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너미 앳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 2001)

Whitman Park 2022. 2. 18. 08:10

1년 전의 9·11 테러 악몽이 미국민들을 억누르고 있는 가운데 2002년 10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 시 일원에서는 길 가던 시민들이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기에 주민들은 알카에다 테러와는 무관하다는 데 일단 안도하면서도 외출과 조깅 등 옥외행사를 자제하고 얼굴 없는 범인이 하루 속히 검거되기를 고대했다. 10월 25일 흑인 용의자 두 명이 체포되면서 10명이 죽고 2명이 중상을 입은 연쇄저격 사건은 막을 내렸다. 범인들이 타고 다니던 차 안에서는 저격살인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223구경 소총(부시매스터 XM-15)과 정밀조준에 쓰이는 망원경, 삼각대가 발견되었고, 뒷좌석과 연결된 트렁크 뒷쪽에는 총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그 동안 미뤄왔던 영화 <에너미 앳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를 비디오샵에서 빌려다 보았다. 2차 대전 최대의 격전지로 꼽히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저격병으로 활약한 소련 영웅을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 '성문 밖의 적'이라는 뜻의 원제는 서로마 제국이 망할 때 오도아케르가 이끄는 게르만 용병인 야만인(野蠻人, Babarians)들이 로마 성을 포위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

1942년 여름 독일군은 볼가 강변의 산업중심지이자 석유 공급기지인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를 기갑부대를 앞세워 포위 공격한다. 날이 갈수록 전황이 불리해지자 소련 적군(Red Army)은 국민병을 징집하여 전선에 투입한다. 우랄 산맥에서 양을 치며 농사일을 하던 바실리 자이세브(쥬드 로우, 영화 <리플리>의 상대역)도 스탈린그라드 전선에 투입된다. 20대 초반의 그는 민간인들도 함께 타고 있던 열차에서 책을 보던 여대생을 잊지 못한다.

1942년 9월 20일 보충병을 태운 나룻배가 볼가 강을 건널 때 독일 공군기의 기총소사를 받아 사상자가 속출한다. 그렇지만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전선을 이탈하는 것이기에 무조건 총살이다. 무기도 크게 부족하여 둘 중의 한 사람이 총을 잡고 뒤따르는 사람은 그가 죽으면 그 총을 들고 싸워야 하는 식이다. 작전의 개념도 없다. 독일군의 기관총 세례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돌격해야 한다. 그러다가 물러서는 날이면 독전대의 총알받이가 된다. 시가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날 바실리 역시 소총 하나 없이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갔다가 쓰러지고 만다.

그때 소련군의 선전 삐라를 싣고 시가지를 달리던 차가 독일군 집중포화를 맞고 전복된다. 가까스로 차에서 빠져 나온 소련군 장교는 병사들의 시체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독일군 지휘소 부근에 장교들이 얼씬거리는 것을 보고 총을 집는다. 안경을 쓴 그가 멈칫거리는 동안 그 부근에 숨어 있던 바실리가 자기가 총을 쏘겠다고 자청한다. 늑대 사냥을 하며 사격술을 연마해온 바실리의 사격 솜씨는 백발백중, 단숨에 독일군 장교 여섯 명을 쓰러트린다.

그 때 소련군 '지도자' 스탈린은 후루시초프를 스탈린그라드로 보내 죽기를 각오하고 도시를 방어하도록 명령한다. 사실 대포와 탱크, 전투기를 앞세운 독일군에 비해 소련군이 우세한 것은 병력수 뿐인데 대부분 오합지졸이다. 인해전술에도 한계가 있어 고민하는 후루시초프에게 한 젊은 장교가 전황의 반전을 꾀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는다. 바로 바실리의 사격솜씨를 목격한 정치위원 대니로프(조셉 파인스, "세익스피어 인 러브"의 주인공역)이다. 대니로프는 앞으로 진격해도 독일군에게 죽고 뒤로 후퇴해도 독전대에 죽음을 당하는 소련군 장병들에게 조국에 대한 긍지와 애국심,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야 한다고 건의한다.

그는 군대신문에 우랄 목동이 독일군 장교를 저격한 것을 대서특필하고 바실리의 전과가 올라갈 때마다 그의 영웅적인 모습을 본받자고 선동한다. 바실리는 이제 소련 전국민의 주목을 받는 영웅이 된 것이다. 실제로 독일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상사들을 줄줄이 소대장으로 진급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장교들은 전선에서 노출되는 것을 극력 삼가게 된다.

바실리가 전국에서 답지하는 위문편지에 답장을 쓰기 위해 대니로프와 함께 묵고 있는 민가에 이웃집 처녀 병사가 찾아온다. 바실리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바로 그 여대생이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타니아(레이첼 웨이즈, "미이라"의 여주인공역)를 보고 대니로프는 사령부에서 독일군의 무전통화 내용을 해독하는 통신병으로 일할 것을 권유한다.

이때 독일군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소련군 저격병을 물리칠 수 있는 독일군 최고의 저격수 코닉 대령(에드 해리슨)을 스탈린그라드에 급파한다. 유럽 최대의 격전지가 두 사람의 고독한 싸움터로 바뀐다. 서로에게 늑대가 되고 사냥꾼이 되고, 두 사람은 사냥터와 미끼를 결정하는 일에도 신경전을 벌인다. 공교롭게도 바실리가 묵고 있는 집의 외아들 사샤가 코닉 대령의 구두를 닦는 소년이 되어 둘 사이의 정보교류를 맡아 한다. 어린 소년이 본의 아니게 이중첩자가 된 것이다.

코닉의 등장으로 바실리의 독일 장교 사냥이 주춤해지고, 타니아에게 은근히 마음을 두고 있던 대니로프는 그녀가 바실리를 더 좋아하는 것을 알고 질투심에서 바실리의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보고서를 올린다. 바실리와 코닉의 대결 구도에서 어린 사샤가 희생되고, 마지막 대결에서 코닉이 이긴 것으로 알았지만 그가 명중시킨 것은 바실리를 위해 그 대신 일어선 대니로프였다. 결국 코닉은 바실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바실리는 소련의 영웅으로 살아남는다. 1943년 2월 3일 독일군이 항복한 후 바실리는 피난길에 중상을 입어 치료를 받고 있는 타니아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수백만명이 어우러져 싸우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바실리와 코닉의 양자 대결구도로 바꿔놓은 축소술과 사격솜씨가 좋은 시골 목동을 일약 전국민의 영웅으로 탈바꿈시킨 선전술이다. '프랑스의 돌연변이 감독'으로 일컬어지며 <불을 찾아서>, <연인>, <티벳에서의 7년>으로 유명한 장 자끄 아노 감독은 윌리엄 크레이그의 동명소설을 영상으로 옮길 때에도 비상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역사적 서술에 있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란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독일군이 산업의 중심지이자 주요 석유공급기지인 스탈린그라드를 포위 공격한 사건을 말한다. 독일군은 탱크 연료가 얼어붙는 혹한과 보급품 부족으로 22만명의 사상자, 9만명의 포로를 남기고 패퇴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을 맞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니로프가 이해하고 있는 이 전쟁의 실상은 사뭇 다르다. 스탈린그라드는 소련 지도자의 이름을 딴 상징적인 도시이다.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를 함락시키는 것은 히틀러가 스탈린을 쓰러트린 셈이 된다. 이 전투는 서로 영역을 넓히려는 파시즘과 코뮤니즘의 이데올로기 대결장이기도 하다. 지도자들의 氣싸움에 전쟁은 이성을 잃고 애꿎은 병사들과 주민들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바실리와 코닉의 대결은 더욱 흥미진진하다. 우랄 산골의 양치기 목동과 바이에른 귀족이 맞붙어 싸우는 셈이다.

그러나 대니로프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철자도 틀리는 바실리가 독일어가 유창한 소련 최고의 명문 모스크바 대학 여대생인 타니아와 어울리는 게 못마땅하다. 그는 타니아가 독일군에 붙잡힌 그녀의 부모가 한 데 묶이어 한 사람은 총에 맞아 강물로 떨어지고 나머지 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수장되도록 한 독일군의 만행에 복수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에 비해 바실리는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타니아와 어울리고 그녀를 웃게 만드는 남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하던 순진한 청년이다. 그렇기에 바실리는 코닉이 그보다 '한 수 위'임을 알고 저격병을 그만 두고 일반 병사처럼 싸우겠다고 자청하였던 것이다.

전술에 있어서 저격수(sniper)는 전황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을 때 적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해 적군의 지휘관을 저격 살해하는 임무를 띤다. 결코 싸움의 정도(正道)는 아니며 변칙이다. 역사상으로 자객이나 닌자(忍者, 浪人), 암살범(assassin)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에서 10월 25일 연쇄저격범이 체포되었을 때 이들의 범행장소가 여러 주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재판관할권(jurisdiction)이 문제되었다. 그러나 결론은 간단히 내려졌다. 중동전 참전 경력이 있는 41세의 존 앨런 무하마드(41)와 17세인 그의 의붓아들 존 리 말보에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할 수 있는 버지니아주에서 이들을 1급 살인혐의로 기소하기로 한 것이다. 재판장소가 두 사람에게 가장 엄격한 형량을 선고할 수 있는 곳으로 결정된 것은 메릴랜드주가 피해자가 가장 많고 관련증거도 많이 확보하고 있음에도 사형제도를 전면 재검토하기 위해 현재 사형집행을 유예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버지니아주에서는 텍사스주를 제외하고는 18세 이하의 죄수를 포함해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형을 집행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연방검사들도 이들이 1천만달러를 요구하는 편지를 남긴 점에서 살인자가 돈을 강탈하였을 때 사형에 처할 수 있게 한 홉즈법(Hobbs Act)을 적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버지니아주 검찰에 기소권을 양보하였다.

그러나 피고측 변호사가 법원이 지정한 대리인이 입회하지 않은 신문 과정에서 피고인이 진술한 것의 무효화를 주장하는 등 미국에서는 만인의 지탄을 받는 범죄인에 대해서도 인권이 보장되고 있는 만큼 이 사건의 범인들이 과연 사형에 처해질지 두고 볼 일이다. 그런데 소련의 바실리와 미국의 존 앨런은 똑 같이 조준경을 사용하여 사람을 저격하였는데 누구는 영웅이 되고 누구는 사형에 처해 마땅한 중죄인이 되는가. 온 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받았는지, 공포심을 불러일으킨 것인지 하는 것도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대니로프가 말한 것처럼 '선전술(propaganda)의 차이'라고 보아야 할지 모른다. 미국에서는 사형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지만, 이슬람권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미국 땅에서 9·11 사태 이후 공연히 박해받고 있는 회교도들이 숨죽인 채 당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쾌거"라고 선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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