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의 추억(2003)

Whitman Park 2022. 2. 18. 08:25

우리나라의 영화 <살인의 추억>(감독 봉준호)은 여러 모로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반경 3km 지역에서 9차례나 발생했고, 수사에 동원된 경찰은 일반경찰과 여경, 기동경찰을 모두 포함해 연인원 2백만명이 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경찰의 수사를 받은 용의자는 모두 2만1천명에 달했고, 지문대조 수사 4만여명, DNA 감정 570명, 모발감정 180명, 부수범죄자 검거도 1천5백명에 이르렀다(연합뉴스 2003.09.14).

그러나 2003년 대종상을 석권한 이 영화가 주목을 받은 것은 엄청난 경제적 파급효과 때문이다. 2003년 상반기 관객 510만명을 동원한 최대 히트작으로서 제작사는 350억원 이상 벌었고, 국내경제 각 분야에서 688억원 어치의 생산이 이뤄졌다고 한다. 새롭게 생긴 부가가치는 303억원이나 되어 소나타 승용차 2,800대를 생산 판매해 얻는 수익에 필적했다는 것이다(한국은행 분석).

안타까운 일은 제7차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지났고 남은 두 사건도 2년여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영화 마지막에 경찰관 옷을 벗고 평범한 세일즈맨으로 변신한 주인공이 사건 현장을 찾아갔는데 범인으로 여겨지는 남자도 현장을 찾아왔었다는 말을 듣고 피가 역류하는 듯한 표정으로 스크린 가득히 노려보는 엔딩 장면은 오랫동안 관객들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영화의 줄거리

이 영화의 대본은 1996년 초연된 김광림 연출의 연극 <날 보러와요>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실제 사건은 동일범 소행으로 보이는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이다.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부녀자 10명이 성폭행 당한 후 살해되었는데(그 중 8차 사건은 범인이 검거되었으나 나머지 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짐) 이 영화에서는 1986년 10월의 두 번째 사건부터 다루고 있다.

잘 익은 벼가 황금 물결치는 가을 들판의 농수로에서 두 손이 뒤로 묶인 젊은 여자의 사체가 발견된다. 현장에 출동한 박두만 형사(뚱뚱해진 송강호)의 눈에는 그저 그런 살인 사건으로 비친다. 현장에서 뚜렷한 물증도 확보하지 못했고 비슷한 수법의 전과자, 인근지역 우범자를 찾은 끝에 용의자를 붙잡아 신문을 하고 현장 검증도 하지만 그를 범인으로 단정하기에는 결정적인 그 무엇이 빠져 있다.

그 때 이 사건 수사본부에 서태윤 경장(김상경)이 부임해 온다. 사건을 해결해보겠다고 서울의 엘리트 형사가 자원해온 것이다. 그는 과학수사를 지향하면서 형사의 육감이나 범인의 자백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큰소리친다. 예컨대 용의자의 신발을 가지고 범행 현장 부근에 자국을 만들어 놓는 것이나, 범행의 시나리오를 형사가 용의자에게 주지시키는 것은 검찰이나 공판정에서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고 핀잔을 준다. 아니나 다를까 기자들이 몰려든 현장검증 자리에서 유력한 용의자 백광호(박노식)가 범행을 부임하고 수사본부장은 그 책임을 물어 전격 해임된다.

새로 부임한 신동철 서장(송재호)은 서태윤 형사에게 힘을 실어준다. 서 형사의 추리에 따라 전경 2개 중대를 풀어 일대를 수색한 끝에 또 다른 희생자를 발견한다. 박 형사는 "서류(사건 기록)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서 형사가 아니꼽기만 하다. 그는 미국 FBI와 한국 경찰을 비교하기를 "미국은 땅이 넓어 머리를 굴려야 하지만, 땅이 비좁은 한국에서는 두 발로 뛰어다녀야 한다"고 강변한다. 두 사람의 신경전은 종종 서장이 보는 앞에서 멱살을 잡는 싸움으로 발전한다.

1980년대 중반 대통령 행차 때에는 학생과 주민들이 연도에 늘어서 환영해야 했고, 야간 민방공 훈련이 실시되었다. 비 오는 날 젊은 여자를 대상으로 사건이 벌어지는 것에 착안하여 비 오는 날이면 여경에게 빨간 옷을 입혀 현장 부근에 투입하기도 했지만 아무 성과가 없다.

성폭행 현장에 범인의 음모가 한 오라기도 떨어져 않다는 점에서 범인이 무모증이 아닐까 의심한 박 형사는 심지어 목욕탕 안에 들어가 범인인 듯 싶은 사람을 쫓는다. 수사본부에서 일하는 여경이 범행이 일어나던 날이면 라디오 방송에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신청곡으로 방송되었다는 말을 한다. 주소를 적은 신청엽서를 찾으러 방송국으로 달려가지만 이미 쓰레기통을 비운 뒤이다. 답답해진 박 형사는 점집을 찾아가 경찰서 정문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정문의 위치를 바꾸자고 건의하는가 하면 허수아비(제웅) 부적을 세우고, 사건 현장에 가서 종이에 먹물을 붓고 범인의 얼굴이 드러나기를 고대한다.

그 때 으슥한 산 속에서 여성 속옷을 늘어놓고 자위행위를 하던 남자를 뒤쫓아 가보니 석재공장에서 일하는 중년 남자이다. 중병에 걸린 부인을 간병하던 그가 공기 좋은 곳에서 생리적 욕구를 변태적으로 해소하려다 누명을 쓸 뻔한 것이다. 사건 수사의 중압감은 박 형사의 꿈속에 마저 나타나 그를 괴롭힌다. 살인 사건은 계속 발생하고 증거 수색을 위해 전경을 차출하려 해도 시위진압에 동원되어 허탕치기 일쑤이다.

 

어느 비 오는 날 라디오 방송에 문제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재빨리 방송국에 달려간 여경이 신청엽서의 주소를 알려온다(실제 사건에서 라디오 방송국에 엽서를 보낸 용의자는 없었음). 희망곡 신청자 박현규(박해일)는 군대를 제대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얌전하게 생긴 청년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여성 피해자가 범인의 손길이 매우 부드러웠다는 진술을 한 터라 두 형사는 그를 진범으로 단정한다. 한사코 부인하는 박현규를 종전의 수사방식으로는 자백할 때까지 가혹수사를 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장에서 채취된 정액 샘플을 박현규의 것과 대조하기 위해 미국 수사당국에 DNA 검사를 의뢰한다. 처음 범인으로 지목했던 정신지체자(백광호)가 유일한 목격자라면 그가 진술한 범행 순서는 그가 지켜본 범인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DNA 검사 결과와 증인의 진술이 있으니 얄밉게 부인하는 박현규도 끝장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문제가 되었던 부천서 형사의 성고문 사건 뉴스 때문에 술 마시던 조용구 형사와 주민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고 자기를 괴롭히던 조 형사를 못 박힌 각목으로 내리친 백광호가 도망치다가 열차에 치여 죽고 만다. 유력한 목격자를 잃고 허탈해 하는 것은 서태윤 형사이다. 그는 미국에 보낸 박현규의 DNA 검사 결과에 기대를 하면서도 그 결과와는 무관하게 박현규가 범인이라고 단정짓는다. 사건 현장에서 부대끼면서 그도 어쩔 수 없이 박 형사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사건 수사에 절망한 박 형사는 경찰을 그만 둔다. 10여년이 지난 오늘 녹즙기 회사의 간부가 된 박두만은 화성 부근을 지나다가 옛날 사건의 현장인 농수로를 찾아간다. 그 때 길을 지나가던 소녀가 뭘 하냐고 묻고 며칠 전에도 낯선 아저씨가 그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말한다. "살인의 추억"을 간직한 범인이 아직 살아 있다니 …….

 

감상의 포인트

범죄수사의 관점에서 이 영화는 과학수사의 필요성과 공소시효의 타당성이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 이 영화의 무대가 된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혈액흔을 가지고 감정 수사를 벌였으나 혈액이 섞이지 않은 체액(타액, 정액)의 경우에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유전자의 고유 특성을 통해 범인 여부를 알아보는 DNA 감정이 효과적이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우리나라 경찰의 수사기법이 한 층 업그레이드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0년 후에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에는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유류품을 가지고 DNA 감정을 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엔딩 장면의 송강호 눈빛처럼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버젓이 활보하고 다니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살인 충동이 영원히 억제된 것이 아니라면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그의 살인행각이 언제 재연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이므로 유일하게 목격자가 확보되었던 1988년 9월의 제7차 사건의 범인은 설령 잡힌다 해도 실체적인 심판을 받지 않고 면소(免訴)판결을 받게 된다. 물론 공소시효를 인정하는 이유는 범죄행위가 종료되고 장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증거판단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당해 범죄에 대한 사회의 관심도 희박해지고 피고인의 생활안정도 도모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수지 김 사건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무고한 사람을 죽인 범인임이 밝혀졌음에도 과실치사죄로 인정받아 그 공소시효의 완성으로 되레 큰소리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법적으로는 인륜에 반하는 범죄는 공소시효가 없다고 하여 예컨대 유대인 학살범과 같이 양민을 대량 학살한 자들은 언제까지나 소추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2·12 사태의 주동자, 5·18 민주화항쟁의 진압자를 공소시효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은 국민들의 법 감정에 어긋난다 하여 문민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의 일환으로 1995년 말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공소시효특례법)과 [5·18 민주화운동등에 관한 특별법](5·18특별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의 영화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잘 익은 벼가 바람에 흔들리는 첫 장면은 미국 영화 "위트니스"의 첫 장면에서 옥수수 밭이 물결치는 장면 이상으로 감동적이다. 여러 구 사체의 마네킹 처리도 수준 급이고, 박 형사가 약혼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약혼녀의 종용에 못 이겨 경찰을 사직하는 것도 리얼리티에 손상이 없다. 이 영화는 두 형사가 범인을 쫓으며 고뇌하는 심리를 영상으로 잘 표현한 까닭에 9월 27일 스페인의 제51회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과 신인 감독상을 수상했다. 일본, 홍콩, 프랑스, 독일 등지에 수출된 금액이 이미 300만 달러를 넘어섰다고 한다.

 

* 이춘재가 출석하여 범행을 자백한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 501호 법정

PS. 이춘재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임을 자백

2020년 11월 2일 이춘재(56)가 재심 법정에 나와 차분한 말투로 자기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임을 자백했다. 이춘재는 분노조절장애, 왕성한 성욕, 치밀한 범행 계획 등 영화 속 연쇄살인범의 요건을 갖추지 않은 매우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물이었다.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키 170cm 정도에 체형은 왜소했다. 자신 대신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53) 씨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출처: 조선일보 2020.11.2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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