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금발이 너무 해(Legally Blonde, 2001)

Whitman Park 2022. 2. 19. 08:25

영화 <금발이 너무 해>(Legally Blonde: 감독 로버트 루케틱)는 가벼운 터치의 코미디 영화이다. 무대가 하버드 로스쿨이고 형사법정이 나오지만 굳이 법률영화라고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 학기가 시작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1000명을 뽑는 사법시험에 돌입할 것을 생각하니 우리 젊은이들도 영화 속의 주인공과 같은 열정이 필요하겠다 싶어 주의 깊게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과연 법학교육은 몸매관리(work-out)와 파티에나 관심이 많은 금발 미녀를 정장차림의 여자변호사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영화의 줄거리

금발의 여주인공 엘 우즈(리스 위더스푼)는 대학 기숙사 'ΝΔ'(미국 대학의 기숙사는 그리스식 이름을 갖고 있음)에서 자치회장을 하며 멋있는 청년이 프로포즈해줄 것을 기대하는 평범한 졸업반 여대생이다. 그런데 하버드 로스쿨(법과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남자 친구 워너 헌팅턴(매튜 데이비스)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는다. 워너는 대를 이어 나이 설흔 전에 국회의원을 해야 하므로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될 명문가 출신의 지적이고 진지한(serious) 여성과 결혼할 것이라고 말한다. 엘이 "too blonde"(금발의 백치미인)라서 싫다는 것이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엘 우즈는 1주일 동안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다가 자기도 하버드 로스쿨에 가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그녀의 친구나 부모는 모두 엘 우즈를 극구 만류한다. 미인대회에서 우승도 하였겠다 패션 전공을 살려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 있는데 고생해 가며 법률공부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로스쿨에 다니는 여학생은 못생기고 재미없고 너무 진지한(ugly, boring and serious) 족속이라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엘 우즈는 자기소개서에 여성 법률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교수추천서를 받는다. 자신의 '끼'를 돋보이게 하고 남자 교수들에게 호감을 사고자 수영복 차림으로 비디오를 통해 자기소개를 한다. 문제는 하버드에 가려면 LSAT(로스쿨 학력시험) 점수가 175점은 넘어야 하는데 의상학(fashion merchandising)을 전공한 실력으로는 143점이 고작이다. 말투도 법률용어를 쓰는 등 모든 생활을 법적인 것으로 바꾸고 나서야 마침내 179점을 받는 데 성공한다.

하버드 로스쿨 입학사정위원회에서는 리키 마틴의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한 적이 있는 엘 우즈의 다양한 특별활동 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입학을 허가한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이른바 골빈당으로 알려진 '말리부 바비'(할리우드 연예인을 동경하며 바비 인형처럼 꾸미고 사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젊은 여자)가 보스턴에 당당히 입성한다.

하버드 로스쿨 학생들은 소문 그대로 특출하다. 모두들 공부벌레이고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수두룩하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엘 우즈는 법대에 사무착오로 들어온 금발의 골빈당일 뿐이다. 교수들도 예습도 않고 수업을 들으러 온 그녀에게 면박을 주고 강의실에서 내쫓는다. 그녀도 법학 공부는 처음부터 새로운 언어와 마음자세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엘 우즈가 사랑을 되찾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찾아왔음에도 옛 남자친구 워너는 이미 동부 명문가 집안의 비비안 켄싱턴(셀마 블레이어)과 약혼을 한 사이이다. 엘 우즈는 머리 좋은 비비안에게 적수가 될 리 없지만 붙임성 있게 접근한다. 비비안으로부터 이색적인 복장을 하고 모이는 파티(costume party)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플레이보이 걸 차림으로 파티장에 나간다. 비비안이 자신을 '왕따'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라 파티장에서 야한 복장을 한 것은 자기 혼자뿐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기분이 울적해지고 법 공부를 당장 때려치우고 싶다가도 캘리포니아에서 하던 식으로 매니큐어 살롱에 가서 손톱을 매만지면 기분전환이 되곤 한다. 매니큐어 살롱에서 남편에게 소박맞은 여종업원을 만나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기보다 그녀를 동정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 법 공부의 요령을 터득하고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되면서 수업시간의 토론에서도 지지 않을 만큼 법률실력이 부쩍 향상된다.

엘 우즈는 형법을 담당하는 캘러헌 교수(빅터 가버)의 인정을 받게 되어 그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그녀를 포함한 하버드 법대생들이 처리해야 할 사건은 34년 연상의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에어로빅 강사 출신인 윈덤 부인이다. 여러 하버드 수재들이 캘러헌 교수의 지도로 소송전략을 짜느라 머리를 싸매지만 결백을 주장하는 윈덤 부인이 사건 당일의 행적에 함구를 하고 있어 무죄 판결을 받아낼 가능성이 희박하다. 피살자의 딸은 새엄마가 아빠의 재산을 노려 권총으로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계모가 풀장 관리인하고 정을 통한 적도 있다고 폭로한다.

애가 탄 엘 우즈는 윈덤 부인이 자기에게 에어로빅을 가르쳐준 모교의 선배인 것을 알고 개인적으로 구치소에 면회를 가서 사건 당일의 행적을 캐묻는다. 절대 비밀임을 다짐받고 피의자가 실토한 것은 몸매관리 비디오까지 낸 사람이 그 시간에 남몰래 지방흡입술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피의자의 무죄를 확신하게 된 엘 우즈는 소송의뢰인이 비밀로 해달라는 것을 밝힐 수는 없고 "에어로빅을 하는 사람은 엔돌핀 분비가 많아 살인을 할 수 없다"는 원칙론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사이 캘러헌 교수는 엘 우즈의 장래를 걱정해 주는 척하면서 로펌에 특채하겠다고 하고 그녀의 몸을 더듬으려 하자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빅토리아 시크릿'(여성용 속옷 메이커)의 모델처럼 외모로만 평가받는 것에 환멸을 느낀다. 그렇지만 윈덤 부인의 사건에서 엘 우즈는 캘리포니아에서 살았던 그녀만의 경험을 살려 몇 가지 특종을 한다. 윈덤 부인의 부정을 폭로한 검사측 증인인 풀장 관리인이 호모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윈덤 부인이 캘러헌 교수가 못미덥다며 소송대리인을 해촉하자 그녀 스스로 변호인이 되어(매사추세츠주 대법원 결정에 의하면 로스쿨 재학생도 변호사의 지도 하에 법정 변론을 할 수 있음) 증인신문을 한다. 피해자의 딸이 파머를 한 후에 샤워를 하며 머리를 감느라 총소리를 못 들었다고 증언하자 반대신문을 통해 파머 직후에 파머가 풀어지는 샤워를 하였다는 것은 거짓말임을 공박한다. 그리고 허를 찔린 증인으로부터 마침내 "계모인 줄 알고 총을 쏘았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성공적으로 변호사로 데뷰한 엘 우즈는 하버드에서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달리 졸업식에서는 졸업생을 대표하여 연설을 한다. 자신에게 법학은 힘들었지만 법이 배제해야 한다고 하는 열정(Law is reason free from passion.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금언)이야말로 변호사 활동을 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핵심요소(Passion is a key ingredient to the study and practice of law, and the life)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다소 코믹한 과장은 있어도 하버드 로스쿨의 독특한 교수법을 부분적으로나마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의 법과대학에서도 실시하고 있지만, 바로 특정의 실제사건(case) 또는 가상사건(hypo)을 놓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교수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소크라테스 방식(Socratic method)이다.

원래 미국의 법률교육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도제(apprentice)식으로 행해졌다. 주임 변호사가 제자들에게 교재를 가르치거나 또는 실제사건을 처리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우게 하는 식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하버드 로스쿨의 형법교수가 자신이 수임한 형사사건에 학생들을 인턴으로 채용하여 일을 배우게 하면서 OJT 현장교육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 로스쿨에서는 소장 작성, 의뢰인 상담, 법정변론 등 실제 변호사가 하는 일(lawyering, legal writing 등)을 가르치므로 2학년 2학기부터는 아르바이트 차원이 아니라 실제 업무를 익히기 위해 변호사 인턴십을 하는 예가 많다. 변호사 자격이 없더라도 정식 변호사의 지도 감독 하에 법조업무를 수행한다.

미국 유수의 사립대학들이 설립한 로스쿨에서도 처음에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행하던 대로 교과서와 강의, 그리고 모의재판을 통한 실습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1870년 하버드 로스쿨의 초대학장인 크리스토퍼 랭덜(Christopher Langdell)이 새로운 교육방식을 도입하였다. 그것은 구체적 사건의 판례연구를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법의 역사적·사회적 전개과정을 익히도록 하는 사례연구 방식(case method)이었다. 구체적인 방법은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사용했던 산파술(midwifery or dialectic method) 문답법이었다(소크라테스식 법학교육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Phillip E. Areeda, The Socratic Method, 109 Harvard Law Rev. 911 (1996), 동 번역문은 ジュリスト(No.1239) 2003.2.15, 81∼91면에 실려 있음).

하버드 로스쿨 강의에 있어서 사례연구의 출발점은 객관적 사실이다. 여러 가지 사실로부터 법률적인 판단을 하려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이 불가결하다. 이 영화에서도 할리우드에서 살아본 엘 우즈 아니면 간과하기 쉬운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아무리 날고기는 수재들이 모인 하버드 로스쿨이라 해도 엘 우즈 외에는 어느 누구도 파머를 한 날 머리를 감았다는 증언을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여주인공은 법률소양이 전혀 없었지만 병치레 많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병원진료에 관심을 가졌고 아무도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았던 진료비 청구서에서 엄청난 환경공해 사건의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로스쿨에서는 사회현상에 대한 폭넓은 식견과 함께 임상 법률교육(law clinic)을 중요시하고 있다. 예컨대 법의학적 판단을 위해 의학적 소양이 요구되는가 하면, 최근 급증하고 있는 컴퓨터나 경제범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들 분야의 전문지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도 이미 로스쿨 설치기준을 공표하고 사법시험 제도를 고쳤으며, 200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미국식 로스쿨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식 법학전문대학원을 도입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기를 띠고 있다. 지금처럼 학부에서 교과서와 법전을 달달 암기하게 하는 것보다는 우선 다양한 전공을 쌓게 한 다음 대학원 과정에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법률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 시대조류에 맞을 거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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