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1987년 6월 항쟁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사망한 박종철 군의 사인 은폐조작 사건이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학생과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요구를 공권력으로 억누르려 했으나 박종철군 사건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고 6·29 선언으로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리고 치안본부장을 비롯한 경찰 간부들이 줄줄이 재판을 받았다.
무릇 집권세력은 체제유지를 위해 개인의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민주화가 앞선 선진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1993년 영국에서도 무고한 시민을 죄인으로 몰아 억울하게 15년간이나 옥살이를 시킨 경찰 간부들이 재판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영국 경찰의 명예를 실추시킨 이 사건의 전말은 피해자 주인공의 회고록(Proved Innocent)을 토대로 한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Father)>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알려졌다. 같은 해 아이랜드 출신 짐 세리던 감독이 아카데미 남우·여우 주연상을 받은 다니엘 데이-루이스와 엠마 톰슨을 기용해 만든 이 영화는 1994년 아카데미상의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영화의 줄거리
1970년대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계 신교도들과 아일랜드계 구교도들의 대립과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IRA(아일랜드 공화국 군대)는 아일랜드와의 통합, 구교도들의 권익 수호를 부르짖으며 테러를 자행하였다. 1972년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 의회를 해산하고 직할통치를 선언한 후 군대를 파견해 치안을 확보하려 했으나 IRA는 이에 맞서 영국과 북아일랜드 도처에서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1974년 10월 5일 런던 교외의 길포드 주점에서 폭발물이 터져 5명이 죽고 75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당시 영국에서는 테러 용의자에 대하여는 영장없이 7일간 구속 수사할 수 있는 테러 방지법이 막 시행되던 참이었다. 영국 경찰은 제보를 받고 그 주변을 배회하던 벨파스트 출신 히피 2명을 연행하였다.
이 영화는 주인공 제리 콘론(다니엘 데이-루이스)이 변호사(엠마 톰슨)에게 카세트 녹음기로 사건 정황을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벨파스트에서 좀도둑질을 일삼다가 아버지 주세페 콘론([브래스드 오프]에서 밴드 지휘자역을 열연한 피터 포슬스웨이트)의 강권에 못이겨 런던으로 간 제리는 히피들과 어울려 마약을 피우며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져 고향에 돌아갈 채비를 한다. 그는 공원에서 만난 거지 노인에게 호주머니를 털어주는 마음씨도 있었지만 길에서 주운 열쇠를 가지고 빈 집에 들어가 돈을 훔치는 일도 서슴치 않는 인간이다.
영국 수사당국은 범인이 벨파스트 출신 구교도일 것으로 단정하고 일정한 직업 없이 현장 주변을 배회하다가 사건후 큰 돈을 갖고 고향에 돌아 온 제리 콘론과 그의 친구 폴 힐을 영장없이 구속한다. 용의주도한 IRA 대원들을 상대로 수사를 벌이던 영국 경찰은 피의자의 자백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어 수사관들은 범행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는 제리를 구타하고 욱박지르고 심지어는 자백하지 않으면 '아버지도 쏘아 버리겠다'고 협박한다.
제리에게 아버지는 아킬레스건이었다. 철이 든 이후 한 번도 아버지의 칭찬을 받아보지 못한 그는 매사에 근면 성실하고 가정에 충실한 아버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사건에 말려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제리가 진술조서에 서명을 하자마자 그가 관계했던 사람은 모두 IRA 지원세력이 되고 만다. 영국 경찰에 구속된 아들의 구명운동을 하러 런던의 친척 집에 들른 주세페 콘론과 숙모도 함께 연행된다. 제리의 자백을 제외하고는 숙모의 집에서 압수된 고무장갑에 묻어있던 화학성분이 폭발물에 쓰인 니트로글리셀린과 비슷하다는 법의학연구소의 감정서가 유일한 단서였다.
변호사는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구타를 당하고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진술한 자백이 무효라고 주장하지만 배심원들에게 아무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거짓말과 도둑질을 일삼고 말썽만 부려 온 피고인과 테러 방지에 전념해 온 경찰관의 말 어느 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검사의 열변에 귀를 기울여 '유죄' 평결을 내린다. 재판장도 같은 의견이다. 그는 피고인을 교수형에 처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면서 최저 30년의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콘론 부자는 중죄수만 수감하는 악명 높은 파크 로얄 교도소에서 함께 옥살이를 한다. 여기서도 제리는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료 죄수들과 어울려 마약을 한다(친구가 약에 담갔다가 차입해 준 그림 맞추기 퍼즐이 재료). 그리고 "영국인의 정의(justice)와 자비(mercy), 관용(clemency)이 우리를 석방시켜 주겠느냐"며 관계요로에 석방을 탄원하는 아버지를 비웃는다.
그때 진짜 IRA 테러리스트인 죠가 감방에 나타나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싸워야 한다"고 제리를 가르친다. 그는 경찰에서 자신이 길포드 폭발물 테러를 저질렀다고 진술하였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콘론 부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주세페는 '미안해 할 사람은 우리 부자가 아니라 당신이 폭탄으로 죽인 사람들'이라며 그와 어울리기를 싫어한다.
영화 <대부>를 보여주는 교도관을 불에 태워죽이려고 한 IRA의 테러 행각에 질려버린 제리는 그때부터 아버지를 돕겠다고 나선다. 제리는 교도소를 방문하고 아버지와 면담을 한 여자 변호사(엠마 톰슨)에게 부탁하여 조직적으로 석방 캠페인을 벌인다. 그러나 아버지는 병이 들어 교도소 안에서 죽고, 변호사의 천신만고 노력 끝에 재심이 열려 길포드 사건으로 무기형을 살던 네 사람은 15년만에 석방된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무고한 시민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변호사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는 단순한 휴먼 드라마가 아니다. 역사의 진행 속에 한 개인의 인권이 농락될 수 있고 국가 권력 앞에서 사법정의란 하나의 구호에 그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서 IRA의 테러는 영국 사회의 공적(Public Enemy) 1호였다. 그래서 IRA 혐의자는 300년 이상 지켜져 내려온 인신보호(habeas corpus) 제도와 상관없이 영장없이 1주일씩이나 구속 수사할 수 있게 하는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콘론 부자가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1979년 존경받는 왕실인사 마운트배튼경이 피살되고 영국군 1개 소대병력이 몰살 당하는 등 IRA의 테러가 잇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당국은 길포드 사건의 진범이 누구이던 간에 벨파스트 출신의 테러 용의자는 한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격리해 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용기있는 사람의 양심은 살아 있었다. 마치 박종철군 사건도 그의 부검을 담당한 법의학자가 경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공개함으로써 만천하에 폭로된 것처럼 맹렬 女변호사가 끈질기게 사건기록 열람청구권을 행사하고 재심을 청구하여 진실을 되찾을 수 있었다.
변호사가 가까스로 찾아낸, "피고인측 변호사에게 보여주지 말 것"이라는 쪽지가 붙은 경찰의 수사기록 중에는 제리가 공원에서 적선을 한 노인 거지와의 면담기록, 즉 그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자료도 들어 있었다. 마치 계란을 바위에 던지는 격이었지만 제리와 그의 변호사가 벌인 캠페인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 영국 법원은 스스로의 불명예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재심에서 긍정적인 검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법률적인 판단 못지않게 IRA의 테러가 잠잠해지고 영국 정부가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에 굴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제리와 함께 이 사건에 연루된 폴 힐이 故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딸과 약혼을 하여 법정에는 케네디 일가를 비롯한 미국 정치인들이 대거 참관하는 등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국 정부는 '길포드 4인방'을 석방은 하였지만 그렇다고 진범임을 자백한 IRA 대원을 추가로 기소한 것도 아니고, 여론에 쫓겨 관련 경찰관들을 사법집행 방해 혐의로 기소하였다가 이들을 무죄 석방함으로써 어정쩡한 입장을 취했다.
짐 세리던 감독은 1989년 <나의 왼 발(My Left Foot)>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뇌성마비 시인 크리스티 브라운을 열연하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탄 다니엘 데이-루이스를 출연시켜 진지하고 성실한 인간상을 부각시키고자 애썼다. 그러나 관객들은 주인공의 참모습이 마약에나 탐닉하는 게으르고 말썽이나 부리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고 한 것처럼 주인공은 아버지 뒤를 이어 '아버지의 이름으로' 캠페인을 벌여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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