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폰부스(Phone Booth, 2003)

Whitman Park 2022. 2. 18. 08:15

우리나라의 휴대폰 보급률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10대의 경우 10명중에 8명이 휴대폰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유선 공중전화도 널리 쓰이고 있다. 워싱턴 일원에 저격 사건이 발생하면서 무기한 개봉이 연기되었던 <폰부스>(Phone Booth, 감독 조엘 슈마허)는 그 사정의 일단을 보여준다. 유선 공중전화는 휴대폰이 없는 사람이 주로 이용하지만 휴대폰을 여러 개 가진 사람도 자주 이용한다는 것이다.

최근 이태리에서 배우자에게 외도가 들통나 이혼 당한 사람의 87%가 휴대폰의 통화기록이나 문자 메시지 때문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휴대폰 통화기록 때문에 이혼 당한 사람이 통신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한 사례가 있었다. 회사 명의의 휴대전화를 쓰는 C모씨는 2003년 11월 "통신회사 직원이 회사 명의의 통화기록 청구서를 위조한 아내에게 통화명세서를 제공하는 바람에 외도 사실이 들통나 가정이 파탄 났다"며 통신회사와 그 직원을 상대로 1억 5,04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방법원에 냈다.

 

영화의 줄거리

이 영화는 어느 한 나절 동안 뉴욕 맨해튼 8 애브뉴와 53번가 모퉁이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스토리는 단순한 편이다.

뉴욕의 전화에 관한 통계를 보면 5개 구(borough)에 8백만명, 외곽도시까지 합치면 12백만명이 살고 있는데, 이들을 위하여 50여 전화회사가 1천만 회선의 통신서비스를 제공한다. 휴대폰이 3백만대 이상 보급되면서 공중전화는 점차 철거되는 운명에 처해 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는 6개월에 40여 건의 도난사고가 일어나 개방형으로 바뀌는 추세에 있다.

주인공 스투 세퍼드(콜린 파렐)는 연예계 홍보담당자(media agent)이다. 그는 조수를 데리고 다니면서 여러 대의 휴대전화로 쉴 새 없이 통화를 한다. 상대방은 스타 지망생, 연예기획사, 언론의 연예담당기자들이다. 그가 조수를 물리치고 오직 공중전화만 사용할 때가 있다. 그것은 신인 여배우 팸(케이티 홈즈)하고 통화할 때이다. 오늘도 그녀와 러브 호텔에서의 밀회를 약속하려고 53번가 웨스트 사이드의 폰 부스에 들어간다.

그 때 중년의 피자 배달원이 폰부스에 다가와 피자를 시키지 않았느냐며 이미 요금도 지불한 것이니 받으라고 떼를 쓴다. 정신이 온통 오늘 저녁의 밀회 약속에 팔려 있던 스투는 피자 배달원에게 짜증을 내며 홈리스 부랑자에게나 주라고 소리친다. 통화를 마치고 폰 부스를 떠나려던 스투는 방금 전 통화를 끝낸 공중전화의 벨이 울리자 무심코 받아든다.

전화선 저쪽의 굵은 목소리의 남자는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며 스투의 아내 켈리에게 불륜의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한다. 스투의 휴대폰 단축 다이알 1번은 켈리임에도 굳이 공중전화를 쓰는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스투가 전화통에 욕을 하고 떠나려는데 상대방은 전화를 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거라고 하면서 인근 노점상이 거리에 내놓은 장남감을 총으로 쏘아 맞춘다. 상대방은 스투의 일거수일투족을 라이플 조준경으로 감시하면서 전화로 명령을 하는 것이다.

그때 거리의 여자가 급히 연락할 데가 있으니 전화를 빨리 끊으라고 유리문을 두드리며 재촉하지만 스투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그러자 창녀의 기둥서방이 왜 이곳에서 영업을 방해하느냐며 야구 방망이를 들고 와 위협하는데 전화상의 협박범은 스투에게 꼼짝 말라고 하면서 야구 방망이를 든 사나이를 저격한다. 순간 사나이를 살해한 범인으로 몰린 스투는 해명하지도 못하고, 전화를 끊지도 못하고 진퇴양난에 빠진다. 협박범은 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포르노 상인, 주식투기꾼들을 처단하였다고 큰소리치며 마누라 몰래 바람 피우는 주제에 남을 깔보고 모욕하는 스투같은 남자가 그 다음 척결 대상이라고 선언한다.

 

스투는 저격범에게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나냐"고 반문한다. 저격범은 비싼 양복을 입고 조수까지 데리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며 전화질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고 대답하고, "돌발행동만 취하지 않으면 절대 목숨은 해치지 않겠다"고 타이른다.

그때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하고, 경찰특수기동대(ESU)까지 동원되어 그 일대를 포위한다. 현장에 달려온 뉴욕시경의 강력반 형사(포레스트 휘태커)는 예사로운 상황이 아님을 직감하고 경찰대원에게 폰부스에다 총을 쏘지 말라고 이른다. TV 방송사가 현장 중계를 시작하자 협박범은 스투에게 TV 카메라를 향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라고 명령한다. 이내 스투의 아내 켈리(라다 미첼)가 TV 긴급뉴스를 보고 달려오고, 팸도 구경꾼들 사이에서 현장을 지켜본다.

상황을 파악한 강력반 형사는 스투가 전화하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전화 감청을 시도하지만 그 전화는 도청방지 장치가 되어 있는 데다 필라델피아 전화국의 중계를 거치기 때문에 감청이 불가능하다. 형사는 폰부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주변건물에 저격범이 있다고 단정하고 창문마다 조사를 하라고 경찰대원들에게 지시한다.

범인은 스투가 아내 몰래 딴 여자에게 전화를 하고 섹스를 하려 했다며 그의 부정한 행동을 단죄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범인은 폰부스 천장에 권총이 있으니 이것을 꺼내라고 명령하고 이를 거부하면 켈리나 팸이 죽게 될 거라고 말한다. 아니 두 사람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면 나머지 한 명은 자기가 처리해주겠다고 조롱한다.

하는 수 없이 스투는 범인이 시키는 대로 TV 카메라를 향해 고백을 한다. 자신은 과시욕에 빠져 있었고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만 상대를 하였으며 거짓말을 밥먹듯 하였다고 외친다. 기자들에게 허위사실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퍼뜨리고, 가짜시계를 자랑스럽게 차고 다녔으며, 젊은 여성들에게는 자신이 미혼이라고 속였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아내를 향해 자신의 참모습을 알면 실망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딴 여자와 바람 피울 생각을 할 때에는 양심상 결혼반지를 끼고 있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는 자신은 더 이상 선택권이 없다며 울부짖는다.

경찰은 스투를 협박하고 있는 저격범이 버클리 호텔 604호실에 투숙하고 있음을 알아내고 특공대원을 잠입시킨다. 범인은 스투에게 "너는 모든 잘못을 회개했으니 편히 죽으라"며 죽기 싫거든 권총을 꺼내어 나를 쏘라고 조롱한다. 마침내 증오의 눈빛으로 스투가 권총을 집어들고 폰부스 밖으로 나오는 순간 경찰의 총격이 가해지고 스투는 땅에 쓰러진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뜯어볼수록 재미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이 우연찮게도 2002년 10월 미국 워싱턴 일원에서 시민들이 마음놓고 거리를 다닐 수 없게 한 저격사건이 벌어진 때와 일치한다. 영화가 저격범을 부추겼다는 누명을 쓰기 쉬워 영화 "폰부스"는 반년이 지난 2003년 4월에야 개봉되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경찰이 가짜 총탄을 쏘았기에 부인의 용서를 받으며 살아난다. 그렇다면 그를 협박한 범인은?

사람이 반경 1m도 못되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을 수 있으며, 이것을 소재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점도 흥미롭다. 전화통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주인공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의논할 상대도 없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경찰은 그를 체포하러 왔지 도와주러 온 사람이 아니다. 아내도 애인도 구경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강도 높은 긴장감을 안겨주는 것은 4대의 카메라가 주인공과 대립관계에 있는 조연들을 동시에 촬영하여 화면분할 기법으로 관객들에게 전체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이를 '카메라 발레 기법'이라 함). 그래서 이 영화는 시나리오 작가인 래리 코헨과 촬영감독인 매튜 리바티크가 높은 점수를 받았다. 래리 코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도심의 공중전화 박스는 아주 매력적인 공간이다. 도시의 한가운데 있어 빨갛고 파랗고 아름답게 치장을 한다. 매일 수천명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감에도 누구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밀회를 즐기고 있는지, 협박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도심 속에서 철저하게 고립된 공간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폰부스가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강력한 덫이 되기도 한다."

 

법률적인 관점에서도 이 영화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는 통신의 비밀이다. 폰부스는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통화 내용을 엿듣지 못하도록 밀폐된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그 때문에 통화자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법률이 권익을 보장함으로써 오히려 본인이 온갖 사기와 협잡의 피해자가 되는 사례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둘째는 전기통신 감청의 문제이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정권유지를 목적으로 당국이 불법감청을 자행하는 일이 많았기에 통신비밀보호법상 감청대상 범죄 내지 감청의 범위가 극히 제한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폰부스"와 같은 저격 사건(형법 제24장 살인의 죄, 총포·도검·화약류등단속법 위반죄)이 벌어졌다면 사법경찰관은 통신비밀보호법 제5조 및 제6조에 의하여 법원으로부터 통신제한조치의 허가를 받아 주인공의 전화통화를 감청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1986년에 제정된 펜/트랩법(Pen Register and Trap and Trace Statute)에 의하여 전화 등 유선통신의 접속정보(통화내용은 제외) 등을 실시간으로 취득할 수 있다. 종전에는 연방법원이 오직 당해 법원의 관할지역에서만 펜/트랩 장치의 설치를 허가할 수 있었으므로 이 영화에서처럼 필라델피아 전화국이 관련된 경우에는 뉴욕주뿐만 아니라 펜실베니아주 연방법원의 영장(subpoena)을 발부 받아야 했다. 그러나 2001년 9·11 테러 사건 직후에 제정된 애국법(USA Patriot Act)에 의하여 영장집행의 효력이 확대되어 관할지역에 관계없이 미국내 어떠한 통신서비스제공자에 대해서도 통신정보를 지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서두에서 소개한 사건처럼 유선이든 휴대폰이든 전화통화 사실은 중요한 개인정보로서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에게도 제공해서는 안 되는 비밀정보가 되었다는 점이다.
서두의 사건에서는 회사가 휴대폰 사용계약자로서 이동통신사용료를 지급하므로 통신회사는 당연히 회사에 통화명세서를 교부해야 한다. 그러나 제3자가 회사의 위임장을 받아 통화명세서를 요구할 경우 통신회사가 통화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별도의 주의의무를 기울여야 하는지는 이왕 소송이 제기된 이상 법원의 판단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이 영화는 최고로 비밀을 지켜야 할 상대가 바로 배우자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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