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밀레니엄에 우리나라의 취업전선은 어느 해보다도 심각하다고 한다. 대기업의 퇴출과 부도가 잇따르고, 그나마 기대를 모았던 벤처기업들도 수익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졸업반은 물론 경력사원들도 일자리를 찾아다니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취업대란(就業大亂)의 시대에 학벌이나 배경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어도 자신의 입지를 굳힌 사람(이런 이를 "American Underdog"이라 부른다)의 이야기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는 그 무대가 미국이고 주된 스토리도 <시빌 액션> 비슷한 환경문제이지만, 직장을 구하고 직장 내에서 인정받고 성공하는 요령을 가르쳐주는 '텍스트'라 할 만하다.
영화의 줄거리
에린 브로코비치(줄리아 로버츠)는 이곳저곳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지만 고졸 학력에 애가 셋씩이나 딸려 있는 처지라 어느 곳에도 채용될 가망이 없다. 하루는 입사면접에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길에 교차로에서 신호위반 차량에 받친다(재규어 스포츠카에 받치고도 멀쩡한 차는 현대 엑셀로 보인다). 에린은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고, 변호사의 말대로 다 이긴 것으로 생각했지만 피고측 변호사가 배심원들을 상대로 역공(逆攻)을 펴는 바람에 패소하고 만다. 변호사가 에린이 쪼들린 나머지 의사인 가해자로부터 두둑한 피해보상을 받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이에 흥분한 에린이 배심원들 앞에서 육두문자(영어의 four-letter word)를 쓴 까닭이다.
에린은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다 이긴 소송을 지게 했으니 책임지라"며 일자리를 달라고 떼를 쓴다. 시골마을에서 웬만큼 기반을 잡은 에드 매스리 변호사(앨버트 피니)는 하는 수 없이 연금이나 보험혜택이 없는 임시계약직으로 그녀를 채용한다.
에린은 서류정리법, 복사기사용법을 배워가며 열심히 일을 한다. 마음씨 좋은 애드 변호사는 그녀에게 1백달러까지 가불을 해주는데, 그녀는 옆집으로 이사온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는 히피 남자(애론 에크하트)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느 날 매스리 변호사가 그녀에게 배당한 사건은 프로보노 부동산 사건이다. 사회봉사 차원에서 지역주민의 부동산거래 서류작성을 해주는 것이므로 어차피 '돈도 되지 않는 일'을 에린에게 맡긴 것이다. 에린은 마음먹고 열심히 일을 하는데 부동산 서류에 첨부되어 있는 진료기록과 청구서가 영 마음에 걸린다. 아이를 키우는 그녀로서는 상당한 병원비가 첨부되어 있는 사건기록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것이다.
하루는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베이비시터도 없고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웃집에서 아이들은 히피 남자가 만들어준 햄버거를 먹으며 재미있게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남편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버림받은 에린으로서는 히피가 결코 미덥지 않지만 그는 백수로서 당당하게 아이들이 사랑스러우니 자신이 돌보겠다고 제안한다.
에린이 가까스로 전모를 파악한 부동산서류는 그 지역의 대기업인 퍼시픽 가스·전기회사(PG&E)가 주민으로부터 시장가격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땅을 매입한다는 내용이다. 매도인의 하나인 젠슨 부부는 백혈구가 감소하고 T임파구가 증가하는 이상징후로 말미암아 PG&E가 주선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PG&E가 시세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땅을 팔게 된 것이다.
의심을 품은 에린은 현지 답사를 하면서 지역 발전소가 의료보험도 아닌 진료비 부담을 할 뿐만 아니라 땅도 비싸게 사준다는 데 뭔가 곡절이 있다고 생각한다. 진료카드에 공통적으로 기재되어 있는 이상증세는 헥사 크롬이라는 중금속에 오염된 탓인데 이 물질은 발전기 터빈 내부의 녹을 방지하기 위해 방청제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한다. 에린은 이러한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수도국을 찾아가지만, 육감적인 그녀의 몸매에 혹한 수도국 남자직원이 선심을 베풀고 해당자료를 찾아 복사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녀가 현장을 확인하러 돌아다니는 동안 매스리 변호사는 무단결근했다고 그녀를 해고해버린다. 위치타 제일의 미녀(Miss Wichita)였음에도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아이들을 혼자 키우는 그녀는 제대로 변명조차 못하고 사무실에서 나오는데 이웃집 히피는 사랑을 고백한다. 뒤늦게 에린의 활약상을 눈치챈 매스리 변호사는 봉급을 10% 인상하고 의료보험 혜택까지 주기로 하고 그녀를 다시 출근하게 한다.
대학실험실에서 보내온 테스트 결과치는 주민들이 마시는 수돗물의 중금속 함유량이 발암 위험수준을 넘어섰음을 보여준다. 그 동안 전력회사에서 주민들에게 의료혜택을 베푸는 등 선심을 베푼 것은 발암가능성을 숨기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젠슨 부인부터도 자기가 병이 든 것은 운이 나쁜 탓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PG&E에서는 애송이 변호사를 보내 젠슨 부부와의 부동산 거래를 잘 처리하겠다고 제의하지만 그의 거들먹거리는 태도는 매스리 변호사의 자존심만 상하게 한다. 에린이 설치고 다닌 결과 많은 주민들이 크롬에 오염된 상수도는 사람은 물론 가축에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PG&E는 일부 사실은 주민들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을 왜 먼저 알려주었을까. 그것은 손해배상책임의 법리상 주민들이 손해발생의 원인을 안 날로부터 일정 기간 그 배상청구를 하지 아니하면 청구권이 소멸해버리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매스리 변호사는 마침내 주민들로부터 소송을 위임받아 전력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기로 방침을 정한다. 착수금은 없고 승소하면 배상액의 40%를 받지만 패소하면 의뢰인들로부터 한 푼도 안 받겠다고 주민들에게 알린다. 수입이 없는 소소한 부동산 거래인 줄로만 알았던 일이 대규모 공해소송으로 발전한 것이다.
대기업을 상대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소송을 벌이기로 했지만 엄청난 증거조사비용으로 시골의 조그만 로펌은 거덜날지도 모른다. 게다가 에린에게는 협박전화가 끊이질 않는다. 다윗과 골리앗 같은 싸움에서 에린은 나름대로 전력회사 직원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발전소 부근 개울물, 하수도, 실험용 우물의 시료를 채취하고, 심지어는 죽은 개구리까지 열심히 채집한다.
아홉 달 뒤 에린 측에 유리한 정보가 어지간히 축적된다. 중금속에 오염된 콤프레서 냉각수가 정화처리를 거치지 않고 방류되어 부근 일대의 지하수를 오염시킨 사실도 알아낸다. 손배소송 원고 4백여명에 대한 데포지션(사전 증거조사) 비용도 만만치 않다. 매스리 변호사는 그동안 저축한 돈은 물론 살고 있는 집까지 저당 잡혀가며 마련한 돈으로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을 청구할 생각을 한다. 그 시금석이 될 샌 버나디노 카운티 법정에서 판사는 원고측 주장을 손들어준다.
정식으로 재판이 벌어지게 되었으나 이에 대한 피해주민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소송에 이기면 떼부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과 그저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사람으로 나뉜다. 사실 2천만불을 배상 받더라도 변호사비용을 공제하고 4백여 원고가 이를 나눠가지면 팔자를 고칠 정도의 큰돈도 못된다. 자나깨나 사건에 매달려 있는 에린을 보고 진지한 애정을 기대했던 히피 보모는 그녀를 떠나겠다고 한다. 이에 대해 에린은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일을 하게 되었다면서 이 일을 포기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소송사건이 원고가 634명에 달할 정도로 확대되자 매스리 변호사는 대형사건의 경험이 많은 파트너와 손을 잡는다. 勢불리를 깨달은 PG&E측에서 중재를 제의해 오자 매스리 변호사와 파트너는 충분한 보상을 조건으로 이에 응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파트너는 일류대 출신의 여자변호사를 데려오는데 그녀는 에린하고는 법률지식은 물론 용모에 있어서도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민들은 딱딱하고 사무적인 여자변호사보다 자신들을 속속들이 이해해주며 감정까지도 교류하는 에린이 훨씬 좋다.
매스리 변호사와 에린은 힝클리 주민회관에 의뢰인들을 모아놓고 소송에서 중재로 선회하게 된 배경과 이점을 설명한다. 중재사건은 배심원도 없고 결과에 불복할 수도 없지만, 10년 이상 걸릴 소송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빨리 보상을 받는 게 낫지 않으냐며 설득한다. PG&E에서 요구하는 원고 90% 이상의 찬성을 얻기 위해 에린은 밤낮으로 주민들을 찾아 집으로 가게로 술집으로 다니며 동의 서명을 받는다. 그 사이 발전소 냉각탑 청소를 담당했던 기사의 동생으로부터 유력한 증거도 수집한다. 회사의 기밀서류에 의하면 본사에서도 1966년 3월경부터 마을의 식수원이 발전소에서 방류한 물로 오염되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된다.
결국 법원의 조정 결과 마을 주민들은 손배사상 최고금액인 총 3억3천3백만달러(4천억원)의 손해배상을 받고, 젠슨 부부도 5백만달러를 받게 된다. 매스리 변호사는 번듯한 건물로 사무실을 이전하고, 에린은 매스리 변호사로부터 그녀가 깜짝 놀라리 만큼 많은 2백만달러 짜리 보너스 수표를 받는다.
감상의 포인트
칸느 영화제 수상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를 만든 스티븐 소더버그는 줄리아 로버츠로 하여금 더욱 육감적으로 보이게 하고 있다(혹자는 그녀가 착용한 '원더브라' 덕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영화평자는 줄리아 로버츠가 이 영화에서 '귀여운 여인'의 몸매와 '펠리칸 브리프'의 추리 능력, '런어웨이 브라이드'의 당돌함을 총체적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이 영화는 "줄리아에 의한, 줄리아를 위한, 줄리아의 영화"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인물인 에린이 보잘 것 없고 흠 많은 사람이지만 그도 존경받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실제의 에린 브로코비치는 이 영화에 카메오 출연을 하였는데 주방에서 바퀴벌레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에린이 동네 패스트푸드점에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줄 때 주문을 받는 웨이트레스가 그녀이다). 그것은 에린이 몇 푼 안되는 프로보노 사건이라는 것을 괘념치 않고 고객의 입장에서 사건을 파헤친 점, 고객들의 신상명세와 전화번호를 외우고 감정의 교류(sympathy and empathy)마저 불사할 정도의 열성을 보인 점, 그리고 큰 공을 세우고도 자신의 몸값을 턱없이 높여 부르지 않고 기본적인 보수만 기대한 점이 돋보인다. 이러한 성실성과 겸손함은 직장생활은 물론 대인관계에서 성공하는 비결이라 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줄리아 로버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데 잠깐 이용되고 있지만 미국 사법절차의 배심원제도와 프로보노(공익변호) 사건이 관심을 끈다. 배심원은 선거인 명부 또는 운전면허 발급대장에서 무작위로 추출하는 방식으로 평균적인 주민들을 선임하기에 영화에 나온 것처럼 '온순한 시민'(nice person, decent citizen)이 아니면 불리한 판정을 받게 마련이다.
그리고 변호사의 프로보노 활동(pro bono publico)이란 개업변호사가 종교·자선의 목적으로, 또는 公民으로서 의무에 기하여 무료 또는 극히 적은 보수만 받고 의뢰인에게 법률 서비스를 하는 공익(公益)활동을 말한다. 미국에서도 대부분의 변호사가 성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에린이 파헤치지 않았으면 단순한 부동산 거래로 처리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에서는 소송과 중재의 비교론이 잠시 피력된다. 그러나 의미가 있는 것은 법률분쟁에 있어서 누가 사건을 수임받아 하느냐, 어떠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느냐 보다 "누가 사실관계를 철저히 조사하고 상대방의 공격방어에 대비하는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에린이라는 헌신적인 조사원이 있었기에 에드 매스리 변호사는 대기업을 상대로 하는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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