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AIDS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다루어 화제가 되었던 영화 <필라델피아>(1993년 트라이스타 제작)는 주인공들이 모두 변호사인 것이 이채롭다.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처음 선포된 역사적인 곳이지만 지금은 도심 지역을 제외하고는 도시 중앙부가 슬럼화되어 있다. 범죄와 동성애, AIDS로 만연된 도시 분위기는 94년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브루스 스프링스턴의 'Street of Philadelphia'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영화가 법정영화이면서도 예술성이 돋보이는 것은 음악을 통한 주제의 전달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나단 딤이 제작과 감독을 맡은 이 영화에는 여러 편의 음악이 삽입되어 있는데, 특히 이태리 작곡자 움베르토 지오르다노가 프랑스의 시인 안드레아 셰니어(Andrea Chenier)를 소재로 만든 동명의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가 단연 압권이다. 마리아 칼라스가 혼을 쥐어짜듯 부르는 노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La Mamma Morta)'는 주인공의 심정을 기가 막히게 잘 표현하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폭도들이 귀족의 저택을 약탈·방화하고 이에 저항하는 백작 부인을 살해한다. 이 곡은 불타버린 건물의 잔해 속에서 몇 가지 소지품을 챙기면서 딸 마들렌느가 흐느끼며 부르는 아리아다. 국외탈출 기회를 놓친 안드레아 셰니어는 결국 체포되고 그를 사랑하는 마들렌느도 그와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영화의 줄거리
앤드류 베켓(톰 행크스)과 조 밀러(덴젤 워싱턴)는 서로를 얕잡아 보는 필라델피아의 변호사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앤디는 이 도시 최대의 법률회사(law firm)에서 장래가 촉망되지만 억지를 일삼는 소장 변호사이고, 조는 TV 광고를 통해 근근히 손해배상 사건을 수임하는 소송 변호사이기 때문이다.
앤디가 실력을 인정받아 승진을 하고 대기업 소송을 전담하게 되는 찰나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에 감염된 것으로 밝혀진다. 동성애자인 그가 심한 설사 증세로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직장 내시경 검사를 하자고 하지만 그는 AIDS임을 직감한다. 이를 눈치챈 로펌에서는 AIDS를 이유로 그를 해고하지는 못하고 소송서류의 간수를 소홀히 했다는 책임을 뒤집어 씌워 쫓아낸다.
앤디가 소장 제출 전날밤 책상 위에 챙겨놓은 서류 및 컴퓨터 파일이 없어져 소동이 벌어진 것인데, 다행히 마감시간에 임박해 서류를 찾아 법원에 제출하였으므로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것은 아니다. 로펌을 상대로 부당해고 취소 소송을 제기하고자 하는 앤디에 대해 변호사들은 대형 로펌을 상대로 소송하는 것은 가망이 없다며 수임을 거절한다. 조를 찾았을 때에도 마침 첫 딸을 낳고 기쁨에 들떠 있던 조는 앤디와 악수를 나눈 것만으로 자신이나 아기에게 AIDS가 전염될지 몰라 꺼림칙해 한다. 건전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조는 동성애자를 불결하게 여기고 그들과 한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역겨워 하는 사람이다.
그로부터 2주일후 거리에 크리스마스 자선 냄비가 등장할 때 조는 도서관에서 AIDS 관련 판례를 조사하는 앤디를 만난다. 도서관 사서가 AIDS 환자임이 분명한 앤디더러 다른 방에 가서 책을 보라고 채근하는 것을 목격한 조는 묘하게도 그에게서 동병상련을 느낀다. 변호사이지만 흑인인 조 역시 어디서나 질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조는 혼자 소송을 준비하는 앤디를 도와 로펌을 상대로 법정 싸움을 벌이기로 한다. 그들이 근거로 삼은 법률은 1973년 직업재활법(Federal Vocational Rehabilitation Act)이다. 이 법에 의하면 어느 고용주든지 자격을 갖춘 장애자(the qualified handicapped)가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한 그를 해고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앤디와 조는 연방대법원 판례에서 AIDS 환자의 경우 법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집단의 추정된 특성에 기인한 차별이 마찬가지로 금지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앤디의 제소에 대해 로펌의 시니어 파트너들은 그가 신뢰를 저버리고 태연히 사무실내에 AIDS 바이러스를 뿌리고 다녔다고 분개한다. 필라델피아에서 존경받는 그들이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에 법정에 소환되어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며 앤디에게 적당한 보상금을 주고 사건을 마무리하자는 일부 주장을 일축해버린다.
부모의 결혼 40주년 기념 파티에 참석한 앤디는 가족들의 양해와 협조를 구한다. 재판이 시작되면 모든 것이 공개될 터인데 괜찮겠느냐는 앤디의 우려에, 가족들은 힘들겠지만 용기를 갖고 정당하게 권리를 찾아 싸우라고 격려한다.
그로부터 7개월후 배심원들 앞에서 사실심리가 시작되자 원고와 피고측 주장은 평행선을 달린다. 원고측은 앤디가 훌륭한 변호사로서 자신의 감염 사실을 공개하지 않을 법적 권리를 갖고 있음에도 고용주가 그 사실을 알고 그를 해고하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피고측은 AIDS 때문이 아니라 그의 직무수행 능력이 의심스러워 해고한 것이지만, 그는 이미 죽어가고 있으며 분노에 찬 나머지 누군가에게 보복하고자 하는 위험인물이라고 공박한다.
법정 밖에서는 연일 동성애자 규탄 데모가 벌어진다. 이 와중에 조는 사건의 중심을 AIDS로 몰고 간다. 그리고 오래 전에 독립선언을 하였던 도시에서 형제애를 발휘하기는 커녕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은 역사적인 모순이고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외친다.
AIDS 바이러스에 오염된 혈액을 수혈받아 투병중인 여인이 증언대에 앉아 자신이 도덕적으로는 떳떳할지는 몰라도 다른 AIDS 환자와 다를 바 없다며 살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인정해 달라고 호소한다. 로펌에서는 책임자로 승진한 흑인여성을 증인으로 내세워 차별이 없는 직장임을 과시한다. 증인 신문이 계속되는 동안 회사에서 조직적으로 앤디의 소송서류와 컴퓨터 파일을 숨겼음이 드러난다. 조는 원고측 증인에 대해 "당신도 게이가 아니냐"는 뜻밖의 질문을 던져 법정에서는 한 불쌍한 AIDS 환자가 부당하게 차별대우를 받은 것보다 그 사람의 성적인 취향(sexual orientation)이 문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앤디의 병세가 깊어지고 그는 자신의 동성애 파트너(안토니오 반데라스)에게 죽음이 다가옴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게이들의 파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앤디와 조는 마지막으로 앤디가 증언대에 서서 결정타를 날릴 궁리를 한다.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어'에 나오는 아리아를 들으며 절규하는 앤디를 보고 조는 전혀 색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과연 앤디는 하늘에서 병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내려온 神인가. 그는 집에 돌아와 곤히 잠든 딸을 안아보며 새삼 가족애를 느낀다.
마지막 신문에서 앤디는 필라델피아에서 제일 큰 로펌에 들어와 선배 변호사들을 존경하고 그를 본받기 위해 노력했다고 술회하고, 그 자신이 법을 사랑하고 법을 실천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정의의 실현(Justice be done)에 기여할 때 보람을 느꼈다고 말한다. 로펌측 변호사가 앤디가 신실치 못함을 공박할 때 병세가 악화된 앤디는 그만 법정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이어 열린 배심원 평결에서 한 사람을 제외한 배심원들은 앤디가 큰 사건을 맡아 하기에 부족한 변호사(mediocre lawyer)는 결코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로펌측에 밀린 봉급과 위자료 외에 징벌적 배상금(punitive damage)으로 도합 5백여만불을 지급할 것을 명한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주인공이 모두 변호사인 만큼 미국 변호사 사회의 내막을 엿볼 수 있다. 첫 장면에서 앤디와 조가 법정에서 대결을 벌인다. 똑같은 변호사(counselor)이지만 조는 건축공사장의 먼지(nuisance)로 기침이 심해진 천식환자를 대신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상해(personal injury) 사건전문 변호사이고, 앤디는 대형 건설회사의 위임을 받은 소송대리인이다. 전자는 'Street Lawyer', 심지어는 'Ambulance Chaser'라고까지 부르는데 이 영화에서 보듯이 신문·TV를 통해 "억울한 일이 있으면 소송을 하라"는 광고를 내기도 한다. 후자는 'Corporate Lawyer'라고 하며 많은 변호사들을 거느린 로펌이 소속 변호사로 하여금 은행·증권·M&A·해외투자·지적재산권 등 전문분야별로 대기업 고객에 대한 자문을 하게 한다.
상해전문 변호사는 개인적으로 사무실을 차리고 소송사건을 위임받아 처리하는 반면, 기업변호사는 큰 로펌에서 실적에 따라 단계적으로 Associate→Senior Associate→Partner→Managing Partner로 승진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앤디의 이마에 AIDS 반점이 처음 발견되는 장면에서 그가 큰 소송을 맡게 된 것을 자축하는데 이는 마침내 한 사건을 전담하는 Senior Associate로 승진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로펌은 대부분 조합(partnership) 형태를 취하므로 소속 변호사의 해고 등 중요 사안은 대표변호사들(managing partners)들이 서로 협의해서 결정한다. 그 결과 영화 속의 부당해고 사건에서 모두 공동피고로 소환 당하게 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앤디가 소장(complaint)을 분실했다 하여 로펌으로부터 해고 당하는데 그렇게 중대한 징계사유인지 잘 납득이 안된다. 사실 미국 법원에서는 일단 소송기일이 잡히면(이를 'placing case on calendar'라 함) 변호사가 정해진 기일에 필요한 서면을 제출하지 않거나 법정에 출석하지 않는 것은 업무상 과실(malpractice) 소송대상이다. 그래서 미국 변호사가 개업을 한 후 맨처음 하는 일은 책임보험에 들기 위해 수표를 끊는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멀프랙티스 소송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변호사가 고객에게 "내게 전부 맡기라"는 식의 장담을 하지 말고, 광고로 고객을 유치할 때 한 약속은 모두 지켜야 하며, 과거 및 현재의 소송의뢰인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있는지 잘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의를 받는다.
이 영화의 결론 부분에서 배심원들은 로펌에 대해 무려 480만불 가까이 되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명하는 평결을 내린다. 징벌적 손해배상이란 불법행위 소송에 있어서 가해자측에 악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을 때 실제 발생한 손해(actual damages)와는 관계없이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특별히 명하는 징벌적 성격의 손해배상을 말한다. 그 금액이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한 재판장도 배심원의 결정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 이 사건에서 로펌의 저명한 변호사들이 법을 잘 알면서도 AIDS로 고생하는 소속 변호사를 불법 해고하고 그의 명예를 짓밟은 데 대해 평범한 시민인 배심원들이 이와 같이 응징한 것이다.
끝으로 AIDS 환자역을 열연한 톰 행크스가 1994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데 비해 그의 파트너인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평범한 조연에 그친 것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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