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화되는 스파이 영화는 나치나 소련, 국제테러단체 등 적성국(단체)과의 대결구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베일에 싸여 있던 미 중앙정보국(CIA)의 신입요원 채용 과정을 그린 영화 <리크루트(The Recruit)>를 보면 첩보기관 내부의 배신자가 누구인가 찾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언론에서도 국군의 주적(主敵)이 누구냐고 문제삼은 적이 있지만, 알 파치노, 콜린 파렐 주연의 이 영화를 보노라면 누구를 믿어야 할 지 몹시 혼란스러워진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사가 "보이는 것 그대로 믿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군지 모르는 사람일랑 믿지 말라는 이야기인데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기사가 이에 해당한다.(출처: 중앙일보 2003. 6. 28자 8면)
지난 5월 30일 정오 서울 강남구 대치동 H빌딩의 송두환 특별검사팀 조사실. L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L 전 금융감독위원장, 두 사람만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을 대질 조사하던 특검팀 파견 검사와 수사관들이 "식사를 하고 오겠다"며 모두 자리를 비운 것이다. 그러나 조사실에서 나온 수사진은 식당이 아니라 모니터가 설치된 옆방으로 들어갔다. 조사실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를 통해 두 사람의 태도를 관찰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두 사람은 곧 가까이 다가가 조용하게 무슨 말인지를 계속 주고받았다. 이를 통해 특검팀은 두 사람이 입을 맞췄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특검팀은 이날 L 전수석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결정할 때 증거 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특검 방침이 적용된 것이다.
L 전수석으로서 특검 수사진이 나에게 결코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면 그렇게 나이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아버지도 잘 안다고 하면서 나를 신입사원으로 뽑아 동료처럼 대해준 사람은 나에게 우호적일까, 적대적일까.
영화의 줄거리
MIT에서 비선형 암호학을 전공한 제임스 클레이튼(콜린 파렐)은 취업 박람회장에서 자신이 개발한 무선 인터넷 방송 '스파르타카스'를 선보인다. 여기에 미 중앙정보국(CIA)의 채용(recruit) 담당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석유회사 재직 중 사고로 죽은 제임스의 아버지를 잘 안다고 하면서 내일 정오까지 자기에게 연락하라고 명함을 주고 간다. 제임스는 첨단 벤처 사업을 벌이려다가 자기가 모르는 아버지의 다른 면을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체육관에 가서 샌드백을 두드리다가 마침내 결심을 한다.
정보기관답게 채용면접도 공중전화로 위치를 지정 받은 자동차 안에서 이루어진다. CIA의 채용담당관 월터 버크(알 파치노)는 셀 석유회사에 재직했던 제임스의 아버지도 역시 비밀정보요원이었다는 언질을 주어 호기심이 동한 제임스를 CIA 입사시험장으로 끌어들인다. 제임스는 필기시험에 이어 다양한 주제의 면접시험을 치르게 된다. 필기 시험장에서 미모의 여성 지원자에게 한눈을 파는 제임스에게 "여자는 잊고 시험이나 잘 봐라"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CIA가 이미 응시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제임스는 첫눈에 그를 사로잡은 여성 지원자 레일라 무어(브리짓 모이나한)와 1차 합격자 명단에 들어 사육장(the Farm)이라고 부르는 비밀훈련소로 이동한다. 지원자들의 면면을 보니 현대 페르시아어(이란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아는, 다양하게 해외생활을 해본 젊은이들이다. 그러나 훈련을 담당하는 월터 버크는 CIA의 월급만 가지고는 스포츠카도 살 수 없다고 말하고 "비록 부와 명예를 약속할 수는 없지만 믿음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선과 정의를 선택하고 많은 위험을 무릅쓰며 일하고 있다"면서 "보이는 것 그대로 믿지 말라"고 훈련생들에게 당부한다.
훈련 일정은 6시에 기상하여 역할연기, 심리전술, 위장감시, 야간낙하, 거짓말 탐지기 조작, 사격훈련 등으로 빈틈없이 짜여져 있다. 비밀첩보원은 첨단 과학기술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해외근무 시에는 외교관 신분을 부여받지만 외교관 면책특권은 말뿐이고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처형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CIA 본부에는 순직자 기념비가 있는데 최근 연도에는 이름도 없이 [명단을 공개할 수 없으므로] '별' 표시만 되어 있을 뿐이다.
CIA 요원들에게는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고 술집에서 젊은 여자를 유혹하는 것도 실습 대상이다. CIA 요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월터 버크는 제임스를 주목하고 그가 힘들어 할 때마다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주며 격려한다. 망원렌즈를 사용하는 저격 훈련을 받고, 실전이나 다름없는 토끼와 탐정이라는 게임을 통해 추적과 감시기술을 연마한다. 레이라와 한 조가 되어 훈련에 나갔다가 복면을 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안가로 끌려간다. 독방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한다. 도대체 훈련인지 실제상황인지 알 수 없다. 제임스는 극한상황에서 자백을 하고 말지만 이것은 실제상황을 방불케 한 연습이었음을 통보 받고, 잡혀서는 안 되는 터에 부주의로 붙잡히고 자백까지 하였다는 규칙 위반을 이유로 캠프에서 축출된다.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돌아온 제임스가 컴퓨터사에 취업을 하려 하는데 다시 월터가 그를 찾아온다. 그는 제임스가 갖고 있는 첩보원의 자질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하고 "누구나 굴복하게 마련이다. 다만 누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 하는 차이일 뿐"이라고 그를 위로한다.
월터는 제임스에게 첩보원으로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다. 그가 관심을 기울이던 레이라를 감시하고 그녀가 누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지 알아내라는 것이다. 그리고 월터는 제임스에게 자신의 옛사랑을 이야기해준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러시아 대표단의 비서를 한 현지 처녀와 사랑을 하는 사이였지만 사랑보다도 정보가 중요해 그녀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노라고 말한다.
지금 레이라가 탐지하려 하고 있는 극비정보는 "아이스 나인"이라는 신물질로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적성국에 유출된 경우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CIA의 컴퓨터는 모두 보안처리가 되어 있어 데이터를 어디에 저장하여 외부로 반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데 레이라가 이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CIA에 재기용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한 제임스는 최선을 다하여 레이라를 감시하고 그녀가 커피 보온병 밑에 숨겨 가지고 집에다 빼돌린 데이터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레이라는 누구에게 주려고 이러한 국가배신행위를 하는 것일까. 제임스로부터 보고를 받은 월터는 첩보원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임무이며 누가 우리 편인지는 상부에서 결정한다고 말하고, 위기 상황에서 쓰라고 제임스에게 권총을 건네준다.
레이라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제임스는 그녀가 토요일 아침에 만나러 가는 사람이 정보를 제공받는 연락책이라고 단정하고 택시를 타고 가는 그녀를 미행하여 워싱톤 시내 유니온 역으로 간다. 비밀통로에서 연락책을 목격한 제임스는 철도차량기지까지 그를 추격하여 상대방을 총으로 쏘는데 알고 보니 같이 훈련을 받았던 재크였다. 졸지에 동료를 죽이고 만 제임스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해군정비창으로 월터를 만나러 간다. 제임스의 보고를 받은 월터는 제임스가 정신없이 수행한 임무가 훈련상황이었고 잭은 공포탄을 맞고 죽은 척 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황당해 하는 제임스에게 그 총은 자기가 준 것이 아니었냐고 묻는다.
속고 속이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제임스는 그가 개발한 스파르타커스를 이용해 CIA 본부에 접속하여 월터가 이야기하는 것을 전부 인터넷으로 생중계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월터는 CIA 채용담당관인 것을 구실로 실력있는 신입생들을 도구로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것인가. 제임스와 월터가 다투는 사이에 밖에는 CIA 수사대가 급파되어 두 사람을 포위한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첫머리에 말한 것처럼 뚜렷한 적대세력이 존재하지 않고 조직 내부에 배신자가 숨어있다는 설정이기에 스토리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이 영화가 실제 CIA의 신입요원 채용 및 훈련과정을 상당히 리얼하게 다루고 있다고 하는데 CIA가 역점을 두는 것은 역할연기(role playing)와 거짓말 탐지기 조작법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유능한 첩보원이 되려면 특정 상황에 처하여 나는 어떠한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가, 상대방은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가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또 상대방의 말은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아내고, 나는 들키지 않고도 얼마나 진실을 은폐할 수 있는지 익혀두어야 한다는 말도 된다.
이 영화는 훈련으로만 알고 있는 신입요원을 속여가지고 고차원적인 신물질 제조기술을 손에 넣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기(fraud)란 신대방이 외형을 신뢰하도록 만들어[欺罔] 착오에 빠진 것을 이용해 자기 또는 제3자가 재산상의 이익을 취하는(편취, 騙取) 것이 자행된다. 이처럼 상대방의 부주의(negligence)를 내 편에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행위는 사기죄(형법 347조)로 처벌되고 있다. 많은 경우에 재물에 욕심을 낸 나머지 상거래에서 인정되는 최소한의 기준(minimal acceptable commercial conduct)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였을 때에도 사기가 성립한다. 예컨대 실질적인 상거래 없이 단지 피라밋 판매망을 구축하는 것만으로 이득을 취하려 한다든가, 내가 특별히 기여한 것도 없이 단순히 이름만 빌려주고 상당한 보상을 받으려 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착오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사기꾼이며, 이들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큰 이익을 얻으려 하는 사람을 주로 노린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채용담당관이자 교육훈련관에 대하여 조직의 신입요원은 당연히 신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를 잘 안다고 하고 평소에 바른 말과 충고를 해주는 사람을 어찌 안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고단수의 치밀한 계산 하에 그 사정을 모르는 나를 도구로 이용하여 재산상의 이익을 취하려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그러한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가. 그가 일러준 오직 한 가지 진실된 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지 말라"는 철칙을 어느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사랑하는 여인의 순수한 마음조차 믿을 수 없는 불감증의 사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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