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펠리칸 브리프(Pelican Brief, 1993)

Whitman Park 2022. 2. 19. 08:10

영화 <야망의 함정>(The Firm, 1993)이 흥행에 성공하자 존 그리샴의 동명의 법률소설 <펠리칸 브리프>(Pelican Brief)도 영화화되어 크게 히트하였다. 이 제목은 로스쿨 대학원생인 여주인공이 대법관 암살사건의 배후를 암시하는 소송사건을 요약하여 교수에게 제출한 리포트를 가리킨다. 즉 '펠리칸 새를 보호하기 위해 내려진 일련의 소송사건의 개요 및 법적인 이슈, 법원의 판결과 그 이유'를 기술한 것으로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미국 로스쿨 학생들이 좔좔 암송해야 하는 수많은 케이스 브리프(case brief) 중의 하나인 셈이다. 필자 역시 미국 로스쿨 유학 당시 엄청난 분량의 예습과제(reading assignment) 공부하는 요령을 이 영화의 원작소설을 읽으며 깨우친 바 있다.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제작까지 맡은 알랜 파큘라 감독은 남자 주인공(그리샴의 원작에서는 백인 신문기자)으로 지성적인 흑인 배우(덴젤 워싱턴)를 기용하여 여주인공(줄리아 로버츠)과의 연애감정이 아닌 동지애를 부각시킴으로써 스릴러물의 묘미를 더하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

미 연방대법원 청사 밖에서 노(老) 대법관이 내린 일련의 진보적 판결에 대한 항의시위가 연일 계속된다. 당국이 그에 대한 신변경호를 강화한 가운데 어느 날 밤 로젠버그 대법관이 경호원과 함께 피살된다. 더욱 의아스러운 일은 아무 공통점이 없어보이는 다른 독신 대법관도 같은 날 밤 성인영화관에서 피살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2명의 대법관이 거의 동시에 암살되자 미 대통령은 FBI 국장을 불러 사건 배후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명하는 한편 대법관 후보의 인선에 착수한다.

한편 뉴올리언스 소재 튤레인 로스쿨(프랑스 식민지였던 루이지애나주의 연혁상 미국에서 유일하게 대륙법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헌법을 가르치는 캘라헌 교수는 그가 20년전 재판연구관으로서 모시고 일했던 로젠버그 대법관의 죽음을 크게 슬퍼한다. 캘라헌을 사랑하는 미모의 여제자 다비 쇼(줄리아 로버츠)는 외견상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두 대법관의 암살에 뭔가 음모가 깃들어 있다고 판단하고 각종 자료를 뒤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도서관의 법률문헌 데이터베이스(원작이 발표된 시점에는 인터넷이 아닌 Westlaw 같은 법률DB사의 전용 컴퓨터를 이용)를 이용해 두 대법관의 의견이 일치되었던 사건들을 조사하던 중 흥미로운 단서를 발견하고 이를 정리하여 캘라헌 교수에게 보여준다. 캘라헌 교수는 로젠버그 장례식 참석 차 워싱턴에 들른 길에 수사에 참고하라며 FBI 법률자문관으로 있는 친구에게 이 보고서를 건네준다.

그러나 뉴올리언스에 돌아온 캘라헌 교수는 의문의 자동차 폭발사고로 죽고 다비 쇼 역시 정체불명의 사나이들로부터 쫒기는 신세가 된다(뉴올리언스의 구(舊)시가지 '프렌치 쿼터'에 있는 부르봉 스트리트는 밤만 되면 이 영화에서처럼 붐비고 흥청거린다. 특히 2월의 사육제 전날(Mardi Gras)에 최고 절정을 이룬다). '펠리칸 브리프' 보고서는 권력 핵심부가 암살사건의 배후임을 시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것을 본 사람은 모두 위험인물로서 제거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 단순한 판례요약이 아니라 권력핵심부의 살생부임이 밝혀져 두 사람은 함께 쫓기는 처지가 된다.
* 마운트 버논(워싱턴 대통령 기념관) 뒤뜰에서 대책을 협의하는 그레이 그랜섬 기자

바로 그 무렵 워싱턴의 법조출입기자로 명성을 날리는 그레이 그랜섬 기자(덴젤 워싱턴扮)는 이상한 전화를 받는다. 대법관의 암살을 암시하는 메모를 사무실에서 보았다는 어느 젊은 변호사의 제보였다. 그랜섬 기자가 자세히 알아보기도 전에 전화를 건 사람은 쫒기는 듯 전화를 끊고, 다비 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걸려온다. 그녀는 이번 사건에 백악관이 관련된 것같다는 말을 하며 지난번 대통령선거때의 거액 기부자명단을 알려달라고 요청한다.

튤레인 대학 구내에서 거행된 친구 캘라한 교수의 장례식에 참석한 FBI 자문관은 뉴올리언스의 미시시피 강변유원지(Riverwalk)에서 다비 쇼를 만나기로 했으나 이 사실이 암살자에게 노출되고 그는 강도에 의해 피살된 것처럼 위장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다비 쇼는 약속장소에서 캘라헌 교수의 친구를 만나 FBI의 보호를 받을 작정이었으나 변장한 암살범이 되레 피격 당해 쓰러진다. 이러한 사실을 눈치챈 특수기관에서 다비 쇼를 감시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된 다비 쇼는 뉴욕으로 피신하여 그랜섬 기자를 부른다. 각자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엄청난 음모가 이루어진 배경을 짜맞춰본다. '펠리칸 브리프' 보고서의 골자는 남부의 유력한 석유업자가 석유채굴을 위해 펠리칸 서식지를 개발하려 하자 환경보호주의자들이 소송을 제기하여 1심에서 패소하고 뉴올리언스 고등법원에 항소중이라는 것과, 3∼4년내에 연방대법원에서 이 사건을 심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연방대법원에서 승소하려면 현재의 대법관중 진보 성향의 환경보호론자는 배제되어야 하며, 거액의 선거자금을 댄 것을 빌미로 그가 대통령의 후임 대법관 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랜섬 기자가 이 사실을 기사화하자면 확실한 물증(物證, hard evidence)이 있어야 한다. 그랜섬과 다비 쇼 두 사람은 수상쩍은 전화를 걸어 온 변호사가 펠리칸 사건을 취급했던 워싱턴의 법률회사에 소속되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를 직접 만나고자 한다. 미국에서 변호사의 신원을 파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도서관에서 법조인명록(Martindale-Hubbell)을 뒤져보고 그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의 확인을 받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가보니 그는 바로 며칠 전에 의문의 노상강도를 당해 죽었다지 않은가. 음모의 세력은 두 남녀를 처치하는 데 혈안이 된다. 인적이 없는 도심 주차장에서의 추격전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남편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긴 변호사의 부인이 그랜섬에게 남편의 은행 비밀금고 열쇠를 건네줌으로써 물증을 확보한 그들은 신문사에 들어와 사건 전모를 폭로하는 기사를 작성한다. 그리고 다비 쇼는 FBI 국장의 배려로 케이만의 한 섬으로 피신한다.

 

* FBI의 증인보호 프로그램으로 케이먼 제도의 한 섬에 숨어들어가 안도하는 다비 쇼

감상의 포인트

소설과 영화 <펠리칸 브리프>는 클린턴 부부의 화이트워터 스캔들에 관여한 백악관 보좌관이 권총자살을 하고 대통령 선거자금 모금운동이 계속 물의를 빚고 있는 미 정계 현실에 비추어 결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더욱이 미 연방대법원의 구성이 국가적인 관심사가 되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대통령이 연방대법관 후보를 지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받아 임명하는 미국에서는 흑백분리·인권보호·낙태허용 등의 이슈에서 보듯 9명의 대법관(Nine Brethren)이 내리는 판결이 궁극적으로 국가정책을 좌우하게 된다. 삼권분립이 철저한 미국에서 대통령은 자기와 정치사상을 같이하는 사람을 대법관으로 임명하고 싶어한다.

미국 로스쿨의 헌법 시간에는 통상 대법관의 성향을 분석하여 주요 이슈의 판결을 평가하고 예측하는 것이 과제로 되어 있다. 언론에서도 종신직인 대법관 자리가 비게 되면 대통령이 어느 판사 또는 법학교수를 지명할 것인지 예상하고 후보별로 성향을 상세히 분석하여 대법원의 인적 구성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또 대법원판결의 경향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전망한다. 이 영화는 여주인공이 환경보호 이슈를 중심으로 대법관들의 견해를 분석하여 사건의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또 이 영화에서는 워싱턴 로펌의 젊은 변호사와 같은 내부고발자가 등장하여 스토리의 진행에 긴장감을 더해준다. 미국에서는 이런 사람을 '호루라기 부는 사람'(whistleblower)이라고 하는데 사회적으로 내부의 은밀한 반칙을 보아넘기지 않고 용감하게 고발했다고 찬사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에서도 TV 앵커의 입을 통해 닉슨 전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은폐(cover-up) 사실을 기자에게 알려준 백악관의 내부고발자(Deep Throat)처럼 다비 쇼의 존재가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환상적'(It's too good to be true)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내부고발자를 고자질이나 하는 비겁한 사람이라고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1992년 3월 총선때 일선부대 장병들의 부재자투표에 부정이 있었다고 양심선언을 한 현역장교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1995년 前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터졌을 때 차명계좌의 내용을 공개한 은행 지점장은 금융실명거래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이는 우리나라와 미국 사회의 법감정의 차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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