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초 강도치사죄로 부산교도소에 수감중이던 무기수(無期囚)가 교도소를 탈옥했을 때 그의 행위가 영화 '쇼생크 탈출'과 너무 흡사하다 하여 많은 화제가 되었다. 탈옥을 다룬 문학작품이나 영화가 많지만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은 하나의 전범이 되고 있다. 누명을 쓰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던 주인공이 교도관을 멋지게 속이고 탈출하여 복수를 감행한다는 스토리는 <몽테 크리스토 백작>이나 1973년도 영화 <빠삐용>처럼 말만 들어도 익사이팅하다.
<캐리>, <미저리>, <돌로레스 클레이본> 등의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의 원작을 토대로 만든 이 영화는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인간에 대한 억압과 폭력, 그리고 자유와 희망을 그리고 있다. 실화가 아닌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그만큼 이러한 주제가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다. 비록 1995년도 아카데미상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가 <포레스트 검프>에 밀려 하나도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인간이 자유와 희망, 제도의 폭력을 둘러싸고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한 이 영화는 오래 기억될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
성실하기 그지없는 은행원 앤디(팀 로빈스)는 아내와 그의 정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불리한 증거 투성이어서 결국 종신형을 선고받고 미국 메인 주의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된다. 감옥내 호모 죄수들의 야만적인 폭력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날 영외 작업중 교도관들이 세금 문제로 걱정하는 것을 해결해 준 것을 계기로 교도소장 이하 교도관들의 재정 자문역을 맡게 된다.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그는 현실에 타협하는 다른 동료 죄수들과는 사고의 차원이 다르다. 흑인 고참죄수 레드(모건 프리먼)는 다른 죄수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앤디에게 호감을 느끼고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와준다. 뭔가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하는 앤디는 벽을 가릴 만한 대형 여배우(pin-up) 사진과 취미생활을 위한 암석 세공용 망치를 구한다. 그리고 독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일을 꾸민다.
교도소장의 총애(?)를 받고 교도소내 사서 보조로 일하게 된 앤디는 구내 도서실을 확장하기 위해 주 정부에 탄원서를 보내고 교도소장에게 압력을 가하는 등 죄수들이 삶의 의미를 되찾도록 애쓴다. 외부로부터 기증 받은 레코드판 중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발견한 앤디는 극중의 아리아를 구내 방송으로 틀어주며 사람다운 삶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앤디는 신참죄수인 좀도둑 토머스로부터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유력한 증언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기쁨에 들뜬다. 그러나 앤디의 재심청구 요청을 받은 교도소장은 자신의 재정관리를 맡아 하면서 각종 부정과 비리를 샅샅이 알고 있는 앤디를 놓아줄 리 없고 그의 부하를 시켜 토머스를 제거한다.
다시 절망에 빠진 앤디는 19년 동안 은밀히 진행시켜 온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의 감방 벽에 붙어 있던 여배우 포스터가 리타 헤이워쓰에서 마릴린 먼로로, 다시 라켈 웰치로 바뀌는 동안 그는 조그만 망치로 탈옥을 위한 터널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천둥 번개가 치는 날 밤 그는 치밀하게 준비해 온 대로 교도소를 탈출하고, 그를 괴롭히던 교도소장과 교도관은 응분의 대가를 치른다.
주인공이 탈옥할 때 하수도관을 뚫어야 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천둥이 치는 것은 너무 가공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첫머리에 소개한 한국판 탈옥기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조선일보 97년 1월 27일자 사회면 기사는 다음과 같이 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1997년 1월 20일 부산교도소에서 쇼생크 탈출을 방불케 하는 탈옥 사건이 일어났다. 무기수 신창원(29)은 한 달 전부터 위장병이 있다고 밥을 먹지 않는가 하면 변비를 이유로 감방내 화장실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일이 잦았다. 신창원의 체구는 174cm에 72kg으로 건장한 편으로 가로 세로 30cm의 환풍구로 빠져나가기 위해 거의 굶다시피 한 것이다. 그는 교도소 음악방송이 나오는 오후 6시 30분부터 7시 사이에 화장실 안에서 굵기 18mm인 쇠창살 2개를 조금씩 잘랐다. 그리고 절단 흔적을 숨기려고 껌을 붙여 놓았다. 감방을 빠져나온 그는 환풍구에서 잘라낸 길이 28cm가량의 쇠창살로 교회 신축공사장 임시 철제담 밑의 땅을 폭 30cm 깊이 30cm쯤 파냈다. 공사장인데다 지질이 부드러워 땅을 파는 데 10분 남짓 걸렸다. 그는 공사장을 지나 교도소 외벽을 타고 넘었다. 이 지점의 적외선 경보장치는 교회당 신축공사를 하면서 단선해 놓아 작동되지 않고 있었다. 신창원은 교도소내 지형지물을 연구하고 치밀하게 준비하고 도구를 마련한 다음 탈옥을 감행한 것이다. 그리고 인근 농원에서 옷가지와 자전거를 훔쳐 도주했다. 이 과정에서 교도소측은 탈옥 가능성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신창원은 강도 행각을 벌이다 강도치사죄로 체포되었는데 평소에 이를 제보한 사람에게 보복하겠다고 별러 왔다고 한다."
또 중앙일보 1997년 1월 21일자 사회면에서는 두 사건을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 "이번 탈옥 사건이 쇼생크 탈출과 다른 점은 그가 독방 아니라 죄수 6명과 함께 수감되어 있었고, 감방 벽에 굴을 판 것이 아니라 환기통을 뜯고 달아난 것 뿐 살인을 했다는 죄목이나 아침 점호 과정에서 탈옥한 사실이 밝혀지고 밖에 나와 옷을 갈아입고 도주한 사실 등이 모두 비슷하다. 그러나 신창원은 탈옥을 2년간 준비한 데 비해 영화 주인공은 20여년간 벽을 팠고, 신창원은 강도 행각을 벌이다 주인을 찔러 숨지게 한 흉악범이지만, 영화 주인공은 은행원으로 일하다 치정에 얽혀 부인을 권총으로 살해한 누명을 썼다는 점이 다르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앤디가 탈출에 성공한 후 내리는 빗속에 두 팔 벌려 환호하는 것처럼 자유의 의미를 여러 모로 일깨워준다. 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구금으로부터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보장 등 인신의 자유는 마그나 카르타 이래 인류가 추구해 온 기본적 인권이었다.
주인공은 막강한 국가 권력이 개인의 억울함을 해소시켜 주기보다는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누명을 씌우는 데 분노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죄를 짓지 않은 만큼 처벌받을 이유가 없다"는 소박한 정의(正義) 감정에서 탈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에 옮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처음부터 독자와 관객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교도소장이 주인공의 무죄를 밝혀줄 수 있는 증인을 살해한 것은 관객들을 안타깝게 만든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에도 재심(再審)이라는 비상 구제절차가 마련되어 있다. 즉 판결이 확정된 다음에 진범이 따로 있다는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 사실인정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 원심법원에 재심을 청구할 수 있게 되어 있다(420조). 유죄의 선고를 받은 자나 법정대리인은 물론 그가 사망한 경우에도 배우자, 직계친족 또는 형제자매가 재심을 청구할 수 있으며(424조) 시기에도 제한이 없다(427조).
그러므로 주인공은 관객들의 성원을 받아 불의와 싸우는 정의의 사도로 탈바꿈한다. 그가 교도소장을 위해 가공인물을 만들어 은행 거래를 하면서 돈 세탁(money laundering)을 할 때 교도소장은 앤디가 그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줄 알고 있지만, 앤디는 그 돈을 가로챌 궁리(불법영득의 의사)를 하고 여러 가지 장치를 만들어 놓는다. 교도소장은 앤디를 교도소 안에 붙잡아 놓기 위해 그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유력한 증인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앤디의 횡령·배임 행위는 관객들에게 마치 정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처음부터 무죄임에도 종신형을 받은 만큼 그가 하는 다른 범죄 행위는 상쇄된다고 볼 수 있을까. 원작자는 처음부터 이 문제를 의식한 듯 여기저기 복선을 깔아 놓았다. 앤디가 처음 교도관들에게 절세 요령을 가르쳐주고 그 대가로 동료 죄수들과 시원한 맥주를 얻어 마실 때 아무 표정없이 혼자 따로 앉아 있었다고 하였는데, 원작자는 그가 자신의 컨설팅 서비스가 무료 봉사가 아니라고 속으로 다짐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또 그가 교도소 구내 방송실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오페라 아리아를 틀어줌으로써 뜰안에 있던 죄수 전원을 부동 자세로 만든 것도 그가 희구하는 자유의 값을 매길 수 있게 하는 장면이다. 자유의 참된 가치는 그 무엇으로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것임을 충격적인 영상으로 가르쳐 준다. 나이 많은 죄수가 만기 출소한 후 넘치는 자유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다분히 희화적이지만 가석방 심사를 받는 레드가 고분고분하지 않고 저항하는 태도를 취하여 가까스로 석방될 수 있었던 것도 작자 나름대로 자유의 본질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사실 우리가 헌법상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자유권들도 권력자의 자비로운 선물이 아니라 수많은 자유주의 투사들의 피를 먹고 자란 나무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영화 대사중 앤디의 독백은 우리에게도 고무적이다. "희망은 좋은 것이다. 좋은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영화 마지막 장면의 주인공이 멕시코의 한적한 해변에서 배를 손질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자유에 관한 충분한 대리만족을 얻었다는 만족감을 얻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
⇒‘흘러간 영화’(Old Movies) 전체 감상: 리스트는 이곳을 클릭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발이 너무 해(Legally Blonde, 2001) (0) | 2022.02.19 |
---|---|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 2000) (0) | 2022.02.19 |
펠리칸 브리프(Pelican Brief, 1993) (0) | 2022.02.19 |
필라델피아(Philadelphia, 1993) (0) | 2022.02.19 |
브리짓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s Diary, 2001) (0) | 2022.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