼타)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는 오늘날 미국에서 보편화된 인신상해(personal injury) 사건의 실상을 털어놓는다. 인신상해사건 전문변호사로서 제일 좋은 고객은 불구가 된 사람, 오랜 고통 끝에 죽은 사람, 사고에 따른 수입의 상실을 가장 많이 주장할 수 있는 40대 전문직 백인 백성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쉴리트만 변호사는 법정에 전신마비 환자의 휠체어를 밀고 나타나 배심원들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만으로 피고측 변호사로부터 가볍게 2백만 달러의 손해배상금을 받아낸다. 그것도 재판을 거치지 않고 당사자간의 화해(settlement)로 끝을 낸다.
포르셰를 몰고 다니는 잰은 보스톤에서 가장 인기있는 총각(Most Eligible Bachelor) 변호사이다. 그는 의뢰인의 딱한 사정을 동정한 나머지 감정이입(empathy)을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객관적인 판단을 그르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던 그가 라디오 토크쇼에 출연하였다가 매사추세츠주 우번이라는 시골마을에서 외아들을 잃고 홀로 된 여인의 전화를 받고 마음이 흔들린다. 아들이 백혈병에 걸려 갑자기 죽었는데 자기 마을에는 이렇게 죽은 어린이가 여덟 명이나 되어 아무래도 식수원의 오염이 원인인 듯 싶다는 것이다.
잰은 별로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소송이라 탐탁치 않게 여기면서도 그 마을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주민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식을 잃은 피해주민들이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기보다는 원인을 규명한 다음 가해자들로부터 사과를 받아내야겠다고 말하자 주민들을 위해 일해볼 마음을 굳힌다. 공교롭게도 마을에 들어가고 나올 때 포르셰가 과속했다고 교통위반 딱지를 떼었던 것을 하나의 통과의례로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잰은 마을의 식수원인 강의 상류에 자리잡은 그레이스사와 베아트리스 식품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청구원인(cause of action)은 원고회사가 과실(negligence)로 마을 어린이들을 사망에 이르게 한(wrongful death) 불법행위를 하였으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것이다.
잰은 그 증거로 마을 주변의 지질학적인 구조로 보아 회사가 불법 매립한 산업폐기물이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강으로 흘러들어 이 물을 마신 마을 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했다고 주장할 참이다. 잰은 전문지질조사팀을 불러 이 임무를 맡긴 다음 법원에 데포지션을 신청하여 변호사 사무실에서 증인신문을 계속한다. 갑자기 고열이 나는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는 도중 필사적인 인공호흡도 무위로 끝나고 그만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나와 증언할 때에는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피고회사인 그레이스사의 법률고문은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제롬 패처(로버트 듀발) 변호사이다. 그는 원고측이 주장하는 인과관계가 하나의 가설일 뿐이며 마을 어린이들이 사망한 것은 동전 던지기에서 연속으로 앞 면만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우연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작정이다. 과학적인 입증을 위해 원고가 고용한 지질조사팀은 법원의 영장을 가지고 피고회사의 공장부지까지 들어가 지하수공을 뚫는다. 아쉬운 것은 마을 주민 중에서 피고회사측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폐기물을 매립·투기하는 현장을 보았을 터임에도 시종 함구를 하는 것이다.
증거조사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자 잰의 로펌에서는 승소를 장담하며 은행에 대출을 신청한다. 그러나 소송은 언제 끝날지 모르고, 잰이 제시하는 증거가 배심원들을 충분히 설득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오랜 기간 무작정 소송비용을 들일 수 없는 만큼 미국에서는 한 해 78만건의 민사소송 중 1.5%에 해당하는 1만2천건이 정식 재판을 거쳐 배심원의 평결을 받고, 나머지는 당사자간의 화해로 끝난다고 한다. 잰은 재판을 끝까지 몰고 가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려는 고지식한 사람뿐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피고회사측에서 합의를 종용해오자 잰은 2,500만달러는 피해주민들에게 현금으로 보상하고 2,500만달러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투자할 것을 제안한다. 피고측 변호인들은 협상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아무 말 없이 협상 테이블에서 일어난다.
마침내 [앤 앤더슨 부인 대 W.R. 그레이스사 및 베아트리스 식품회사] 민사소송이 열린다. 계속된 증인신문과 증거조사로 소송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잰의 로펌에서는 신용카드 대출을 얻고 잡지구독을 중단하는가 하면 청소원까지 해고해야 할 정도로 자금난에 몰린다. 재무담당 파트너(윌리엄 메이시)는 소송비용 염출을 위해 복권을 사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다. 변호사 네 사람의 집까지 저당 잡히고 수집가용 아프리카 금화까지 내놓았지만 은행에서는 추가대출을 거절한다.
소송이 장기화될 전망을 보이자 노련한 패처 변호사는 스키너 판사(존 리쓰고우)에게 "지금까지의 증거조사 결과를 토대로 산업폐기물이 식수원을 오염시켰다는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중간평가를 내리고 추가 증거조사가 필요할 경우에 한하여 재판을 계속해달라"는 신청을 한다. 원고측 반발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은 질문을 3개항으로 압축하여 배심원들이 이를 판단하도록 한다.
법정 밖에서 배심원의 중간평결 결과를 기다리며 패처 변호사는 법조선배로서 잰에게 충고한다. "과학적인 증거조사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민사소송은 진실발견과는 거리가 멀다. 진실 비슷한 것만 있어도 소송에서 이긴다. 8명의 어린이가 죽었지만 법원에 소장을 제출하는 순간 8명의 어린 목숨은 돈으로 환산될 뿐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다." 그리고 지갑에서 2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0'을 6개 더 붙여줄 테니(2천만달러) 지금이라도 합의해주겠느냐고 제의한다.
배심원단의 평결 결과 그레이스사에는 책임이 없고 베아트리스사에만 책임성이 인정된다 하여 소송은 일단 휴정에 들어간다. 피고회사의 뉴욕 본사에서 협상을 제의해오자 원고측 변호사들은 기가 죽지 않으려고 최고급 호텔인 플라자 호텔의 스위트룸에 투숙한다. 그것도 신용조회가 쉽지 않은 아이랜드 신용카드를 가지고. 그러나 하버드 출신의 재무담당 이사는 잰을 맨해튼에 있는 하버드 클럽으로 불러 요트 타는 이야기를 떠벌리며 잰의 기를 꺾으려 든다. 그리고 합의금이 많을수록 자기네 책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므로 8백만달러 이상은 절대로 줄 수 없다고 잡아뗀다.
벼랑 끝에 몰린 잰은 이를 수락하고 유가족에 대한 보상액을 늘리기 위해 변호사비용을 승소액의 40%에서 28%로 낮추겠다고까지 하지만 피해주민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자식들을 죽게 만든 대기업의 사과를 듣고자 하는 것이지 그까짓 돈으로 위안을 삼을 수 없다고 말한다.
동료 변호사들은 떠나버리고 이 사건에 원고측 변호인으로 혼자 남게 된 잰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버스로 출퇴근하고 빵과 생수만으로 버티면서 소송의 반전을 꾀한다. 임차한 덤프 트럭으로 폐기물을 갖다 버린 피고회사의 운전기사를 찾아내는 등 몇 가지 결정적인 증거도 발견하는데 항소를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항소사건 50개중 5개만이 승소하는 상황에서 소송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는 잰은 그만 주저앉고 만다. 그의 파산신청을 심리하던 법관이 코넬대 출신으로 변호사업을 17년간이나 하였음에도 재산이 소형 라디오 하나 뿐이냐며 의문을 표하지만 그는 묵묵부답이다.
그러나 사건기록이 워싱턴의 환경청(EPA)에 넘어가면서 사태는 반전된다. 민사소송에서는 원고측이 패소하였으나, 정부가 막강한 환경보호법(CERCLA)을 무기로 그레이스사와 베아트리스사가 증거를 고의적으로 은폐했다 하여 폐기물 정화비용으로 6,940만달러를 추징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뉴잉글런드 지방에서 가장 어렵고 값비싼 환경사건으로 기록된다.
감상의 포인트
넌픽션 소설에 바탕을 둔 이 영화는 미국 민사소송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진실발견이나 사법정의(司法正義)는 허울좋은 구호에 불과하고 원·피고와 양측 변호인의 타협과 흥정을 벌이는 가운데 모든 절차가 썩어 있다(corrupted in the entire process)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일반의 인식을 뒤집는 것은 로펌도 대형 소송에서 이기려면 은행대출을 받아가며 막대한 금액을 투자해야 하고, 변호사비용으로 승소금액의 40% 정도를 받아내 수지를 맞추어야 한다는 장면들이다. 변호사는 전문직 자유업으로서 법률지식만 가지고 100% 수입을 획득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첨단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교통사고 등 인신상해 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벌어지는 것은 예사라고 한다. 바꿔 말해서 자본과 기술을 갖추어야 성공할 수 있고 실패하면 패가망신하는 벤처사업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셈이다.
이 영화는 환경소송에 있어서 일반 민사소송과 정부의 법집행 소송의 차이점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전자는 대등한 당사자로서 환경오염과 피해발생의 인과관계를 증명하고 피고측의 귀책사유를 입증할 수 있어야 승소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정부(EPA)가 원고가 되어 환경오염자에게 정화비용을 부담시키는 환경보호법(Comprehenive Environmental Response, Compensation and Liability Act)에 따라 당당히 책임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경소송, 제조물책임소송 등에 있어서 입증책임을 부담하는 변호사는 半 과학자·의학자가 되어야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실제로 쉴리크만 변호사는 9년여에 걸친 소송 끝에 파산지경에 이르렀지만 그의 분투기가 실명소설과 영화로 소개되면서 환경운동의 챔피언이 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정식으로 재판이 열리기 전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증인신문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미국 소송절차에 특유한 데포지션(deposition)이다. 데포지션이란 정식 변론에 앞서 어느 한 편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상대방이 내세우는 증인을 출석시켜 증거의 내용을 알아보는 것(discovery)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피고회사측 패처 변호사가 원고측의 신청 예정인 증인 여러 사람의 진술을 들어본 후 "저 사람들이 법정에 나오면 배심원들이 함께 눈물을 흘릴 것이고 우리는 지고 만다"며 한사코 증인신문에 들어가기 전에 재판을 끝낼 궁리를 하는 것이다.
데포지션에서는 증인으로 하여금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선서(oath) 또는 '진실과 부합된다'는 확약(affirmation)을 시키고 진술한 것을 녹취한 서면에 선서를 시킨 사람(통상 법원 서기가 담당)의 서명을 첨부하게 된다. 질문은 상대방 변호사가 주로 맡아하고 증인도 자기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증언은 속기로 기록을 하거나 비디오로 녹화한다. 데포지션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부적당한 질문을 제지하는 판사없이 실시하고 쟁점에 대한 관련성이 훨씬 완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법정에서의 변론보다 융통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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