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퀼리브리엄 (Equilibrium, 2002)

Whitman Park 2022. 2. 18. 08:20

우리는 정치·경제 현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영어 시간에 공부한 "But for~"(~이 없다면)를 곧잘 떠올린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정치인들이 사라진다면 ······. 젊은 여성들을 성 노리개로 팔아먹는 인신매매단이 없으면 ······.

이러한 상황을 그린 SF영화가 나와 화제가 되었다. 커트 위머 감독은 그가 각본까지 쓴 공상과학 영화 <이퀼리브리엄 (Equilibrium)>에서 사랑과 미움, 분노, 폭력 나아가 전쟁을 몰고 오는 감정(emotion)을 없애자고 외친다.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 사람의 본성이 그러할진대 인위적으로 억제한다고 실현될 리 만무하다. 아무리 만능의 법률이라 해도 그와 같이 타고난 본성을 억압하는 기능을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을 일깨우고 권장함으로써 좀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닐까?

 

영화의 줄거리

21세기 제3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인류가 절멸되고 말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인간의 변덕스러운 본성(volatile nature)이 증오와 분노를 낳고 결국 전쟁까지 불러일으킨다고 믿고 인간의 나약한 심성인 감정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가상 리브리아국(國)에서는 보다 효율적인 법집행을 위해 특수경찰인 그라마톤(Grammaton)을 창설하고 감정의 발로로 자행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잔학행위(man's inhumanity to man)를 수색·진압하는 임무를 부여한다. 그라마톤이 하는 일은 곳곳에서 저항을 하는 감정위반자(Sense Offenders)의 본거지를 파괴하고 잔당을 찾아내 근절하는 것이다. 그라마톤의 주요 간부는 클레릭(Cleric)이라고 부르는데 한결같이 '건카타'라고 하는 무술의 고단자들이다.

주인공 존 프레스톤(크리스천 베일)은 자기 임무에 충실한 1급 클레릭이다. 수많은 적들에 둘러싸여도 마치 춤추듯 권총을 쏘아 일당백으로 적을 물리친다. 두 자녀를 둔 프레스톤은 그의 아내가 공공연히 감정을 표출하는 반역행위를 저질러 화형에 처해질 때에도 무표정하게 자기 할 일만 할 뿐이다.

리브리아의 지도자는 전국민이 시청하는 가두의 스크린을 통하여 전쟁은 사라지고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다며 기뻐하라고 외친다. 사람들은 아무런 표정 없이 자기 갈 길을 가기에 바쁘다. 사람들의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프로지움'이라는 주사약이 무상으로 지급된다. 따라서 프로지움 투약을 거부하는 자는 반역행위로 처단된다. 히틀러와 게쉬타포가 재림한 것처럼 독재국가의 삼엄한 분위기가 감돌게 된다.

그라마톤은 사람들에게 감정을 촉발하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즉결처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금지품목에는 그림과 음악, 컴퓨터 프로그램이 망라되어 있다. 모나리자와 같은 예술품도 예외가 아니어서 마루 밑에 숨겨져 있던 명화가 화염방사기의 세례를 받고 만다.

프레스톤의 클레릭 선배이자 파트너인 파트리지(숀 빈)가 압수품을 지니고 있다가 프레스톤에 의해 즉결처형된다. 그의 죄목은 '예이츠의 시집'을 몰래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파트리지의 후임으로 흑인 클레릭(테이 딕스)이 오는데 그는 프레스톤과 닮은 점이 많다면서 노골적으로 경쟁심을 드러낸다.

파트너를 죽인 후 마음이 심란해진 프레스톤은 프로지움의 투약을 중단하고 약병을 화장실 거울 뒤에 숨긴다. 어느 날 그가 수색을 하는 과정에서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보니 화려한 그림과 장식, 소품들로 꾸며져 있다. 베토벤의 음악도 들을 수 있다. 공범을 수사하다가 파트리지의 약혼녀인 매리 오브라이언(에밀리 왓슨)을 만난다. 왜 저항세력에 가담했느냐고 힐문하자 그녀는 "이게 사람 사는 것이냐"고 반문하며 자기는 느끼기(feel) 위해 산다고 외친다.

프로지움을 끊고 나니 프레스톤에게는 계단 난간의 감촉도, 책상 위 소품의 배열도 새롭게 느껴진다. 저항세력의 지역을 수색하다가 그라마톤 대원이 애완견을 발견하는데 프레스톤은 애처롭게 우는 강아지를 살처분 못하게 하고 반군의 생화학무기가 감추어져 있는지 조사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집으로 데려간다.

집에서도 강아지를 키울 수 없으므로 다시 그전 장소에 데려다 놓는데 반군 지역에서 신분증도 없이 배회한다고 그라마톤의 불심검문을 받는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한 프레스톤은 그를 애워싼 여러 명의 그라마톤을 처치해버린다. 강아지 때문이 아니라 호주머니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매리 오브라이언의 분홍빛 리본 때문일 것이다.

 

그라마톤이 반군 지역에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일 때 프레스톤은 몰래 반군 대원을 인솔하고 안전지대로 대피한다. 그러나 프레스톤의 파트너인 브랜트가 그의 행동을 예견하고 매복해 있다가 전원을 체포한다. 그리고 프레스톤의 태도를 떠보기 위해 반군들을 직접 사살하라고 권총을 건네준다. 그냥 돌아서는 프레스톤과 회심의 미소를 짓는 브랜트.

위기에 몰린 프레스톤은 부사령관(Vice Consul)을 만나 자신의 충성심을 보일 기회를 달라고 간청한다. 파트리지의 행적을 좇아 도서관 사서를 신문하고 서가의 지하층에서 저항세력의 본거지를 발견한다. 저항세력의 지도자 유겐은 그의 감정상태를 조사한 후 자기편으로 맞아주는 조건으로 프레스톤에게 지도자(Father)를 암살할 것을 요구한다.

프레스톤의 기이한 행적을 수상쩍게 여긴 그라마톤 본부에서는 그를 연행하여 신문한다. 그리고 클레릭이 무너지면 리브리아 국가기반이 흔들린다고 엄중하게 경고를 한다. 프레스톤은 선배의 약혼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내일이면 처형될 그녀가 안쓰럽다. 반역모의죄로 화형을 당한 그의 아내와 오브라이언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화형장에서 매리가 처형되고 난 직후 프레스톤은 땅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린다. 마침내 그의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프레스톤은 부사령관 앞에 연행되어 반역죄로 체포된 여자와 정을 나누었다는 조사를 받지만 반군 아지트에 침투하기 위한 책략이었다고 둘러댄다. 자신이 느끼는 슬픔이라면 한없는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최고지도자를 만날 수 없는 것이라고 호소한다. 가까스로 석방된 프레스톤은 집에 돌아와 그라마톤의 수색에 대비해 거울 뒤에 감춰둔 약병을 찾는데 그의 아들이 미리 숨겨놓은 뒤이다. 프레스톤의 자녀들은 이미 감정에 충실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케 최고지도자를 알현하게 된 프레스톤은 그곳에서 전혀 뜻밖의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지도자의 관저에서 신기에 가까운 총격술과 검술로 위기를 돌파한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같은 SF영화인 <매트릭스>와 줄거리, 등장인물 등 여러 면에서 비교되었다. 영화 개봉 전부터 네티즌들로부터 큰 관심을 모았고, 지금도 DVD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법적인 관점에서는 보다 본질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을 무시하는 권력과 법률이 과연 존속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을 없애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강제로 프로지움을 투약하도록 하는 것은 분명 억지이다. 그러한 인과관계의 규명에 온 국민이 동의하였는지, 매일같이 저항세력을 소탕하는 작은 전쟁을 벌이고 프로지움을 제조, 무상 배급하는 데 엄청난 재정을 쏟아붓는 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떤 룰이 완벽하게 실시되려면 룰을 어기는 예외란 있을 수 없고 위반자는 즉각 축출되어야 한다.

 

반면 감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지도자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그를 증오하며 프로지움 제조공장을 폭파하려 든다. 용모가 단정하고 아무 불평 없이 인민복을 입고 다니는 보통시민들과는 달리 감정위반자들은 제멋대로 수염을 기르고 옷차림도 제각각이며 행동거지도 매우 거칠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라마톤이 무너진 세상은 무질서하고 극히 혼란스럽다.

이 영화를 보면 현실 세계에서 법규범이 지향해야 할 지표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지 않으면서, 법 집행에 과도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위반세력은 내부적으로 견제를 받게 하거나 약간의 시정 노력으로 잠재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준을 완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현실은 영화를 방불케 한다. 강남 지역의 아파트에 투기열풍이 불자 정부당국에서는 일부 투기꾼과 투기를 조장하는 부동산중개업소만 시장에서 몰아내면 된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시장가격은 수요공급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면 탐욕스러운 정치인을 앞장서서 타도할 게 아니라 정치자금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정치인의 모든 정보를 공개하여 유권자가 선거를 통해 정기적으로 자격미비자를 솎아내도록 하면 된다. 인신매매범도 우선적인 척결 대상으로 할 게 아니다. 섹스가 폐쇄적인 은밀한 공간에서만 거래된다면 음란물의 유통, 부부 스와핑, 인신매매, 원조교제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변태적인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이 마음대로 놀 수 있게 레드존(Red Zone)을 설정하고 건전한 보통 시민들로부터 격리한다면 그들도 더 이상 뉴스거리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가 '평형'이라는 뜻의 제목을 내건 것은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방치하지도 않는 상태가 최고선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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